***풍경소리/불교와 인문과학

소수자와 빈자를 위한 불교적 모색

slowdream 2008. 7. 7. 11:36
 

소수자와 빈자를 위한 불교적 모색


이도흠 한양대 교수





1. 재현의 위기 시대에서 소수자 및 빈자의 위상


1) 소수자들의 개인적 고통과 소외


가짜가 진짜를 대체하고 가상성이 현실의 한 켠을 차지하고 이미지가 현실을 조작하는 등 ‘재현의 위기’는 21세기의 지배적 문화적 현상이다. 재현의 위기론은 디지털사회 등 달라진 환경에서 현실과 인간 존재, 그리고 인간들이 어우러지면서 빚어내는 예술과 문화에 대해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생각할 수 있는 지평을 연다. 가상성과 현실성은 존재의 두 가지 다른 방식이며 매트릭스적 실존은 우리의 본래적 실존이다.


현재 세계 인류는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 인간성의 상실과 이성의 도구화, 미국 문화의 세계화, 소외와 갈등의 심화와 보편화, 공동체의 파괴, 억압과 폭력의 구조화 및 내면화 등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런 위기를 맞아 인류는 하루하루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면서 새로운 사회를 꿈꾸고 있다. 권력과 자본에서 기득권층에 비하여 월등히 열등한 상황에 있는 이주 여성, 이주 노동자, 장애인, 노인, 여성 등 소수자들은 더욱 소외를 겪고 있다. 욕망이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절대 빈곤층만이 아니라 부유한 자들까지도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빈자로 전락하고 있다.


산업화, 근대화와 자본주의 체제는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전도하면서 소외를 보편화하고 있다. 교환가치와 사용가치가 전도된 사회에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 물화(物化, reification)다. 자본주의 사회는 교환가치를 우선시하여 모든 것을 물질로, 화폐로 대체하여 바라보기에 사람들의 관계가 사물의 성격을 지닌다. 물화한 개인은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물질의 눈으로, 상품관계로 바라본다.


물화한 우리는 서로를 소외시킨다. 사랑하는 배우자를 고를 때조차 그 사람의 교환가치를 따진다. 나 스스로가 인간성을 상실하였으며 타인 또한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나를 가장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몇몇 물질을 얻고자 나를 죽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노동으로부터, 대상으로부터, 타인들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된 현대인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모두가 고독하고 항상 불안하다.


이런 소외는 상호 인간적인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는데,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하여 공동체는 해체되어 버렸다. 신자유주의는 동료를 경쟁상대로 내몰면서 개인 사이에 자리하던 연대의 끈마저 끊어버렸다. 그들의 소외와 고독, 불안을 잠시나마 달래줄 자연은 파괴당하여 전 지구촌 사회가 공멸의 위기에 있다. 국가는 국가대로 대내적으로는 권력 및 자본가 층의 지배를 영구화하기 위하여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와 헤게모니를 더욱 소수자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운용하고 있고, 대외적으로는 국가 이기주의에 입각한 경제전쟁과 문화전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


이러는 가운데 계급 간, 이익집단 간, 민족 간, 종교와 사상 간의 분열은 전쟁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치열하다. 소수자, 가난한 나라는 더욱 빈곤의 고통을 겪고 있으며, 권력욕과 물욕, 잘못된 믿음 때문에 억압과 착취, 고문과 테러, 학살과 전쟁이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다. 인터넷과 컴퓨터가 결합하여 형성된 가상세계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이미지와 가상을 통해 대중을 찰나적인 향락과 과잉소비로 내몰고 있다.


대중들은 주체적인 인식이나 판단 없이 인터넷 바다를 떠돌고 미디어와 국가와 자본의 포로가 되어 찰나적인 욕망을 추구하고 그들의 요구대로 소비하며 자신들을 억압하고 조작하는 것에 대해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마음과 몸이 모두 가난한 삶, 늘 고독하고 불안하며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 모든 현실과 진리를 상품화된 이미지나 왜곡된 이데올로기로 조작해버리는 허상들에 가려져, 이들의 비판적 이성은 마비되었으며 자유와 정의를 향한 정열은 거세당했다.


2) 소수자들의 정치적 소외와 고통, 빈곤


산업 사회에서는 희귀본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원로학자 구실을 할 정도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자가 위세를 부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누구라도 몇 번 클릭만 하면 백과사전 수천 권 분량의 정보를 안방에 앉아서 접할 수 있다. 정보화 사회는 지식과 권력의 원천인 정보를 공유하고 분점한다. 자연히 권력의 위계질서가 파괴되고 탈중심화한다. 누구든 컴퓨터를 통해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정책을 제안하고 자신이 원하는 후보와 정책에 투표를 하고 곧바로 답, 또는 피드백을 확인할 수 있다. 직접민주정치의 길이 다시 열린 것이다. 그러니 이 사회는 텔레데모크라시를 실현하여 대중의 정치참여를 고양하고 다양한 의사와 견해를 수렴할 수 있다.


반면에 몇몇 빅 브라더(big brother)가 정보를 독점하고 통제한다면 이 사회는 산업 사회보다 훨씬 더 억압이 내재화한 전체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 파워엘리트 층은 정보와 채널을 독점하고 몰래카메라가 개인의 사생활을 엿보듯 개인을 통제하고 있다. 우리의 비밀스런 잠자리까지도 몰래카메라로 감시되고 빅 브라더의 뜻에 어긋날 경우 ‘O양의 비디오’처럼 공개될 수 있다. 텔레데모크라시는 꿈일 뿐, 우리는 개인의 사생활마저도 철저히 감시되고 통제되는 사회로 가고 있다.


컴퓨터와 인공위성, 로보트공학을 결합한 이 메커니즘의 통제력과 조정력, 수용능력은 가히 상상을 불허한다. 아울러 디지털 격차(digital devide)는 양적인 면과 질적인 면 모두에서 현실화하고 있다. 양적인 면에서는 컴퓨터와 인터넷을 설치하고 다룰 줄 아는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 사이의 격차가 산업 사회의 계급 격차 이상의 불평등을 야기하고 있다. 질적인 면의 격차는 더욱 큰 문제이다.


 디지털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많은 정보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그 정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인터넷을 아무리 잘 하더라도 거기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양적인 정보를 모으는 데 급급한 집단과 정보를 모아 새로운 지식과 지혜를 창출하는 집단 사이의 격차는 새로운 지배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당연히 후자는 새로운 지식 계급으로 부상하고 있고 이들은 정보를 모아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면서 그렇지 못한 자들을 지배하고 통제하고 있다. 때문에 정보화 사회가 진행될수록 현재의 불평등과 독점, 억압구조가 산업 사회보다 더 굳건하고 깊게 뿌리를 내릴 가능성 또한 크며, 대중은 더욱 빈곤해질 수밖에 없다.


3) 소수자들의 경제적 소외와 고통, 빈곤


정보화 사회에서는 말 그대로 “빛의 속도로 거래하고 소비한다.” 한국의 사무실에서 나스닥에 상장된 증권에 투자할 수 있다. 인터넷에 오른 남 캘리포니아의 요트를 사이버 머니로 구입하면 며칠 안에 그 요트가 주문자의 집에 당도한다. 정보혁명으로 산업구조가 유통과 전자, 통신 위주로 재편되고 공장자동화(FA), 사무자동화(OA), 가정자동화(HA)가 단행되었다. 세탁기 사용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매일매일 엄청난 양의 가사노동에서 벗어났는데 휴대전화로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는 가정의 주부는 전 시대의 어떤 주부보다 자유로울 것이다. 노동자들은 중금속으로 가득한 작업실에 로봇을 대신 보내고 남는 시간을 여가로 활용할 수 있다.


역기능은 경제의 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발전론자들은 전자매체의 확산으로 근대화와 산업화가 미진하였던 영역에도 이의 혜택이 고루 퍼지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케이블, 위성통신, 컴퓨터를 매개로 선진 중심국가에 의한 주변 제3세계에 대한 잉여 착취와 저발전과 억압과 통제는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이후 자본주의 사회는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정글법칙대로 생존이 결정되고, 저 밑에서는 삶이 아니라 죽음으로 향하는 욕망이 꿈틀대는 거대한 쇼핑센터로 전락하였다. 이 쇼핑센터에서 모든 것이 거의 빛의 속도로 거래되고 교환된다. 이는 빛의 속도로 착취할 수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자동화는 노동의 억압에서 노동자를 구출하는 대신 억압을 더욱 강화하고 있기도 하다. 정보화 사회는 계획수립으로부터 작업의 감시, 평가에 이르기까지 전 노동의 공정을 기술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자동화가 지금의 추세로 진행될 경우 20%만이 노동을 하고 80%가 실업의 소외와 좌절감에서 나날을 연명할 ‘2 대 8의 사회’를 형성할 수 있다.


게다가 정보화 사회는 아주 사소한 실수로도 핵전쟁과 같은 대형사고가 날 수 있는 위기의 사회이다. 보도가 되지 않을 뿐 지금도 병원이나 공장 컴퓨터의 미세한 오류로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컴퓨터를 사용한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바이러스나 운영체제의 오류 하나로 오랜 세월의 연구나 노력을 한숨에 날려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정보화 사회에서 네티즌은 더욱 착취당할 수 있고 유통과 교환에서 소외된 정보재의 빈자로 전락할 수 있다.


4) 소수자의 사회문화적 소외와 고통, 빈곤


산업 사회의 대중문화 속에서 부품화하고 원자화하던 대중들의 위상이 바뀌고 있다. 그들은 영화든 텔레비전이든 작가의 의도대로 감상하고 해독하도록 강요되었다. 그들은 감독의 의도대로 웃고 울고 흥분하는, 욕망의 대상, 조작의 대상, 상품소비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정보화 사회에서 그들은 하이퍼텍스트를 만들고 쌍방향으로 소통하면서 스스로 미디어를 선택하고 미디어 텍스트를 창조하는 주체로 거듭나고 있다.


인터넷은 말 그대로 정보의 바다이다. 여기서 네티즌들은 항해를 하며 정보를 취합하여 단순히 양적 확대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창조한다. 인터넷을 통해 무한한 정보를 서로 나눌 수 있고 이로써 새로운 정보를 무진장하게 창출할 수 있다. 이것은 인류가 창조한 어떤 매체보다 효과적이고 기하급수적이다. 사이버 공간은 익명성과 쌍방향 소통으로 인하여 현실 공간에서 작용하던 가부장적 권력이 무너지는 장이기도 하다. 네티즌들은 익명성과 다중정체성이 보장되기에 현실 공간의 권력과 권위를 마음껏 조롱하고 풍자하고 공격할 수 있다.


반면에 정보홍수는 개인을 무력화하고 소외를 더욱 강화할 수 있다. 인터넷 중독증은 식음을 전폐하고 인터넷 게임을 하다가 벌써 여러 사람이 죽을 정도로 새로운 문명병으로 부상하고 있다. 인터넷으로 원조교제가 확산되고 음란물이 아무런 제재 없이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유통되면서 도덕은 황폐화하고 있다. 진지한 비판이 사라지고 인신공격형 악플이 정보의 바다에 쓰레기로 떠다니게 한다. 인터넷은 개인의 사고와 삶을 단순화하고 있으며 개인을 더욱 고립시키고 있다. 인터넷을 떠도는 네티즌은 전 세계를 향하여 무한대로 열린 대화를 하는 어엿한 주체가 아니다. 그는 대화를 시도하지만 항상 혼자인, 인터넷 바다의 고독한 조난자일 뿐이다.


이들보다 더 강력하고 역기능이 심한 정보화 사회의 최대 적은 인터넷 제국주의, 혹은 미디어 제국주의이다. 미국 드라마와 할리우드 영화의 점유율, 미국의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점유율은 전 세계 80%에 이른다. 세계 정보와 뉴스의 흐름도 CNN과 AP 등 미국의 통신사가 관장하고 있다. 인터넷의 정보를 관장하는 호스트 또한 80% 이상을 미국이 점하고 있다.


비단 이것만이 아니다. 마이크로 소프트, IBM, 엑슨 등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은 컴퓨터, 위성통신 수신기, 케이블 등을 통하여 제3세계의 기업과 정부를 마음대로 통제하고 조작할 수 있는 네트워크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 네트워크에 들어온 자들의 결속은 점점 더 강화되고 이의 대외적 영향력은 점점 더 증가하였다. 이로써 이제 제3세계에서는 국가조차 이 네트워크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으며, 오히려 거꾸로 이 네트워크가 제3세계의 국가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정보화가 진행될수록 ‘미국 문화의 동시화’가 더욱 강화될 것이며 현재의 불평등은 더욱 심화할 것이다. 네티즌들은 인터넷 바다를 항해하면서 알게 모르게 미국의 생활양식, 가치관, 꿈의 양식을 내면화한다. 이제 정보화 사회의 개인은 인터넷과 CNN 등 미국 중심의 매체가 만든 재현의 폭력에 휘둘려 그들처럼 사고하고 행동하고 꿈마저 꾸는 빈자들이다.


5) 자연으로부터의 소외와 고통, 빈곤


전 지구가 환경위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1초 동안 0.6 헥타르의 열대우림이 파괴되고 하루에만 100여 종의 생물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2050년까지 80%의 이산화탄소의 양이 증가하여 2100년까지 지구의 평균온도는 3도, 해수면은 0.65미터나 상승할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예측한다.


오염된 공기와 물과 토양을 먹으며, 또 이를 먹고 자란 생물을 포식하며 지구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이미 오래 전에 자연스러운 삶을 상실하였다. 8천 미터 설산을 나는 새나 북극의 백곰까지도 환경오염으로 신음하고 있다. 살충제에 죽은 벌레를 새가 먹고 한 쪽 날개가 없는 새를 낳고 그 새를 잡아먹은 독수리가 고공을 날다가 갑자기 떨어져 죽듯, 중금속은 지구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의 몸에 조금씩 축적되고 있다.


소라 수컷을 암컷으로 변화시킨 농약 속의 환경 페르몬이 도시에까지 날아와 극히 미량으로도 도시 남자들의 정자 수를 감소시키고 여성화를 촉진시키고 폐암을 유발하는 것에서 보듯, 전 지구 차원의 환경오염은 소리는 나지 않지만 분명한 속도로 인류 공멸을 향하여 달려가는 완행열차다.


환경위기는 어느 지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가 이 모순 속에 던져진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이기에 사태의 심각성이 더하다. 이것은 중국의 먼지와 대기오염물질, 바이러스가 편서풍을 타고 한국으로 날아와 황사현상을 일으키고 산성비를 내리고 병을 퍼뜨리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까지 날아가는 데서 잘 알 수 있듯, 세계적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다. 대기오염이 산성비와 산성안개를 만들고 이것이 토양과 수질을 오염시키고 이로 산림이 파괴되고 동식물이 멸종한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산림파괴로 홍수와 가뭄이 일고 토양과 수질이 오염되며 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인간은 더 많은 문명의 이기들을 부려 대기를 더욱 오염시킨다. 이처럼 환경위기는 구조적이고 순환적이다. 자동차 배기가스가 한편으로는 대기를 오염시켜 호흡기 질환을 유발하고 이 속의 이산화탄소는 온실효과를 만들어 지구의 온난화를 강화하고 산화합물은 산성비를 만들어 토양과 수질을 오염시킨다. 이렇듯 환경위기는 하나의 동인이 여러 문제를 낳는, 복합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환경위기는 특수한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매일 매일 겪어야 하는 ‘일상’이며 절대 원상회복되지 않는 불가역적 성격을 갖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21세기의 대중들은 자연과 더불어 휴식을 취하고 생의 활력을 찾으며 느리고 여백이 많은 삶을 살며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환마저 거부당하고 있다. 특히 빈자들은 오염된 음식과 물과 공기를 먹고 마시며 오염된 환경에 내던져져 노동을 하고 생을 연명해야 하는 고통을 덤으로 안고 있다.


2. 빈자 및 소수자의 해방 및 평등을 위한 대안의 패러다임


1) 이항대립의 폭력적 서열제도에서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상생으로


서양의 형이상학은 세계를 실체론에 따라 대상을 독립된 존재로 규정하고 이를 다시 이데아와 그림자, 이성과 감성, 정신과 육체 등 이분법에 따라 둘로 나누었다. 여기서 양자는 평화적인 공존을 하거나 서로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각각 독립되고 대립적인 실체로서 전자가 후자에 대하여 압도적인 우위를 갖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예를 들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보면, 이들은 인간과 자연을 각각 독립된 실체로 간주하고 양자 가운데 인간에게 우월권을 주는 것을 정당화한다. 이 패러다임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을 마음대로 착취하고 개발할 권리를 갖는다. 이 권리에 따라 현대인은 자연을 인간의 목적에 맞게 변형 생성하였고 이것을 문명이라 불렀다.


홍수를 막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댐을 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물이 흐르는 대로 물길을 터주는 것이다. 서양은 인간과 자연을 이항대립으로 나누고 인간에게 우월권을 주었기에 전자의 방식을 택하였다. 댐을 쌓듯 인간 주체가 자연에 도전하여 자연을 개발하고 착취하는 것을 현대화로 간주하였고 이것으로 그들은 17세기 이후 전 세계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댐은 물의 흐름을 방해하여 물을 썩게 하고 결국 거기에 깃들어 사는 수많은 생물을 죽이고 심지어는 주변의 기후를 변화시키고 지진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중심주의, 이항대립주의와 실체론에 바탕을 둔 현대의 기획은 인류가 멀지 않은 시기에 공멸할지도 모를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를 야기하였다.


반면에 원효(元曉)의 불일불이(不一不二)론은 이와는 다른 길을 제시한다. 씨는 스스로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으나 열매와의 ‘차이’를 통하여 의미를 갖는다. 씨와 열매는 별개의 사물이므로 하나가 아니다〔不一〕. 사과 씨에서는 사과를 맺고 배 씨에서는 배가 나오듯, 씨의 유전자가 열매의 거의 모든 성질을 결정하고 열매는 또 자신의 유전자를 씨에 남기니 양자가 둘도 아니다〔不二〕. 씨는 열매 없이 존재하지 못하므로 공(空)하고 열매 또한 씨 없이 존재하지 못하므로 이 또한 공하다.


그러나 씨가 죽어 싹이 돋고 줄기가 나고 가지가 자라 꽃이 피면 열매를 맺고, 열매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지만 땅에 떨어져 썩으면 씨를 낸다. 씨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면 씨는 썩어 없어지지만 씨가 자신을 공하다고 하여 자신을 흙에 던지면 그것은 싹과 잎과 열매로 변한다. 공(空)이 생멸변화(生滅變化)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세계는 홀로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지만 자신을 공하다고 하여 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신라 진성여왕(887년~896년) 때 함양의 태수로 부임한 최치원은 홍수라는 문제와 마주쳤다. 화쟁 사상을 추구한 최치원은 홍수를 막기 위하여 댐을 쌓는 대신 물길을 트고 숲을 조성하는 대안을 택하였다. 지금도 지리산 자락의 함양에 가면 폭 2~3백 미터에 길이가 2킬로미터에 달하는 상림이란 무성한 숲이 있다. 씨와 열매의 관계처럼, 물은 나무의 양분이 되고 나무는 물을 품어 주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위천은 천여 년 동안 홍수를 막으면서도 물을 맑게 유지할 수 있었다.


이처럼 불일불이는 우열이 아니라 차이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고, 투쟁과 모순이 아니라 자신을 소멸시켜 타자를 이루게 하는 상생의 사유체계이다. 서구의 이항대립의 철학이 댐을 쌓아 물과 생명을 죽이는 원리를 이룬다면, 화쟁의 불일불이는 그 댐을 부수고 물이 흐르는 대로 흐르며 물은 사람을 살게 하고 사람은 물을 흐르게 하는 원리이다. 가정이지만, 이런 패러다임으로 현대화와 산업혁명이 진행되었다면 상림처럼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산업발전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2) 동일성의 사유에서 차이와 눈부처-주체성으로


동일성이 형성되는 순간 세계는 동일성의 영토로 들어온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나뉜다. 동일성은 자기 바깥의 것들을 모두 타자로 간주하고 이를 자신과 구분하고 대립시키면서 동일성을 강화한다. 이를 통해 동일성은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의 담론을 형성하며, ‘차이’를 포섭하여 이를 없애거나 없는 것처럼 꾸민다.


20세기가 전쟁과 대학살의 시대가 된 근저에는 동일성의 패러다임이 존재한다. 나치즘의 유대인 대학살과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 스탈린주의와 수용소군도, 미군의 밀라이 대학살, 유고의 인종청소 모두 “너는 우리편이 아니다.”라는 배제의 소산이다.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불 속에 던지는 모습만 보면 일본 군인은 악마의 화신이다. 하지만 그들도 우리처럼 선량한 청년이었다. 다만, “저들은 우리 편이 아니야. 저들을 쓸어버려야 우리가 영광의 대일본제국을 건설할 수 있어.”라는 식의 배제의 담론이 그들을 그렇게 악마로 바꾸어버렸던 것이다.


데리다는 동일성에 바탕을 둔 서양철학 전반을 해체한다. 사물의 의미는 그 실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다른 사물의 차이 사이에 있다. “자의성(arbitrariness)은 기호 체계의 충만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요소들 사이의 차이에 의하여 구성될 때만 일어나는 것이다.” ‘나무’가 ‘풀’과의 차이를 통하여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의 의미를 갖는 것처럼, 의미작용은 기호의 충만한 본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호와의 차이, 구조 속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우리가 동일하다고 믿은 것은 차이 속의 타자이며, 타자 속의 차이에 불과하다.


들뢰즈는 이를 더 심오하게 발전시킨다. 개념 안의 동일성, 술어 안의 대립, 판단 안의 유비, 지각 안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한 개념적 차이는 결국 동일성으로 환원한다. 때문에 그는 어떤 방식으로도 동일성으로 귀환하지 않는 ‘차이 그 자체’에 주목한다. “차이 자체는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차이로 감성과 초월적 경험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 사실 반성적 개념 안에서 매개하고 매개되는 차이는 지극히 당연하게 개념의 동일성, 술어들의 대립, 판단의 유비, 지각의 유사성에 복종한다. 차이는 파국을 언명하는 상태로까지 진전되어서만 반성적이기를 멈출 수 있으며 효과적으로 실제의 개념을 되찾는다.”


원효는 “같다는 것은 다름에서 같음을 분별한 것이요, 다르다는 것은 같음에서 다름을 밝힌 것이다. 같음에서 다름을 밝힌다 하지만 그것은 같음을 나누어 다름을 만드는 것이 아니요, 다름에서 같음을 분별한다 하지만 그것은 다름을 녹여 없애고 같음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라며 변동어이(辨同於異)의 논리로 차이의 철학을 논한다. 원효의 말대로 동일성이란 것은 타자성에서 동일성을 갖는 것을 분별한 것이요, 타자성이란 것은 동일성에서 다름을 밝힌 것이다.


동일성은 타자를 파괴하고 자신을 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동일성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타자성은 동일성을 해체하여 이룬 것이 아니기에 이를 타자라고 말할 수 없다. 주(主)와 객(客), 현상과 본질은 세계의 다른 두 측면이 아니라 본래 하나이며 차이와 관계를 통하여 드러난다. 주체에는 이미 타자가 들어와 있고 타자엔 주체가 스며 있다. 화쟁은 주와 객, 주체와 타자를 대립시키지도 분별시키지도 않는다. 양자를 융합하되 하나로 만들지도 않는다.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중간도 아니다. 주와 객, 주체와 타자가 서로를 비춰주어 서로를 드러내므로 스스로의 본질은 없고 다른 것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것과 차이를 갖기에 진리다.


똑바로 상대방의 눈동자를 바라보면 상대방의 눈동자 안에서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한국어로 ‘눈부처’라 한다. 내 모습 속에 숨어있는 부처, 곧 타자와 자연, 약자들을 사랑하고 포용하고 희생하면서 그들과 공존하려는 마음이 상대방의 눈동자를 거울로 삼아 비추어진 것이다. 그 눈부처를 바라보는 순간 상대방과 나의 구분이 사라진다. 상대방을 살해하려 간 자라 할지라도 눈부처를 발견하는 순간 상대방에게 폭력을 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변동어이의 차이, 곧 역동적이고 생성하는 차이는 개념적인 차이와 다르다. 한 이스라엘인이 자신과 다른 팔레스타인의 문화를 인정하고 그들을 차별하지 않고 유대인과 똑같이 관용으로 대하는 것은 개념적 차이를 인식한 데서 오는 것이다. 하지만 연극 <Plonter>의 배우와 스태프들은 개념적 차이에 바탕을 둔 관용이 얼마나 허술하고 관념적인지 절감하였다.


이 연극은 자살폭탄 테러로 남편을 잃은 이스라엘 여인과 이스라엘 군인의 총에 아들을 잃은 팔레스타인 여인을 중심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과 화해를 다룬 것이다. 이 연극에서 5명의 이스라엘인 배우가 팔레스타인 역을, 4명의 팔레스타인 배우가 이스라엘인 역을 연기하였다. 이제까지 상대방을 관용으로 대했던 그들도 서로 역할을 바꾸어 연기를 하면서 처음엔 서로 소리를 지르고 울부짖으며 싸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들은 7개월의 공동 작업을 통해 내 안의 타자, 상대방의 눈부처를 발견하고서 서로를 진정 이해하고 포용하게 되었고 결국 연극을 완성하였다. 바로 이들 배우는 감성과 몸을 통해 내적 차이를 깨달은 것이다.


이처럼 변동어이의 차이는 두 사상(事象)이 서로 차이를 긍정하고 상대방을 수용하고 섞이면서 생성된다. 차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다른 것을 만나서 그것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킨다. 나와 타자 사이의 진정한 차이와 내 안의 타자를 발견하고서 자신의 동일성을 버리고 타자 안에서 눈부처를 발견하고서 내가 타자가 되는 것이 변동어이의 차이다. 변동어이의 차이의 사유로 바라보면, 이것과 저것의 구분이 무너지며 그 사이에 내재하는 권력,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의 담론은 서서히 힘을 상실한다.


변동어이의 차이의 패러다임, 즉 눈부처의 주체성으로 전화하면, 동일성의 이름으로 미국이 이슬람 국가나 후진국의 국민을, 부자가 가난한 자를, 한국인이 제3세계 노동자들을 차별하고 폭력을 가하던 것에서 벗어나 그들과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 그의 눈에서 부처를 발견하여 그를 부처로 삼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 또한 부처가 되는 사유다.


3) 실체론에서 관계의 사유를 통한 욕망의 자발적 절제로


단독자로서 나는 욕망을 증대하는 것이 나를 확대하는 길이다. 인간은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다. 조금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하여, 자신의 결핍을 채워 만족한 상태에 이르기 위하여, 자신의 존재 확대를 위하여 타자를 침해하고 약탈하고 폭력을 가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그럼에도 세상이 지옥으로 전락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의상은 “대연기다라니법에는 만약 하나가 없으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하나라고 말하는 것은 자성(自性)이 하나가 아니요 연(緣)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인 것과 같이 열이라고 한 것은 자성이 열이 아니라 연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열이다. 모든 연생법(緣生法)은 어느 한 법도 일정한 상(相)으로서 성(性)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타자들과 뭇 생명체들과 관련을 맺고 있다. 예를 들어, 수억 원에 이르는 환경비용을 지출하지 않고 비오는 날 폐수를 몰래 버리는 것이 자기 회사의 이익이라고 생각한 자본가가 있다고 치자. 그가 어느 날 윤리적이거나 종교적인 생각에서 이를 악으로 규정하고 중지할 수 있다. 그러나 선악의 문제나 판단과 관계없이, 그가 어느 날 자신이 버린 폐수를 먹고 자란 물고기를 자신이나 자신의 자식이 식용하면 병에 걸림은 물론 기형아도 낳을 수 있음을 자각하게 되면 폐수를 더 이상 버리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지혜란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원인과 결과로 맺어지고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므로 아(我)란 없으며 공(空)임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홀로 존재하는 존재자가 아니다. 인연의 사슬이 깊어 수백억 년 가운데 찰나의 순간이라 할 한평생에, 수조 개의 별 가운데 하나인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조상이 물려준 유전자, 어머니와 아버지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보살핌이 원인이 되어 나는 태어나고 길러졌다. 타인이 없었다면 나는 없다.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나와 관계를 맺는다. 가까이 주변의 사람, 내 얼굴에 비치는 햇살, 코를 드나드는 맑은 공기와 볼을 스치는 바람에서 멀리 한 점으로 빛나는 별들과 그 사이로 떠다니는 우주 먼지에 이르기까지 전 우주가 오늘 나라는 존재를 나로 존재하게 하는 데 관여한다.


연기를 깨닫고 나면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뿐만 아니라 모든 타자들,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 우주의 구성 성분들 모두가 ‘우리’의 범주에 들어온다. 길거리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두 사람이 제3자로부터 실은 두 사람이 형제라는 소리를 들으면 싸움을 중지하고 포옹할 것이다. 이처럼 연기는 각 존재자를 ‘우리’의 범주에 속하게 한다. 이때 우리는 각 존재자들이 서로 소통하고 상호작용을 하면서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독립투사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희생하는 것에서 보듯, 각 존재자는 우리의 범주에 들어온 타자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한다. 이처럼 연기에 대한 대승적 깨달음은 ‘욕망의 자발적 절제’를 낳는다.


라캉은 인정의 변증법을 이야기한다. 그의 표현대로 “무의식은 우리들 사이에 존재한다.” 한 남자가 자신을 유혹하는 미인을 거부하는 것은 그럼으로써 얻을 수 있는 보상, 곧 타인으로부터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기 위해서다. 이처럼 인간은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 또한 강하다. 사르트르가 설명한 대로, 인간은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는 존재이기에 나의 실존은 타자의 실존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물론 진정 깨달은 자는 욕망을 완전히 소멸시키고 해탈을 이룬 자다. 하지만, 아직 이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한 속인이 취할 바는 나의 욕망이 타인의 욕망을 점함을 인식하고 타인을 위하여, 혹은 나라는 주체가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하여 나의 욕망을 유보하고 절제하는 삶의 자세이다. 그러기에 욕망의 이론은 연기론과 만나면서 자비행과 욕망의 자발적 절제라는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는 지평을 펼친다.


이제 인류가 사는 길은 단 한 가지 선택밖에 남지 않았다. 더 이상 욕망을 확대한다면 지구사회는 멸망을 맞는다. 욕망을 수용할 여분이 지구에는 더 이상 없다. 전화 다이얼에 빈 번호가 있어야 수억 개의 번호 조합을 만들 수 있고, 예전엔 폐수의 양과 강물이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양 사이에 격차가 있어 폐수를 버리더라도 늘 강물이 맑게 유지된 것에서 보듯, 무위(無爲)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빈틈〔虛〕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지구촌 사회는 그 빈틈이 사라졌다.


이제 욕망을 확대하는 것보다 자발적으로 절제하는 데서 행복을 더 느끼는 것으로, 나만의 깨달음이 아니라 과잉억압 당하고 있는 중생들의 고통을 덜기 위하여 그들의 자유의지, 선한 욕망, 깨달음의 지향성 등을 억압하는 것들에 저항하여 그들을 자유롭게 하고 그를 통하여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삶의 방식을, 패러다임을, 사회체제와 제도를 전적으로 전환하여야 한다.


4) 소유에서 존재로, 다시 생성으로


소유의 삶은 타자의 소유를 빼앗아 내 소유를 확대하려는 것이기에 필연적으로 타자에 대한 폭력을 낳는다. 반면에 존재의 삶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실존을 모색하며 완성을 지향하는 것이기에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을 낳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행위의 본질은 완성이다. 완성이란 어떤 것을 본질의 충만함으로 전개하고 이끄는 것, 곧 산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진실로 완성될 수 있는 것은 ‘이미 있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모든 것에 앞서 참으로 있는 것은 존재다.”라고 말한다. 인간은 완전하지 못하지만 완전에 이르기 위하여 고통을 감수하고 실존을 행하는 존재이다. 인간 행위의 본질은 완성에 이르려는 것이다.


완성이란 밖에서 구해지는 것이 아니다. 완성은 존재가 자신을 본질의 충만함으로 전개하고 이끄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완성의 싹은 존재 그 자체의 본질 안에 이미 존재한다. 사유는 인간 존재가 자신의 본질과 관련을 맺도록 이끌고 전개한다. 사유는 존재에 의한 존재를 위한 참여(l�ngagement par l�Etre pour l�Etre)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거기에 있는 존재”인 “현존재(Dasein)”이다. 현존재는 생활세계 속에서 본래의 자기를 상실하고 일상인(das man)으로 전락한다. 주체성을 상실한 일상인은 불안의 정황에 놓이게 된다.


죽음은 현존재가 피할 수 없는 가능성이며, 현존재의 본질은 죽음으로 가는 존재(Sein zum Tode)인 것이다. 극단적인 비유이긴 하지만 죽음으로부터 인간은 언제인가 종말이 온다는 시간에 대한 인식, 유한성의 인식을 하게 되며 이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니 현존재는 시간과 죽음에 직면하여 자기의 본래성을 되찾는다. 이것이 바로 실존(Existenz)이다.


하지만 존재의 삶 또한 동일성에 갇힐 수 있다. 존재자의 눈으로 보면 모든 존재들은 그 자체의 세계성을 담고 있으면서 제각기 존재한다. 하지만 존재론적으로 성찰하면, 모든 존재들은 다른 존재들과 무한한 관계 속에 있다. 현존재는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이자 공동현존재(Dasein-with)이다.


이에 대해 의상은 “하나 안에 일체 있고 일체 안에 하나 있으니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일세. 한 티끌 그 가운데 시방세계 머금었고 일체의 티끌 속도 또한 역시 그러해라.”라고 말한다. 우주 삼라만상 일체가 인다라망 구슬 속에 담겨 있다. 우주 전체의 구조는 한 원자의 구조와 유사성을 갖는다. 우주와 자연의 질서, 혹은 기의 흐름이 바뀌면 지구상의 온 생명체의 몸과 세포가 변화한다. 꽃 한 송이에서 우주의 진리를 깨닫는다. 이처럼 전체가 곧 하나이다.


미국인들도 바이오스피어 2(Bio-sphere Ⅱ) 프로젝트를 통하여 미생물이 지구 전체 대기의 균형에 관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 앞에 떠다니는 미세한 먼지보다 작은 박테리아 한 마리도 다른 모든 생명의 조화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몸은 10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의 세포는 신체의 일부분이 아니다. 이 가운데 하나인 체세포를 떼어내 복제하면 이 체세포가 그 사람에 관련된 거의 모든 유전자 정보를 담고 있어 그 사람 전체를 형성하는 복제인간이 만들어진다. 이 예에서 보듯 하나는 전체의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포함하고 전체와 유기적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이다.


한 인간은 자연의 온 생명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새싹이 하나 돋는 데도 온 우주가 관여한다. 서양의 실체론으로 보면 딱정벌레 한 마리가 인간의 발에 밟혀 생명이 끊어지면 그것은 죽은 것이다. 하지만 개미가 그 몸뚱이와 더듬이와 다리를 해체해선 가져가 여왕개미를 먹이면 여왕개미는 쑥쑥 개미 알을 낳고 남은 껍질에도 수억 마리의 미생물이 어디에선가 와 생명의 하모니를 펼친다. 그러니 화엄연기론의 사유로 보면, 딱정벌레는 죽은 것이 아니라 개미와 미생물로 변한 것이다. 조그만 개미 한 마리가 죽고 새로운 유충이 태어나는 것도 우주 전체의 목적과 섭리에 따라 일어나는 전체 속의 부분, 그러나 전체를 담고 있고 전체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부분이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으로 보면 생성이 존재를 빚어내기에 자연은 끊임없이 자신을 새로이 창조해 가는 과정이다. 한 마리의 벌레가 기어가는 데도 중력이 작용하듯이 우주의 섭리는 자연의 모든 생명체에 두루 깃들여 있다. 그의 지적대로 “세계는 그 자신의 활동성과 다양성을 상실해 가는, 꾸준히 하향하는 유한한 체계의 장관을 우리에게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 자연에는 물리적 해체의 측면에 역행하는 어떤 상향의 기운이 있다.” 자연은 자기 스스로를 조직하는 거대한 생태계(ecosystem)이며 지금도 새롭게 갱신되고 있다. 호랑이와 같은 맹수에서 바이러스에 이르기까지 온 생명들이 고정되고 고립된 것이 아니라 우주의 목적에 따라 서로 소통하고 의존하고 서로를 보완하는 가운데 자신을 창조하고 초월하면서 보다 나은 수준으로 진화해 가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서로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세계 속에서 하나 하나의 주체는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초월체로서 창조적으로 전진한다. 유기체 철학에서 영속하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형상’이다. “형상은 변화하는 관계를 감수한다. 현실적 존재는 주체적으로 끊임없이 소멸하지만 객체적으로 불멸한다. 현실태는 소멸될 때 주체적 직접성을 상실하는 반면 객체성을 획득한다.”(화이트헤드) 이처럼 생성의 사유는 부자와 빈자, 다수자와 소수자, 인간과 자연이 서로 어울려 하나가 되고 그들 모두를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평등하게 바라보는 사유다.


5) A or not-A의 이분법에서 순이불순(順而不順: A and-not-A)의 역설과 퍼지의 사유로


서양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A or not-A’의 논리를 추구하였다. A가 아니면 나머지는 A가 아닌 것이어야 한다. 동일한 사물이 동일한 사물과 동시에 동일한 점에 속하면서 또한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즉 A이면서 A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이분법적 모순율이다. 서구의 거의 모든 철학과 예술은 이분법적 모순율을 인정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이데아는 이데아이고 그림자는 그림자였고 주체는 주체요 대상은 대상이었지, 이데아인 동시에 그림자요 주체인 동시에 대상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 또한 이에 따라 이분법적 사고를 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를 해체해버리며, 퍼지공학자들은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데리다는 파르마콘(pharmakon)이 독인 동시에 약이듯이 양자는 이분법을 넘어서며 서로 상호보충(suppl?ent)의 관계를 갖는다고 본다. 퍼지공학자들에 의할 때 실제 세계는 ‘A and not-A’이다. 통상 밝으면 낮, 어두우면 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낮은 12시에서 0.00001초도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는 찰나에 스쳐간다.


정오에서 0.001초라도 지났으면 벌써 그만큼 밤이 진행된 것이며, 반대로 0.001초라도 모자랐다면 그만큼 낮이 덜 진행된 것이다. 밤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느 것을 분별하여 둘로 나누는 것은 두 극단을 취할 때나 가능한 것이다. 하루의 언제든 그 시간은 낮인 동시에 밤이다. 진리는 어느 한 편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이에’ 존재한다. 그러기에 진리는 퍼지이자 역설이며 상호보충(suppl?ent)의 관계를 갖는다.


원효는 ‘만일 각기 다른 견해로 쟁론이 일어날 때’란, “유(有)라는 견해에 동조하여 설법하면 공(空)이라는 견해와는 맞서며, 만일 공(空)이라는 집착에 동조하여 설법하면 이것은 유(有)라는 집착에 맞서는 것이니, 동조건 반대건 더욱 다툼만 조장하게 되는 것이다. 또 저 두 견해에 다 동조하면 그 안에서 스스로 모순을 일으켜 다투게 될 것이요, 만일 저 두 견해에 다 반대하면 그 두 견해와 다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동조도 말고 반대도 말고 설법하라는 것이다.”라며 순이불순(順而不順)의 논리를 편다.


이원론적 사고는 이것은 진리요 저것은 허위라 구분한다. 그러나 절대 진리도, 절대 허위도 없다. 정도의 문제이지 흑백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니 그것을 100% 진리라 하면 그것에 담긴 허위를 보지 못한다. 반대로 1%도 안 되는 허위를 근거로 전체를 진리가 아니라 하면 99%의 진리를 버리게 된다. 모든 사람이 허위라 하는 것에도 일말의 진리가 담겨 있고 모두가 진리라고 하는 것에도 한 자락의 허위를 담고 있다.


그런데 각기 다른 견해로 맞설 때, 한 의견이 진리라는 이유로 이에 전적으로 동조하면 반대되는 의견에 담겨 있는 진리를 잃게 된다. 또 한 의견이 허위라는 이유로 이에 전적으로 반대하면 반대되는 의견에 담겨 있는 허위를 보지 못하게 된다. 또 두 견해를 모두 옳다고 하면 두 견해가 스스로 모순을 일으켜 다투며 두 견해에 있는 허위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된다. 반대로 두 견해가 모두 그르다고 하면 그 두 견해와 다투게 됨은 물론 두 견해에 담겨 있는 진리를 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올바로 진리를 전달하는 방법은 동조도 하지 않고 반대도 하지 않는 것이다. 전적으로 동조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에 담겨 있는 허위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고, 반대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에 담겨 있는 진리를 잃지도 않는다. 반대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에 담긴 근본 취지와 목적을 어기는 것이 아니고 동조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의 허위를 솎아내고 그에 담긴 도리를 제대로 받아들여 견해의 근본 뜻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순이불순(順而不順)의 논법은 진정한 진리에 이르는 방편인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빈자든 부자든, 어느 사람을 무조건 선하다고 하면 그의 악을 보지 못하며, 무조건 악하다고 하면 그의 마음속에 있는 선을 보지 못한다. 지극히 선한 자에게도 악이 있고 지극히 악한 자에게도 선이 있다. 어느 상황에서는 선이 다른 맥락에서는 악일 수 있다. 재현의 시대에서 개인은 단일한 동일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정체성을 갖고 자신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다양한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있다. 이를 선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할 수 없다. 인간 존재는 선한 동시에 악하다. 인간의 행위는 선과 악 그 사이에 위치한다. 선이라며 칭찬하고 악이라 규정하여 징계하는 것이 모두 그릇된 것이다. 우리는 ‘그 사이’를 보아야 한다.


3. 빈자와 소수자를 위한 희망의 인문학의 길


1) 개인적 차원; 빈자들의 눈부처-주체성 확립과 욕망의 자발적 절제


재현의 위기 시대에 소수자와 빈자들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사회적이다. 이를 무시하고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면 문제가 해결될 길이 없다. 하지만 사회적이라 해서 개인이 극복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은 눈부처―주체성의 확립이다. 빈자들 중 상당수는 주체를 상실하였다. 주체란 자기 앞의 세계를 인식하고 판단하고 해석하며 변화시키는 중심이다. 그들은 매스미디어와 인터넷이 만드는 허상에 조작되어 찰나적이고 향락적인 욕망을 좇아 부나방처럼 삶을 소모하며 과잉소비를 하면서도 늘 삶은 불만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인식한다 하더라도 국가와 자본의 억압과 통제를 내면화하여 늘 주눅이 들어 있기에 현실을 변화시킬 엄두조차 내지 않는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주체를 확립하여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 현실 속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이에 대해 저항하여 자신의 삶과 주변의 세계를 변혁시킬 수 있는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


하지만, 이 주체가 동일성을 형성하여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때문에 산업사회와 엄연히 다른 재현의 위기 시대에 필요한 것은 상호 공존공영할 수 있는 눈부처―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타인을 부처로 만들 때 내가 부처가 된다. 눈부처―주체성은 먼저 내 앞의 타자를 주체로 거듭나게 하여 나 또한 주체성을 형성하는 것이며, 너와 내가 만나 서로가 밀접한 관련 속에 있음을 깨닫고 ‘우리’를 형성하여 나의 주체성을 세우면서도 그것이 타자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이자 서로가 서로를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행복하게 하려 노력하는 주체성이다. 상대방과 나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하나가 되는 주체성이자, 상대방에게서 자연과 공존하고 빈자들을 포용하고 사랑하려는 마음의 씨앗을 발견하여 키우고 그를 통하여 나 또한 그런 마음을 가지고 그런 실천을 하는 것이다.


선정, 마인드 콘트롤 등 다양한 개인 수양법이 빈자가 평정심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지혜가 없는 선정은 말 그대로 공염불이다. 개인 개인 수양법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욕망과 인간의 삶의 본질에 대해 깨닫는 지혜다. 자끄 라깡이 지적한 대로, “욕망은 신기루이다.” 아무도 그에 이른 사람은 없다. 욕망의 대상을 향해 고단한 길을 가지만, 갈 때는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추구할 유일한 대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도달해 보면 그것이 아니다. 그에 이르고 나서야, 때로는 죽는 순간에서나 자신이 그토록 추구한 대상이 한갓 허상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 인간 삶의 속성이다.


욕망이란 나를 채우려는 것인데 욕망할수록 나에게서 멀어진다. 욕망은 만족인데 만족을 느끼는 순간 사라져버린다. 이것이 바로 욕망의 역설이다. 이런 역설을 자각하는 것, 나의 삶이 다른 타자들, 나아가 모든 생명들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를 위하여 나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는 것, 욕망을 과잉 억압하는 것에 저항하여 서로가 선한 욕망이 샘솟도록 하는 것―이것이 바로 눈부처의 주체성에서 비롯된 지혜와 실천이다. 결혼기념일이라고 사랑하는 사람과 샹들리에가 번쩍이는 특급 레스토랑에서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며 바다가재를 뜯어야만 두 사람이 행복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갈잎들이 살랑거리며 바람이 지나는 소리를 들려주는 동네 약수터에서 싸 간 김밥을 나누며 잎새 사이로 보이는 눈이 부시게 푸른 하늘마냥 청정한 마음을 서로 나누는 것에서 더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마셜 살린스가 말한 바와 같이, 빈곤은 재화의 양이 적은 데 있는 것이 아니며, 또 단순히 목적과 수단의 관계에서만 비롯되는 것도 아니다. 빈곤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인간의 관계다. 자연자원의 풍부함에 대해 원시인들이 지닌 신뢰의 토대가 되고 그들이 배고픔 상태에서도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해 주는 것은 결국 사회관계의 투명성과 상호성이다. 살린스에 의하면 오스트레일리아나 칼라하리 사막에 살고 있는 원시 유목민족은 절대적 ‘빈곤’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풍요로움을 알고 있다고 한다.


이 원시인들에게는 개인 소유물이 전혀 없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것에 집착하지 않고,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갈 때는 가졌던 것을 버린다. 다른 곳으로 쉽게 이동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자연, 토지, 또는 ‘노동’의 도구나 생산물 등을 누가 어떠한 형태로든 독점하여 교환을 방해하거나 희소성을 제도화하는 일이 없다.


인간의 역사에서 축적은 항상 권력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원시 사회에서 그런 축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원시 사회 같은 증여와 상징적 교환의 경제에서는 한정된 적은 양의 재화만으로도 모든 구성원들이 누릴 수 있는 부가 만들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재화들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끊임없이 이동하기 때문이다. 부는 재화를 바탕으로 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간의 구체적인 교환을 바탕으로 하여 생긴다. 교환을 하는 사람들의 수가 한정되어 있어도 각 교환의 순간마다 교환된 사물에 가치가 부가되고 교환의 순환은 끝이 없기 때문에, 부는 무한하다. 구체적이고 관계적인 이런 변증법은, 문명화되고 산업화된 우리 사회를 특징짓는 경쟁 및 차별화 속에서 무한한 욕구와 결핍의 변증법으로 역전되어 있다. 원시 사회에서의 교환의 경우, 모든 관계는 사회의 부를 증가시킨다.


위의 예처럼, 욕망의 본질을 깨닫고 더 많이 소유하는 것보다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는 데서 더 행복을 느끼는 삶으로, 과잉소비를 하는 삶에서 부를 축적하지 않고 끊임없이 교환하여 모두가 풍요로운 삶으로 전환하여야 한다. 이런 패러다임과 시스템 아래서 타자를 섬기고 서로가 서로를 좀 더 자유롭고 인간다우며 행복하게 살게 하려고 노력하고 부를 끊임없이 나누고 교환하는 삶을 살 때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소수자와 빈자의 구원과 깨달음에 대한 동서양의 대안들


빈자들의 고통스러운 삶에 구원과 깨달음의 길이란 무엇인가. 기독교를 믿는 이들은 빈자가 놓인 현실이 비구원적 상황 속에 있기에 구원은 현실 밖에서 온다고 본다. 칼 바르트 등은 인간의 한계로 발생한 비구원적 현실을 인간의 내재된 힘으로 극복한다는 것이 논리적 모순이므로 인간 밖에 있고 우주 밖에 있는 하나님을 통해서만 구원이 올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무한한 초월적 존재가 제한된 인간 안에 들어오려면 인간 또한 그런 초월자와 교감하고 안에 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고 전제해야 한다. 그러니 구원은 ‘밖’이 아니라 인간의 깊고 깊은 ‘안’에서도 온다.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근거로 살아간다는 점에서 구원은 완성이자 하느님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에서 구원은 과정이다.”(이찬수)


하지만 속한 곳에서 속한 생을 영위하여야 하는 우리 인간의 삶은 영성으로만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마르틴 부버는 “태초에 관계가 있다.”라고 말한다. “구원은 근원적 관계성에 대한 통찰이다. 관계성이야말로 생명적 질서이며, 생명적 질서는 상호 관계성 속에서의 상생, 상관적 상생이다. 구원은 상관성 속에서 상생하는 생명적 질서의 온전한 회복이며, 그렇게 해서 나도 온전히 회복하는 것이다.”(이찬수) “전 인류를 하나의 전체적인 우리로 만드는 공동체를 향하여 발 벗고 나설 때까지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윌프레드 켄트웰 스미스)


원효는 진속불이(眞俗不二)론을 편다. “금을 녹여 금부처를 만들듯 진제를 녹여 속제를 만들며, 다시 금부처를 녹여 금덩이로 환원시키듯 속제를 녹여 진제로 만든다.” 중생의 입장에서 보아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은 대승철학의 요체이다. 그러니 중생이 곧 부처요, 중생의 마음은 부처의 마음으로 본래 청정하다. 그런데 청정한 하늘에 티끌이 끼어 그 하늘을 가리듯, 일체의 중생이 무명으로 인하여 미혹에 휩싸이고 망령된 마음〔妄心〕을 품어 진여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세계를 분별하여 보려 한다. 그러니 유리창의 먼지만 닦아내면 맑고 푸른 하늘이 드러나듯, 모든 사람의 미혹하고 망령된 마음만 닦아내면 그들 마음 속에 있는 부처가 저절로 드러난다.


깨달음과 해탈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 미천한 중생들이 연기와 무아를 깨달아 무명과 망심에서 벗어나 관행(觀行)으로서 끊임없이 수행 정진하면 누구나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한다.


하지만, 그리 마음 속 부처를 드러내는 것으로 완전히 해탈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이른 사람은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들을 이끌어야 비로소 깨달음이 완성될 수 있다. 저 아름다운 연꽃이 높은 언덕에 피지 않는 것과 같이 반야의 바다를 완전히 갖추었어도 열반의 성에 머무르지 않으며,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 무량한 겁 동안 온갖 번뇌를 버리지 않고 세간을 구제한 뒤에 열반을 얻는다. 이것이 진속일여(眞俗一如)이다. 속에서 진으로 나아가는 것이 상구보리(上求菩提), 즉 자리(自利)라면 진에서 속으로 나아가는 것은 하화중생(下化衆生), 즉 이타(利他)이다.


중생과 깨달은 자가 별개의 존재가 아니고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불각(不覺)과 각(覺)이 둘이 아니니, 먼저 깨달은 자는 항상 큰 자비로서 중생들의 고통을 없애주며 생사의 바다에 빠져 있는 중생들의 의혹(疑惑)을 제거하고 사집(邪執)을 버리게 하여 중생들이 열반의 언덕으로 나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그럴 때 그 또한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어떤 계기를 통하여 온갖 경험과 기억과 의식을 찰나적으로 재배열하는 것이자 존재의 거듭남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깨달음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가 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이고 그를 위하여 그리로 가 그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 바로 봉사이다. 깨달음이란, 온 세상의 타자들이 나와 깊게 연관을 맺고 있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대하여 전혀 다른 차원으로 새롭게 깨달아 거듭난 존재가 세상과 자연과 뭇 생명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인식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기 위하여 자신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며 제도와 자본, 미디어 등 선한 욕망과 자유의지, 깨달음의 지향성 등을 억압하거나 왜곡하는 것에 대해서는 저항하여 선한 욕망이 그들 마음과 몸 속에서 꽃을 피우게 하여 그들을 예수나 부처와 같은 존재로 거듭나게 하고 그로 인해 내가 예수나 부처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깨달음이다.


테레사 수녀도 “우리는 불의가 정의를 이길 때, 선한 자들이 고통을 받을 때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의 모습으로 내려오셨는데 우리가 보지 못할 뿐입니다.”라고 말한다. 진정 사랑하는 이는 상대방에게서 신을 발견한다. 그 신을 발견하는 순간 그 또한 신이 된다.


3)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에서 생태적 삶으로


인류를 금세기 안에 공멸로 몰아넣을지도 모르는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에 대하여 환경주의자들은 청정기술을 통하여 통제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유조선이 유출한 기름을 제거하기 위하여 화학약품인 유분산 처리제를 뿌리면 그것이 다시 바다를 오염시킨다. 이 예에서 보듯 환경주의적 대안들은 기계적 세계관과 인간중심주의를 바탕으로 하였기에 근시안적이고 미봉책이며 국부적이다.


이를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를 추구하는 이들은 인간중심주의와 기계적 세계관에 대항하여 생태적 삶과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들은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아우르는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세계관 속에서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을 통하여 인간과 모든 생태계의 조화를 추구한다.


생태주의자들은 이 점을 공유하고 있으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기존의 생태론과 다른 대안을 내세운다. 에코페미니즘에서 보면 여성과 자연은 동격이다. 남성들에게 자연과 여성은 똑같이 착취와 개발의 대상이었다. 인간중심주의와 이성중심주의는 인간의 자연 정복에 기반을 둔 남근중심주의적인 사고방식의 산물이다.


남성중심주의는 가부장적인 제도 속에서 내재화하여 이성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를 내세우며 근대 과학의 이름으로 자연과 여성에 대한 지배와 폭력을 정당화하면서 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여기서 여성과 자연은 남성, 힘을 가지고 부리려는 자가 한껏 소비하는 상품이며 마구 폭력을 휘두르고 배제를 하여도 무방한 타자이다. 그러니 가부장주의의 자연 파괴에 맞서서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며 이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여성성에 바탕을 둔 대안이 자연과 생명을 보호하리라 본다.


1973년에 노르웨이의 철학자 아르네 네스는 기존의 생태이론을 ‘표층생태론(shallow ecology)’이라며 ‘심층생태론(deep ecology)’을 주장하였다. 표층생태론은 인간과 자연을 대립적으로 파악하여 자연 그 자체를 위하여 자연을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유용한 이익이 있을 것이라는 면에서 보존하기에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심층생태론은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생태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자기를 실현할, 즉 생존하고, 번성하고, 자기 나름의 형태에 도달할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생명평등주의(biospherical egalitarianism)의 입장에서 생태계 전 구성원을 바라본다.


이들은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각각의 평등성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생명체끼리 공생의 원리를 추구한다. 불교의 《범망경》에서도 “육도 중생이 모두 나의 부모인데도 죽여서 먹는 자는 곧 나의 부모를 먹는 것이며 나의 옛 몸을 죽여서 먹는 것이니라. 모든 흙과 물은 나의 옛 몸뚱이요, 모든 불과 바람은 나의 본체이다.”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사회생태학자들은 심층생태론의 신비주의적이고 반과학적인 정신을 비판하는 동시에 이미 지배적인 사회를 비위계적인 협력사회로 전환시키려는 환상에서 출발한다고 비판한다. 머레이 북친은 “생물주의는 ‘인간성’을 ‘자연법’으로 영원히 축소시켜버림으로써 이 뒤에서 작업하고 있는 것이 추상적인 ‘인간’도 ‘사회’도 아닌 바로 자본주의란 사실을 얼버무리고 있다. 이러한 권위주의적인 사고방식은 때때로 다양한 영성에 대한 경건한 호소와 더불어 공존하고 있는데 이것은 부르조아적인 탐욕에서 등장한 무분별한 이기주의에 성인의 가면을 씌워놓고 있는 형상이다.”라고 비판한다.


사회생태론자들이 볼 때 환경위기의 근본 원인은 자본주의 체제에 있다. 이 사회는 진보를 협력보다는 경쟁과 동일시하고 사회를 정교화한 인간 관계의 영역이라기보다 사물들을 소유하는 영역으로 파악하며, 균형과 억제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에 기반하는 윤리를 창조한다. 인간사에서 최초로, 사회와 공동체는 거대한 쇼핑센터로 축소되었다. 그러니 자본주의 체제를 해체하거나 혁신을 가하여 확대재생산의 원리를 자연과 문명 간의 균형의 원리로 바꾸지 않으면 그 어느 것도 미봉책이다.


사회생태론은 구체성에 바탕을 둔 것이기에 현실성을 갖는다. 신비주의와 반과학주의를 지양하여 변증법적 이성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객관적 보편 타당성 또한 획득한다. 공동체 건설과 시민포럼, 인간적 필요에 따른 소비 개념 재정립 등 사회운동을 대안으로 내세우기에 힘을 가지며 영적인 인간 자아의 변화에도 초점을 맞추므로 영속성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실체론과 이분법을 벗어나지 못하여 미봉책이다.


이제 이분법을 넘어서서 모든 생명체가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할 때다. 앞 장에서 제시한 불일불이(不一不二)론은 차이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고, 투쟁과 모순이 아니라 자신을 소멸시켜 타자를 이루게 하는 생태론적 패러다임의 논리다. 서양의 생태론 또한 패러다임만큼은 이분법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서양의 이항대립의 철학이 댐을 쌓아 물과 생명을 죽이는 원리를 이룬다면, 화쟁의 불일불이는 함양의 상림처럼 숲을 조성하여 씨와 열매의 관계처럼 나무는 물을 품어주고 물은 나무의 양분이 되어 홍수를 막으면서도 물이 늘 맑게 유지되게 하는 원리이다.


하지만 중세 동양 철학에서 지혜를 얻자는 것이 전제왕권 사회나 농업사회로 퇴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를 ‘새로운 개념의 합리성’으로 보완하여야 한다. 최치원은 강을 따라 상림이란 활엽수림을 조성하여 위천의 홍수를 막으면서도 천여 년 동안 맑은 냇물이 되도록 하였다. 하지만 그가 부임한 그 해의 홍수는 어떻게 막을 것인가. 그는 숲을 조성하기 전에 둑을 쌓았다. 숲이 동양, 탈현대의 사유라면, 둑은 서양, 현대의 사유다. 하버마스는 이성의 도구화를 비판하면서도 이성의 긍정적 기능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계몽으로서 이성의 빛, 곧 소통적 합리성을 추구하였다. 동양과 서양, 현대성과 탈현대성을 아우른 곳에 인류의 미래를 보장할 답이 있다.


4) 빈자의 참살이(well-being)를 위한 이론과 방법


2006년 10월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세계 인구의 7분의 1인 8억 5천만 명, 많게는 65억 인구의 약 20%가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다. 기아 희생자는 2000년 이후 1,200만 명이나 더 늘었다. 동남아시아 인구의 18%, 아프리카는 35%, 중남미와 카브리해 지역은 약 14%가 굶주리고 있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200만 명 이상의 북한 주민이 굶어죽었고 수백만 명이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 신자유주의식 세계화 이후 빈곤층은 더욱 늘었다. 2007년 현재 인류 가운데 13억 명이 하루에 1달러도 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세계 10대 갑부들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최빈국 총수입의 1.5배를 넘는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매일 10만 명이 기아나 영양실조로 인한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이와 같은 절대 빈곤층에게는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대안이 우선되어야 한다. 세계 차원에서는 120억 명이 먹고도 남을 정도로 생산을 하면서도 가격 유지를 위해 농산물을 폐기하고 왜곡된 생산과 유통 시스템을 유지하고자 전쟁과 학살도 마다하지 않는 다국적 자본, 빈자의 착취와 억압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권력과 자본의 카르텔에 저항하는 사회운동, 비정부조직을 통한 빈자들의 세계적인 연대, 그리고 경제 시스템과 조세 시스템의 개혁, 복지책 등이 근본적 대안이다.


특히 한국의 빈자들에게는 의식주 가운데 주택 문제가 가장 큰 문제인데, 주택 관련 업무를 건교부에서 떼어내 복지부에 주어 복지 차원에서 관장하도록 하여야 한다. 이렇게 하여 성실한 빈자들은 누구나 돈 걱정 없이 자신의 보금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흔한 말대로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의식주의 해결만으로 빈자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남에게 주먹질이나 총질을 하는 것만이 폭력이 아니다. 구조적 폭력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여성, 장애인, 노인, 제3세계 노동자, 빈민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게 인간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 빈자들이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하고(생존욕구), 보다 나은 삶을 살려 하고(복지에 대한 욕구), 타인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려 하고(정체성에 대한 욕구),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자유에 대한 욕구) 욕구들에 대해 “피할 수 있는 모독”을 가하는 것이다.


자원을 불평등하게 분배하고 착취하는 것, 빈자의 자율성이나 자치권 확보를 저지하는 것, 빈자들을 서로 분열시키고 갈등하게 하는 것, 빈자를 사회에서 일탈시키고 소외시키는 것, 더 넓게는 강대국이 약소국을 종속의 관계로 놓고 수탈하는 것 등이 모두 구조적 폭력의 양상들이다. 그러기에 노르웨이의 평화학자 요한 갈퉁은 구조적 폭력을 “인간이 지금과 다른 상태로 될 수 있었던 잠재력과 현재 처해 있는 상태와의 차이를 제공하는 요인”으로 정의한다. 여성, 장애인, 노인, 제3세계 노동자, 빈민들이 남성, 비장애인, 청년, 선진국 국민들보다 열등하거나 성실하지 못해서 빈곤의 상황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구현할 교육으로부터 소외시키고 자신의 능력을 실현할 기회를 봉쇄하였고 권력과 자원, 정보와 지식을 독점하고 불평등하게 배분하였기 때문이다.


빈자들의 참살이를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스스로 주체적인 자각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자족감을 갖는 것이다. 열등감이나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모든 인간이 다같이 평등하고 귀중하며 자신도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는 소중한 구성원임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인간의 본질이 앞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실존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본질이 형성됨을 자각하여 스스로 부단한 자기개혁, 실천과 참여를 통하여 자신의 본질을 만들고 나아가 자신이 발을 디디고 있는 세계를 개조할 수 있는 주체임을 자각한다.


‘대듦’이 씨의 바탕이라는 함석헌의 말대로 그들 스스로 자신의 권한을 제한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것, 자원을 불평등하게 분배하고 착취하고 빈자의 자율성이나 자치권 확보를 저지하며 빈자들을 서로 분열시키고 갈등하게 하며 빈자를 사회에서 일탈시키고 소외시키는 구조와 세력에 대하여 인식하고 비판하고 저항할 수 있는 주체를 형성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하여 빈자 스스로 자신에 잠재하고 있는 능력을 발견하고 이를 구현하여 정체성을 형성하여 타인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자신이 놓인 상황과 세계를 개조하는 능동적 주체가 되도록 한다.


아울러 마음의 평안함과 평정심을 유지하도록,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타자에 대해 성내지 않는 삶의 자세, 욕망을 추구하는 것보다 욕망을 절제하는 데서 더 삶의 의미를 찾는 욕망의 자발적 절제를 통한 행복의 추구, 선정 등의 다양한 명상을 하는 것도 작은 대안들이다.


5) 폭력과 억압의 일상화·내면화와 눈부처-주체성

인간이 술값 몇 천 원만큼 가벼운 존재가 되면서 인간에 대한 폭력은 일상화, 구조화하였다. 더 강한 권력, 더 많은 자본, 더 깊은 향락, 더 높은 명예를 위해서 나 아닌 다른 인간을 죽이고 이용하는 것은 별스런 일이 아닌 것이 되었다.


소극적 평화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면 적극적 평화는 경제적 복지와 평등, 정의, 자연과 조화 등이 달성되어 인간의 기본적 욕구가 충족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거꾸로 이들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평화는 요원함을 뜻한다. 그러니 진정한 평화란 구조적 폭력이 제거된 상태이다.


재현의 시대에서 폭력의 과격함이나 비인간성보다 더 큰 문제는 내면화다. 중세 시대에 사람의 사지를 말에 묶은 채 말을 달리게 하여 찢어 죽이기도 하였고 사람의 코나 귀를 잘라 젓을 담그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특수한 몇몇에나 해당하는 것이었다. 폭력을 직접 목도할 수 있기에 폭력에 대해 혐오할 수 있었고 폭력을 휘두른 세력에 대해 증오심을 품을 수도, 그들에 저항할 수도 있었다. 오늘날 폭력은 자신의 모습을 숨겨버리고 내면화하고 구조화하여, 인류 사회 전체가 파놉티콘(panobticon)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두들 주눅이 들어 있고 폭력을 행하는 자가 누구인지 잘 모르며 설사 안다 해도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수천 캐럿의 다이아몬드라 할지라도, 아름다운 금강산 전체를 준다 할지라도 자기 목숨과 바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든 이들이 자기를 그리 소중히 여기니 다른 이들을 해하지 말라는 것이 아힘사의 정신이다. 겉으로 보면 소극적인 정신 같지만 간디의 비폭력주의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이겼듯 아힘사는 다른 이를 나처럼 사랑하여 보듬는 것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을 나처럼 소중하게 여길 때 (타자들에 대한) 폭력은 자연스레 사라진다.


동일성, 우열의 철학은 갈등과 대립을 낳으며 우열을 설정하는 순간 타자에 대한 폭력을 부른다. 하지만, 눈부처―주체성으로 타인을 바라보면, 타자에게서 자기를 발견하며 타자와 차이를 통하여 자기를 찾는다. 루이제 린저는 “진정한 사랑이란 내 방식을 그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의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눈부처―주체성은 나는 타자로 인하여 나이고 타자가 곧 나임을 자각하여 타자를 나처럼 보듬어주고 사랑하는 것, 나와 타자 사이에 평화스러운 공존을 모색하는 것이다.


6) 소외의 심화에서 참여와 연대로


소외는 이제 현대인의 대표적 병리현상이 되었다. 인간은 대상으로부터, 노동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었다. 현대인은 극심한 소외감에 몸부림을 치고 있다. 소외는 개인의 심리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소외감을 못 이겨 자신을 마약, 향락 등 자신을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려 해체하거나 타인에 대한 극도의 폭력으로 드러낸다. 때로는 소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전체주의적 권위에 의존하여 불안한 자유 대신 권력에 대한 복종을 택한다.


마르쿠제는, 물화와 소외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를 뒤엎지 않는 한, 이미 계몽의 힘을 상실하고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과학기술에 덜 조작당하고 산업사회와 대중문화의 도구적 합리화에 아직 덜 길들어져 1차원적 인간으로 전락하지 않은 국외자와 학생들이 혁명의 불길을 활활 타오르게 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미봉책이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6, 70년대에 프랑스를 필두로 하여 세계 곳곳에서 마르쿠제 등의 비판에 고무된 학생들이 일어났다. 고도 산업사회의 모순이 첨예화한 서양 사회는 물론 일본과 멕시코에서도 소외를 강화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와 억압을 강화하고 있는 기존체제의 모든 구조를 뒤엎고자 하였다.


68혁명은 막을 내렸으나 사회 전반에 대해 혁신을 가져왔다. 노동자를 억압하고 소외시키던 포디즘에 메스가 가해지고 노동자의 참여와 자치가 속속 보장되었다. 학교와 언론 등 사회 모든 부문에서 억압적이고 관료적인 양식이 무너지고 수평적이고 평등적이며 민주적인 소통양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억압된 성이 해방되고 여성의 지위가 상승되었다. 기존의 가치체계, 상상력을 뒤엎고 새로운 가치와 상상력을 펴나갔다. 이는 페미니즘, 녹색운동, 노동자의 자치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문화운동만으로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없다. 청년들의 낭만적인 운동은 자본가에 저항하는 노동운동으로 전화하지 못하였다. 청년 학생들의 급진적인 부정의 상상력은 계급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결국 이에 대한 반혁명이라 할 신자유주의가 나타나 68혁명이 이루었던 성과들을 집어삼키며 전 세계에 걸쳐 억압과 소외를 더욱 심화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휩쓸고 지나가면서 중산층은 해체되고 세계의 가난한 나라, 가난한 백성은 더욱 가난해졌다. 한 켠에서는 산해진미를 가득 쌓아놓고 그 가운데 1/10도 채 먹지 않은 채 쓰레기로 버리는데 다른 켠에서는 밥 한 숟가락만 먹어도 살릴 수 있는 어린이들이 1년에도 4백만 명 이상씩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다 죽어가고 있다.


서양 속담에 “여섯 다리를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방송국의 한 드라마 PD와 친한 선후배 관계이니 두 다리만 건너면 그가 연출한 드라마의 탤런트들과 만나 식사할 수 있다. 한 사람이 대략 3,000명의 사람을 소개받고 300여 명과 가깝게 지낸다고 한다. 그러니 한 다리를 건너면 나는 300명을 알고 있으며, 여기서 한 다리를 건너면 내가 아는 300명에 각자 300명씩을 곱하게 되니, 9만 명의 사람을 알게 되고, 또 한 다리를 건너면 2,700만 명의 사람을 알게 되고, 네 다리를 건너면 81억 명을 알게 된다. 물론 이것은 지역과 문화의 제약을 상정하지 않은 것이지만, 산술적으로 볼 때 인류는 네 다리만 건너면 모두가 친구인 셈이다. 열 다리도 아니고 네 다리만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인데 종교나 이데올로기가 다르다고, 서로 피가 다르고 생활양식이 다르다고 으르렁거리고 총을 겨누어야 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이제 인류가 하나임을 깨닫고 참여와 연대를 통해 소외를 극복하고 모두가 타인의 인간다움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회복하고 서로를 섬기고 서로를 인간답게 하는 삶과 그럴 수 있는 체제로 전환하여야 한다.


7) 산업사회와 신자유주의로 인한 공동체의 해체와 한국적 공동체의 길


산업사회로 이행하면서 토대가 변화하자 수천 년 간 지속되어 온 농촌 공동체는 급속히 해체되었다. 공장은 농지를 야금야금 삼켜버렸고 농민들을 노동자로 전환시켰다. 도시화 또한 산업화와 함께 급속히 단행되었다. 2000년 현재 세계 인류 중 거의 절반에 달하는 29억 명이 도시에 살고 있다.


 2007년에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도시 생활자가 농촌생활자를 초월할 것이며 2030년에는 그 60%인 49억 명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2000년 12월 현재 한국에서 농촌에 사는 사람은 10%도 넘지 않는다(8.7%). 젊은이들은 돈 벌러, 공부하러, 출세하러 도시로 가버리고 노인들만 남아 새우등처럼 굽은 허리를 힘겹게 펴며 밭을 일구고 있다. 도시로 온 90% 사람들이 일터에선 구더기처럼 오글거리다가도 삶터로 돌아오면 콘크리트 상자곽에 서로를 가둔 채 고독을 씹고 있다. 아파트에서 사람이 죽어 몇 달이 지나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서야 발견되는 일은 이제 뉴스도 아니다. 돈 몇 푼에 가족을 살해하는 일은 뉴스로 보도되기는 하나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이런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공동체를 추구한 사회주의도 실패하였다. 스탈린주의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수요와 공급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절로 조절되는 시장을 무시하였다. 지금 용량의 수만 배 되는 슈퍼컴퓨터가 있더라도 당이 시장을 대체할 수 없다. 한 곳에서는 철근이 산처럼 쌓여 녹이 슬고 있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철근이 없어서 다리를 놓지 못하고 집을 짓지 못하여 많은 인민들이 고통에 찬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사회주의 체제의 풍속도가 되었다.


패러다임 자체가 인간중심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중앙집권적인 통제경제를 실시하는 바람에 사회주의에서도 환경파괴는 극심하였다. 노동을 자연의 장애를 극복하고 인간이 자기를 실현하여 자유를 쟁취하는 수단으로 정의하였듯 마르크시즘 또한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지 못한다. 중앙집권적인 통제 경제를 실시하였고 실제로는 인민을 소외시킨 계획경제였지만 목표 달성과 혁명 완수의 구호 속에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것은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이 악이 아니라 창조의 원동력임을 간과한 데 있다. 집단농장의 배추는 썩어가는데 개인 텃밭의 배추는 싱싱하였다. 그것을 개인의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행위, 사회의 공동선에 해악을 끼치는 것으로 간주하여 인민재판을 하고 강력한 사상교육을 시켜야 할 것은 아니었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의 성공 비결은 개인이 마음껏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개발하고 그런 만큼 철저히 보상해주는 데 있다.


 10여 년 이상의 세월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연구에만 몰두하여 새로운 발명품을 만들었는데 그것으로 얻어지는 이익을 사회 전체의 몫으로 한다면 과연 혼신을 다해 연구에 몰두할 과학자는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이기심과 욕망은 자기의 사리사욕만 채워 공동체를 해치는 악으로 규정하여 철저히 없애버려야 할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과학적이고 예술적인 창조의 원동력이었다. 자신의 연봉이 늘어나고, 자신의 명예와 권세가 높아지기에, 그것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도 혜택이 돌아가기에 피땀을 흘리며 일하고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고 자본주의 체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체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심의 동물이다.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이 좀더 행복을 누리기를 바란다. 남의 것을 빼앗아 와서라도 자기의 것을 채우고자 욕심을 부린다. 물론 인류 모두가 나를 버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하지만 대중들에게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이들이 깨달음에 이르지 않는 한, 개인의 이익과 자유는 집단의 공동선과 마주친다. 안토니 기든스의 제3의 길이 절충에 불과함은 블레어의 실험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작은 티베트라고 불리는 불교 공동체, 라다크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준다. 히말라야의 혹독한 기후와 척박한 땅을 안고 사는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종족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보다도 행복하였다. 그들은 불법의 가르침에 따라 물질의 풍요보다 마음의 평안을 더 소중히 여긴다. 그들은 공의 철학에 따라 나를 비우니 탐욕과 어리석음과 분노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과 사람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나와 너, 나와 세계, 인간과 자연을 서로 서로 연기된 것으로 여기니 그가 있어서 내가 있는 것이요, 깨달음과 자비심은 하나이다. “말을 1백 마리 가진 사람이라도 채찍 하나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신세를 져야 할 때가 있다.”라는 이들의 속담처럼 이들은 상대방이 어린이든, 가난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이든, 장애인이든 모두를 부처님과 같이 존귀한 존재로 보고 존중한다.


하기는, 땅 속의 지렁이도 소중한 생명체로 여겨 그를 피해 쟁기질을 하는 이들인데, 자신이 기른 가축을 죽일 때도 간절히 용서를 구하고 부처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도하는 이들인데 사람에 대해선 오죽하겠는가? 서로가 서로를 완벽한 인격체로 대하니 이들에게 소외감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은 개인의 이익이 전체 공동체의 이익과 맞서지 않는다. 가족과 이웃에서 다른 마을 사람과 낯선 사람에 이르기까지 라다크 사람들은 남을 돕는 것이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리라는 것을 안다. 농사일을 더불어 하며 사유재산도 함께 사용한다.


그들은 모든 사람과 짐승의 오줌과 똥을 비료와 연료로 쓸 정도로 낭비를 하지 않고 거의 완전에 가까운 재활용을 하며 자연과 철저히 공존하는 삶을 산다. 이들은 질병이 이해의 결핍에서 생긴다며 상대방을, 자기 앞의 세계를 늘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감싸려 하기에 스트레스는 없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열심히 일하면서 느슨하고 편안한 생활을 하기에, 일과 놀이를 구분하지 않고 언제나 노래를 부르며 일하기에 이들은 모두가 건강하다. 모두가 삶에 대해 충만한 행복감을 가지고 있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늘 웃음을 띤다. 그러니 그들은 자신들을 16년간 관찰한 이방인 학자에게 묻는다. “모든 사람이 우리처럼 행복하지 않단 말입니까?” 그 이방인 학자, 노르베리 호지는 “협동과 공생과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항상 웃음과 행복으로 가득한 라다크야말로 서구 산업사회가 지향해야 할 사회, ‘오래된 미래’이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라다크는 홀로 존재할 때 완벽한 공동체였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라다크에마저 침투하여 라다크를 서서히 해체하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대응 없이 어떤 공동체도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밖이 자신에 대한 집착과 욕망으로 불타는 자본주의 사회인데 자신의 공동체만은 이에서 떠나 고고한 성을 유지하는 것은 그 공동체를 신비적 종교의 성채로 유지하자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자본주의의 침투 속에서도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으나 자본주의 사회와 전혀 교류가 없는 공동체들을 보면 대개가 사이비 종교, 혹은 교조적 광신적 종교집단의 공동체이거나 모든 제도와 생활양식이 중세로 퇴행한 농촌공동체다. 다른 사회나 집단과 소통하지 못하는 공동체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제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할 시점이다. 빠름에서 느림으로, 채워짐에서 비워짐으로, 욕망을 향해 달리는 삶에서 조절하는 삶으로 우리의 삶의 양식을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욕망은 신기루이다. 이르려고 하면 할수록 욕망의 완성에서 멀어진다. 하지만 사람들은 욕망을 향하여 질주한다. 아직 1년에만 4백만 명 이상의 어린이가 굶어죽는 땅에서 한껏 먹고 욕망의 포화상태에 이른 현대인들은 각종 성인병, 현대병에 시달리면서 다이어트를 하느라 뼈를 깎는 고통을 겪음은 물론이거니와 이 비용으로 미국에서만 연 3천조 원이나 되는 막대한 대가를 지불한다. 이는 이 사회가 왜 건강하지 못하며 모순과 부조리에 차 있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포만감에 이르기 전에 숟가락을 놓아야 자신의 체중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이기심과 욕망이 본질인 인간에게 그것을 없애버리고 공동체로 오라고 하는 것은 신이 나서 장관 자리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대뜸 모두 부질없는 짓이니 스님이 되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기심과 욕망을 발현할 장을 마련하는 한편 이를 공동체의 테두리 안에서 융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다행히 한국 사회는 아직 공동체의 유산이 남아 있다. 정글의 법칙대로 움직이고 토끼와 거북이식의 극단적인 경쟁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IMF 이전만 하더라도 서울의 한복판에서도 서로 음식을 나누며 서로를 배려하고 걱정하고 상부상조하던 골목문화가 남아 있을 정도로 이는 한국인의 무의식에 잔존하고 있다. 굶주림의 상황에서도 까치밥을 남기고, 대문 바로 곁에 개다리소반을 걸어두고 거지가 오면 거기에 한 상을 차려 준 것이 한국인의 심성이다. 7, 80년대에 복지순위로 보면 100위권임에도 굶어죽는 사람이 적었던 것은 심청이 젖동냥한 것처럼 대중 스스로의 복지 시스템이 작동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풍토에서 나온 다산 정약용이 제시한 여전제(閭田制)를 응용하여 사회주의의 집단농장과 자본주의의 기업의 장점을 조화시킬 수 있다. 다산은 사회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를 내다보고 여전제를 대안으로 내세운다. 그는 촌락의 공동경작과 노력보수제를 조화시킨다. 그가 <전론(田論)> 7장에서 밝힌 대로, “노력의 많고 적음에 따라 분배의 후하고 박함이 결정되므로 농부는 힘을 다하고, 전지(田地)는 지리(地利)를 다하게 될 것이요 지리를 잘 이용하면 민산(民産)이 부요하고 민산이 부요하면 풍속이 순후하고 풍속이 순후하면 백성이 효제(孝悌)를 행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전법은 전제(田制)의 상책(上策)이다.”


그전에 고무신을 1만 켤레 생산하는 공장이 1만 켤레를 공동 생산하고 분배하여 소련과 같은 문제를 야기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제는 그 중 5천 켤레의 가치는 공동의 몫으로 하여 균등하게 1/n로 분배한다. 그 중 3천 켤레에 해당하는 가치는 개인이 일한 만큼 인센티브 형식으로 나누어주어 개인의 창의력과 성실함에 따른 보상을 하여 그들의 활기찬 참여를 이끈다. 나머지 2천 켤레 중 1천 켤레의 가치는 국가의 세금처럼 마을 축제, 다리 등 마을 공동의 자산으로 축적하고 나머지 1천 켤레의 가치는 자신의 노동이 타인을 자유롭게 하였다는 것을 구체화할 수 있도록 그 공동체와 연관이 있는 주변의 장애인이나 양로원 등에 보낸다.


물론 구성원 간 눈부처―주체성을 높이기 위하여 노동의 목적과 방법에서부터 분할 비율에 이르기까지 전체 과정을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여 자유토론으로 정한다. 외적으로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패러다임을 따라 공동체와 다른 집단을 네트워킹하고 내적으로는 진속불이(眞俗不二)의 원리에 따라 구성원 간 눈부처―주체성과 상보성을 높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공동체 안에서 화쟁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서로가 서로를 보듬으려 한다면,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 구분 없이 나 아닌 다른 이를 자유롭게 할 때 내가 진정 해방되고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천한다면, 세상의 삼라만상과 내가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보아 생산에서 소비체제에 이르기까지 순환의 원리를 적용한다면, 가진 자 못 가진 자 없이, 환경파괴 없이 깊은 연대와 사랑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8) 상대적으로 빈곤한 삶에서 비움과 나눔과 사귐, 섬김의 삶으로


오늘 한국인 대다수는 절대적이라기보다 상대적 빈곤이나 박탈감이 지대하다. 이는 개발독재를 거치면서 부의 균등한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부조리한 방법으로 부를 축재한 자들이 많고 부동산의 가치가 잘못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근본적으로 부의 균등한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제도의 개혁이 따라야 하고 성실하게 노력하는 자들이 대우를 받고 합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빈자를 비롯하여 한국인 스스로도 상대적 빈곤감과 박탈감을 극복하고 비움과 나눔과 사귐과 섬김의 삶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제 인류가 살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선택밖에 남지 않았다. 더 이상 욕망을 확대한다면 지구 사회는 멸망을 맞는다. 욕망을 수용할 여분이 지구에는 더 이상 없다. 전화 다이얼에 빈 번호가 있어야 수억 개의 번호 조합을 만들 수 있고, 예전엔 폐수의 양과 강물이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양 사이에 격차가 있어 폐수를 버리더라도 늘 강물이 맑게 유지된 것에서 보듯, 무위(無爲)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빈틈〔虛〕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지구촌 사회는 그 빈틈이 사라졌다. 비움이 있어야 채움이 있음은 자명한 진리다.


우리의 삶이 고독하고 소외가 일상화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 타인들과 벽을 쌓았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그리로 가 그의 손을 보듬고 서로 소통하고 상호작용을 하면서 하나를 이룰 때 자연스레 ‘우리’가 된다. 우리가 되면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에서 보듯, 각 존재자는 우리의 범주에 들어온 타자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거나 포기한다.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인간이 이타적일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앞 장에서 언급했듯, 진정 사랑하는 이는 타인에게서 신을 발견하며, 그 순간 그도 신이 된다. 테레사 효과라는 말이 있다. 테레사 수녀처럼 타인에게 헌신적인 봉사를 하는 장면만 보아도, 그의 전기만 읽어도, 그의 이름만 떠올려도 마음이 선해지고 신체의 면역력이 증대된다는 것을 이른 것이다. 실제로 하버드 의대에서 실험한 결과다. 비움과 나눔, 사귐과 섬김의 삶은 그를 위한 선행이 아니라 내가 사람답게 살고 내가 타인으로부터 사랑을 받아 늘 평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길이다.


9) 문화적 소외·정보 격차와 소수자와 빈자가 주체가 되는 담론 생산의 길


빈자는 중심의 정보와 지식에서 소외된 자다. 정보 접근권 등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고 인터넷이 활성화하였지만 중요한 정보와 지식은 아직 권력층이 독점하고 있다. 빈자는 담론 생산에서 늘 대상이었다. 빈자는 재현의 폭력의 희생자로 재현의 주체나 매개체에 의해 늘 희생당하는 자다. 세계 체제로 가면 정보와 지식, 담론의 생산자는 유럽, 특히 미국이다. 제3세계는 그들이 재현한 텍스트들과 담론에 따라 사고하고 생산하고 소비하며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미국과 지배층에 의해 생산된 담론과 텍스트들엔 코스모폴리타니즘, 니치주의, 아메리칸 로맨티시즘, 가부장주의, 반공이데올로기 등의 신화 및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다. 때문에 이들 담론과 텍스트는 코스모폴리타니즘과 세계화 논리 아래 민족을 제거하였고, 니치문화주의와 몰계급적 감상주의로 역사적 담론과 실천을 유보시키고 소시민적 일상에 몰입하는 것이 성공이고 행복이라고 조작하였으며, 가부장주의로 남근의 폭력을 정당화하고 반공이데올로기로 진보에 대한 꿈을 말살하였다.


 이것의 목표는 분명하며 물질적이다. 역사와 민족, 진보 등 거대담론을 제거하고 제국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이며 가부장적인 심성과 가치, 상징을 확대재생산하자는 것이다. 이로 제국주의의 지배층과 주변부의 지배층은 주변 지배의 헤게모니를 획득하고 상품판매를 증대하며 결국 잉여착취를 통한 이윤축적을 강화하고 지배를 영속화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 것은 수용자는 지배계급인 신화제작자가 만들어 놓은 메시지와 신화를 단순히 수용하지만 않는다는 점이다. 수용자는 약호꾸러미를 받아 자신이 이제껏 대한 텍스트와 기호체계, 자신의 의식, 전의식 등이 구성하는 체계에 따라 약호꾸러미를 해독하고 가치평가를 한다. 텍스트에 대한 다양하고 열린 해석이 수용자를, 제국주의나 지배층의 신화나 이데올로기에 조작되지 않는 자유로운 주체로 만든다. 그러나 제임슨의 지적대로 모든 읽기를 할 때 절대지평으로서 정치적 해석에 우선권을 주어야 한다.


정치적 해석을 한 후에 열린 해석을 시행해야지, 한국이나 미국의 대다수 기호학자들처럼 정치적 해석이 전제가 되지 않은 열린 해석이나 수용자 위주의 분석은 텍스트에서 현실과 역사를 제거하고 ‘해석의 자유’라는 또 하나의 신화를 생산할 뿐이다. 제3세계 대중문화 텍스트에 담긴 신화와 이데올로기들이 정치적, 경제적 목적에서 수행되었고 결국 물질적이기 때문에 이런 기호학적 해석은 필연적으로 지배이데올로기에 봉사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선, 지배층의 본질, 그들과 빈자의 관계, 자본의 유입형태, 문화산업의 구조, 제도, 기술도입과정, 생산과정과 분배과정, 전문적 이데올로기의 침투과정, 문화생산물의 수입현황, 중심국가로부터 편입된 문화생산물의 내용, 형태와 패턴, 다양한 계급들과 계층에 의한 문화표현과 소비양식을 인식하여야 한다.


다음으로 대중문화 텍스트 속의 신화를 인식하고 이에 대하여 대항신화를 형성하고 다시쓰기를 해야 한다. 다시쓰기는 텍스트를 단순히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신화에 조작되던 대상이 주체로 서서 세계를 다시 구성하는 것이다. 텍스트에 대하여 정치적 해석에 우선권을 준 열린 읽기를 하되, 이를 바탕으로 다시 쓰기를 감행하여 세계를 다시 구성하여야 한다.


무모하게 도전할 것이 아니라 지배층의 거대한 헤게모니를 인식한 바탕 아래 기생 전략과 게릴라 전술로 맞서서 그들의 진지들을 하나하나 파괴시켜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하여 곳곳에 대항언론을 세워야 한다. 국민방송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배적인 담론에 담긴 신화를 거꾸로 뒤집어 패러디하는 것, 강단과 광장, 거리를 가리지 않고 논문, 대자보나 전단, 잡문 등 여러 형식으로 대항언론을 만드는 것, 빈자들이 인터넷을 이용하여 서로 연대하여 제도권 언론과 맞설 수 있는 네트워킹에 의한 대항의 언론을 형성하는 것이다.


NANAP, IPS처럼 빈자가 연대하여 대안통신사를 설치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대안이다. 그러나 실천 없는 이론보다 더 공허한 것은 힘이 없는 실천이다. 비동맹 80개국이 참여한 NANAP가 재정과 뉴스와 정보의 수집과 유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겨우 일일 500 단어 정도의 메시지를 보내는 정도에 그치는 데 비하여 미국의 일개 통신사인 AP는 10억의 독자를 확보하고 110개국을 대상으로 매일 1,700만 단어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기에 이상의 구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상이 뿌리를 내리고 힘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은 조직과 재정, 유통이다. 이를 위하여 대안 통신사나 대항언론은 빈자의 네트워킹은 비정부조직, 진보적인 매체 및 단체와 수평적, 수직적으로 연대를 맺어야 한다.


더불어 지배층 위주의 교육제도를 개선하고, 교과서를 개편하여야 한다. 이때 학교교육 메커니즘을 개편해야 하지만 인터넷이나 PC통신을 통한 새로운 메커니즘을 이용해도 좋다. 이런 틀을 통하여 올바른 주체로서 대중문화 텍스트를 읽고 다시 쓰는 교육, 지배층의 담론에 대한 비판교육이 수행되어야 한다.


주체가 진정 해방되려면 단순히 이들 텍스트에 숨어 있는 이데올로기와 신화를 간파하고 자신의 주체를 굳건히 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그를 확대재생산하는 구조를 파괴해야 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새 구조에 맞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워야 하며 이 패러다임에 따라 현재의 구조를 깨는 새로운 판짜기를 해야 한다.


‘나무전략’, ‘기생전략’, ‘잉크전략’ 또한 하나의 대안이다. 나무전략이란 큰 나무 옆에 아무리 조그만 나무라도 다른 나무가 자라 햇빛을 막고 영양분을 빼앗아간다면 큰 나무가 언제인가는 새로운 나무에 자리를 내주어 숲이 침엽수림에서 활엽수림으로 바뀌듯 구조 밖에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구조를 교체하는 것이다. 기생전략이란 나무 안에 들어가 나무를 안으로부터 썩게 하는 것이다.


잉크전략이란 잉크처럼 스며들어 안으로부터 색깔을 바꾸는 것이다. 학교로 예를 들면 이곳저곳에 대안학교를 만들어 기존의 학교들이 창의성과 다양성의 보장과 연기적 사고를 하게 하고 민주주의와 생태적 가치, 인간적 가치들을 지향하는 교육장으로 변하게 하는 것이 나무전략이다. 진보적 선생들이 교육부와 학교로 들어가 선생들을 변하게 하고 학생들에게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라면 교과서, 커리큘럼을 바꾸고 나중에는 학교 자체를 변하게 하는 것이 기생전략이다.


대중은 양면성을 지녔다. 대중은 무지하고 야만적이고 대중매체에 쉽게 조작당하는 우중이자 자기 나름의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 앞의 세계에 대응하고 문화와 예술 텍스트를 주체적으로 읽는 수용자이기도 하다. 대중은 원자화하고 부품화하며 이질적, 고립적, 비조직적 개체이자 타자와 강한 유대 속에서 삶을 구현하고 조직을 형성하며 공동체를 추구하는 구성원이다. 대중은 지배이데올로기에 휘둘리는 대상이자 지배층에 맞서서 저항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실천집단이다.


우리는 대중을 섣불리 계도해서도, 어떤 이론으로 재단해서도 안 된다. 5.18 민중항쟁이나 부안 반핵 시위를 보면, 대중은 지식인도 사라진 그 자리에서 그들 스스로를 조직하였고 그들 스스로 학습하고 거듭났으며 그들 스스로 ‘절대공동체’를 구현하였다.


불교를 빌어 다시 말하면 일체 대중들 안에 부처가 있다. 유리창에 덮인 먼지만 닦으면 파란 하늘이 드러나듯, 어떤 매개를 통하면 대중들 속에 자리한 주체와 연대, 절대공동체를 향한 비전과 실천이 집단적 신명으로 드러난다. 더구나 우리 민족의 집단무의식 속에 공동체적 신명이 자리하기에 결정적인 시기에는 이것이 표출되어 절대공동체를 구현하였다.


대중들 안에 숨겨진 부처를 드러내는 일, 다시 말하여 대중들이 어떤 시기에 어떤 매개를 통해 그를 드러내고 절대공동체를 만드는가에 대하여 더 많은 고민과 사색이 필요하다. 이것을 체계화하여 설명하고 활용할 수 있을 때 빈자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 길이 성과를 거둘 것이며 한국의 빈자들은 그들이 바라던 사회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갈 것이다.


10) 빈자를 위한 참죽음(well-dying)의 길


죽음은 평등한 동시에 평등하지 않다. 죽음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부자든 빈자든, 권력자든 피지배층이든, 장애인이든 아니든 언제인가 누구나 죽음을 맞는다. 죽으면 누구든 삶의 공간으로 되돌아오지 못하며 두 번 죽는 자는 없다. 죽음은 또 평등하지 않다. 어떤 이는 수억 원을 주고 장기를 교체하여 죽음을 뒤로 미루며 어떤 이는 단지 감기약이 살 돈이 없거나 상처에 바를 소독약이 없어서 죽음을 맞는다. 어떤 자는 수백억 원에 달하는 호화분묘에 묻히고 어떤 자는 한 평 땅도 없이 짐승의 먹이가 된다. 어떤 이는 수억 명이 애도하고 어떤 자는 단 한 명의 조문객도 없이 죽음을 맞는다.


죽음이 어떻든, 빈자들에게 잘 죽는 것은 잘 사는 것 못지 않은 과제다. 빈자들의 참죽음에 먼저 필요한 것은 죽음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다. 삶이 환희고 황홀한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죽음은 환희와 행복의 마침표이다. 그러기에 삶에 집착할수록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다. 생의 환희에 빠져 있는 사람일수록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은 항상 우리 주변을 맴돌면서도 정작 언제 어디서 삶의 자리를 대체할지 기약을 하지 않기에 더욱 더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이 두려움과 불안감에 휩싸인 현대인은 삶을 초조하게 소비하기 마련이다. 시간을 늘이려 잰 걸음을 놓지만 그럴수록 삶은 빨리 흘러간다. 허비하지 않으려 무진 애를 쓰지만 그럴수록 발걸음은 목표에서 멀어져 끊임없는 방황을 한다. 결국 초조한 소비는 부조리한 삶을 낳는다. 불안과 고독감과 두려움에 싸여 의미 없는 방황을 하면서 쉴새없이 부조리를 낳는 모습이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그러나 죽음은 삶의 대척점에 있지 않다. 우리 속담에 “저승길이 얼마나 좋으면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더냐.”라는 말이 있다. 죽음을 어느 민족보다도 삶 가까이로 받아들였기에 이런 해학이 나왔을 것이다. 우리에게 죽음은 그리 먼 세계의 추상은 아니었다. 묘자리를 정할 때, 수의를 마련하였을 때 잔치를 벌이는 것이 우리네 관습이다. 장례를 축제로 치르는 민족도 드물다. 죽은 자에 대한 제사 또한 죽은 자의 뜻을 기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이보다 산 자들이 모여 축제를 연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죽음을 가까이 둔 데에는 까닭이 있다. 그만큼 삶이 풍성해지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죽음은 현존재가 피할 수 없는 가능성이며, 현존재의 본질은 죽음으로 가는 존재(Sein zum Tode)이다. 죽음이 없다면, 인간이 유한하지 않고 영원하다면 인간은 모두 아귀가 되고 세상은 지옥으로 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인가 죽는다는 유한성의 인식은, 죽음에 대한 불안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하게 한다. 간암으로 1년 뒤에 죽는다는데 “에브리데이 할러데이”라고 콧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허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개 조용히 마지막 남은 날들을 어떤 의미로 채울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할 것이다. 내 주위의 사랑하는 이들에게 과연 무엇을 베풀고 갈 것인가를 생각하며 밤을 지새울 것이다. 그러니 현존재는 시간과 죽음에 직면하여 자기의 본래성을 되찾는다. 이것이 바로 실존(Existenz)이다.


이처럼 죽음을 가까이 하는 삶은 패배의 삶도, 나락의 생도 아니다. 반면에 죽음을 부정하는 삶은 생에 집착한다. 이 집착은 욕심을 낳는다. 더 많은 재산, 더 맛난 음식, 더 깊은 향락, 더 강한 권력을 꿈꾼다. 그러기에 이는 고통을 잉태하며 결국 자신의 삶을 파괴한다. 죽음을 가까이 하면 삶은 자유로워진다. 죽음에 다가갈수록 삶은 풍요로워지며 무늬를 이루며 의미로 반짝인다. 그런 이에게 영원한 삶을 사는 천국은 이승, 곧 현실 안에 있다.


다음으로 빈자가 참죽음을 맞는 길은 이를 우주의 대순환에 맡기는 삶의 자세를 갖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별에서 와서 별로 돌아간다. 내가 바람이 되고 돌이 된다는 말은 시간만 넓히면 진실이다. 정말 시작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때 한 알의 씨앗이 폭발하여(Big Bang) 우주에 수많은 성간물질을 퍼트리고 그것이 하나로 뭉쳐지면서 별을 만들고 그 별이 수천억 개 모여 은하계를 이루고 그 은하계가 또 다시 수천억 개 모여 대우주를 형성하였다.


은하계의 수천억 개의 별 가운데 하나인 태양계에 지구와 화성이 만들어지고 지구엔 거기에 존재하던 몇몇 물질이 합성하여 생명체를 이루고 이들 생명체가 진화하여 사람을 만들었다. 인류의 역사를 250만 년으로 잡더라도 100억 년이 넘는 우주의 역사를 1년으로 환산하면 우리는 1년 중 가장 마지막 날의 11시 59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찰나의 시간을 살다가 사람은 죽어 흙이 되고 그 어느 날엔가 지구가 폭발하여 다시 성간물질로 돌아가면 그것이 우주에 흩어져 떠돌다가 다시 뭉쳐져서 새로운 별을 낳는다. 그리고 수천억, 아니면 수조 년이 지나서 우주는 다시 대수축을 하여 한 알의 씨앗으로 뭉쳐지고 이 씨앗은 다시 대폭발을 할 것이다.


별에서 나서 별로 돌아가는데 그리 아귀다툼을 하며 살아야 할 필요가 없다. 그리 더 많은 돈을 벌려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 이름을 높이려, 더 짜릿한 쾌락을 위하여, 육신을 허비하고 남을 해하기까지 하여야 하는가? 금고 속에 가득한 돈도, 높이 높이 솟은 자리도, 이름이 빛나는 신문도, 향락의 찌꺼기가 흩어진 침대 시트도,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나의 심장과 뇌도, 나의 생식기도 모두 하나같이 별로 돌아간다.


우주의 먼지로 이루어져 다시 먼지로 돌아가는데 ‘나’란 있는 것인가? 다들 먼지로 돌아가는데 특별히 중요한 자도 귀중한 자도 없다. 무한의 시간과 무망한 우주 공간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행성에서 같은 삶을 보내는 너와 내가, 내 앞에 아름답게 펼쳐진 자연이 오직 소중한 것이다. 영겁의 순환 중 찰나의 삶을 함께 해 준 그들이 은혜로운 것이다. ■


출처 불교평론 2008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