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불교와 인문과학

죽음 - 죽음을 슬퍼하면서 삶을 통찰하고 다시 희망을 빚는다

slowdream 2008. 7. 16. 06:43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26) 죽음

 

죽음을 슬퍼하면서 삶을 통찰하고 다시 희망을 빚는다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표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니체(1844~1900)가 바그너에게 보낸 ‘비극의 탄생’ 최초의 서문에서 그리스 예술을 가리켜 한 말이다. 숲속에 맑은 호수가 있다. 어둠이 걷히고 햇빛이 비치자 호수의 표면이 아름답게 반짝인다. 손을 넣으면 호수 바닥의 자갈을 건져 올릴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햇빛에 반짝이는 표면의 아름다움은 실상 가늠할 수 없는 무서운 깊이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나는 니체의 말에서 ‘무서운 깊이’와 ‘아름다운 표면’을 각각 ‘죽음’과 ‘삶’으로 바꾸어 이해한다. 출생의 근원을 따져보면 문학이란 거개가 죽음을 둘러싼 의혹·호기심·두려움·회고·그리움·깨달음·소문 등에서 태어난다.

 

카뮈의 ‘이방인’은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후 어머니의 죽음을 둘러싸고 개인의 실존과 사회적 관습 사이의 부조리가 펼쳐진다. ‘닥터 지바고’의 첫 장면은 ‘편히 쉬시옵소서’를 부르며 가는 어머니의 장례 행렬이다. 이로부터 12년 뒤 예비 장모의 죽음 앞에서 감수성 예민한 24살 청년 의학도 지바고는 생각한다.

 

예술에는 언제나 두 가지의 끊임없는 관심사가 있음을 분명히 깨달았다. 예술은 항상 죽음을 상상하며 또 이것으로 항상 삶을 창조하는 것이다. <오재국 옮김>

 

10년 전 겨울 술에 취해 몇 정거장 지나서 버스를 내린 적이 있다. 집에 가기 위해서는 긴 둑길을 걸어야 했다. 다리 저는 나귀처럼 터덜터덜 걸어가다가 문득 달을 보았다. 싸늘한 겨울 하늘에 아직 보름이 되기 전의 달이 빛나고 있었다. 달의 한쪽 불룩한 모양이 임부의 배 같다고 느꼈다. 거기엔 이승에 없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리움에 사무쳐 눈물이 나왔다. 집에 돌아와 확인하니 그날은 음력 열이튿날이었다. 시 한 구절을 얻었다. “열 이튿날 달은 임부의 배 / 그리움을 잉태하고 있다.”

 

우리 문학사는 ‘죽음의 충격’으로부터 시작한다. 뱃사공 곽리자고가 새벽에 배를 손질하고 있는데, 흰 머리를 산발한 미친 사람이 술병을 끼고 거센 물결을 가로질러갔다. 그의 아내가 따라가며 말렸으나, 끝내 남자는 빠져죽고 말았다. 그의 아내는 공후를 뜯으며 슬픈 노래를 부르더니 또한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에 얽힌 사연이다.

 

여보 물을 건너지 마오 / 당신은 그예 물을 건넜네 /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으니 / 아아 당신을 어이할거나.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當奈公何.)

 

수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넋두리에 가까운 노래이다. 하지만 이 짧은 노래에는, 건너지 말라는 마음과 건너고 마는 행동 사이에 원초적 긴장이 팽팽하고, 긴장은 끝내 물을 건너다 빠져 죽는 강렬한 파탄으로 깨진다. 남는 것은 체념이다. 순간적으로 형성되었다 끊어지는 강렬한 긴장과 파탄은 이어지는 그녀의 죽음으로 더욱 강화된다. 상황만 다를 뿐 세상의 수많은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이 대개 그러하다. 이 단순한 노래가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는 이유이다.

 

죽음은 서서히 다가와 우리를 충격과 혼란에 빠뜨리고 유유히 사라진다. 죽음과의 거리에 따라 사람들의 정서적 반응은 공포와 불안에서, 당혹감과 공허감을 거쳐, 회고와 그리움으로 달라져간다. 죽음이 꼬리를 감추고 사라지면서 죽음은 우리 삶에 내면화된다. 사람들은 삶에서 죽음을 읽고, 죽음을 전제로 삶을 통찰하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호수의 표면이 반짝이듯 삶은 비의를 지니고 아름다워진다.

 

옥모가 희미터니 보매 문득 없기에 / 깨어보니 등 그림자 저 홀로 외로워라 / 가을비에 놀라 깰 줄 진작에 알았다면 / 창밖에 벽오동을 심지는 않았으리.(玉貌依稀看忽無, 覺來燈影十分孤. 早知秋雨驚人夢, 不向窓前種碧梧.)

 

죽은 아내를 애도하는 이서우(李瑞雨, 1633~1689)의 ‘도망(悼亡)’이다. 꿈결에 아내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이기에, 똑바로 보려고 눈을 번쩍 떠보니 호롱불만 저 혼자 깜박거리고 있다. 등 그림자가 외로운 게 아니라 혼자 남은 자신이 외로운 것이다. 창밖에서는 오동잎을 때리는 가을비 소리가 요란하다. 빗소리가 아니었다면 아내의 얼굴을 더 볼 수 있었을 것을. 애꿎게도 벽오동 심은 것을 후회하나, 사실은 그것도 아내가 딸을 낳았을 때 심은 것이 아닐까. 이렇게 애틋한 사연들을 예거하자면 3년 밤낮을 꼬박 이어도 끝이 없을 것이다.

 

1849년 29세의 도스토예프스키는 불온 서클 활동을 한 죄목으로 당국에 체포되었고,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죄수들 모르게 사형 판결이 번복되었다. 죄수들은 마차로 처형장에 옮겨졌다. 사형 선고문이 읽혀지고 사제는 십자가를 들고 마지막 참회를 말하라고 했다. 죄수들은 순서대로 줄을 서서 총살을 기다렸다. 이때 황제의 사자가 들어와서 사형 중지를 명했다. 일종의 연출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죽음을 면하고 감옥으로 돌아왔지만 이때의 충격을 잊지 못했고, 소설 속에서 집요하게 죽음의 문제에 집착한다.

 

‘백치’에서 므이시낀 공작은 프랑스에서 목격한 사형 장면을 이야기하며, 사형 선고를 내리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강도의 살인에 비해 훨씬 가혹한 짓이라고 말한다. 희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재미난 그림 소재를 들려달라는 에빤친 장군의 막내딸 아글라야에게는, 길로틴이 떨어지기 1분 전 사형수의 얼굴을 그려보라며, 사형당하는 사람의 심정을 곡진하게 이야기해준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고통에 일그러진 인간적인 표정을 담은 그림을 소개하기도 한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나는 고통스럽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를 구현하는 병적인 인물들인데, E.H. 카아는 그 병적인 비정상의 근원을 그날의 사형 체험에서 찾았다.

 

얼마 전 타계한 박경리는 ‘토지’ 대서사를 잉태한 씨알에 대해 털어놓은 적이 있다. 어릴 적 외할머니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다. 거제도 어느 곳, 끝도 없는 넓은 땅에 누렇게 익은 벼가 그냥 땅으로 떨어져 내릴 때까지 거둘 사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호열자가 사람들을 데리고 간 뒤였다. 외가 사람들이 다 죽고 딸 하나가 남아 집을 지켰는데, 뒷날 그녀가 어느 객주집 부엌에서 지친 표정으로 일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박경리는 ‘삶과 생명을 나타내는 벼의 노란색과 호열자가 번져오는 죽음의 핏빛’이 젊은 시절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토지’는 죽음에 대한 상상에서 잉태된 것이다.

 

‘토지’는 1897년 한가위 날의 흥겨운 굿놀이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 밤이 지나면 달은 차츰 기울어갈 것이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둠과 겨울이다. 그것은 죽음의 세계다. 그래서인지 한가위 밤 묘사는 음산하다. 한가위를 두고는 “태고적부터 이미 죽음의 그림자요, 어둠의 강을 건너는 달에서 연유된 축제가 과연 풍요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는지?”라고 물음표를 달았다. 가을 들판의 잔해 위를 검시(檢屍)하듯 맴돌던 찬바람은 사람들 마음에 부딪쳐 와서 서러운 추억의 현을 건드려준다. 현이 울리는 것은 흉년에 초근목피를 감당 못하고 죽어간 늙은 부모, 돌림병에 약 한 첩을 써보지 못하고 죽인 자식을 거적에 말아서 묻은 동산, 민란 때 관가에 끌려가서 원통하게 맞아죽은 남편 등의 사연이다. 죽음 아닌 것이 없다.

 

을씨년스러운 한가위날의 풍경만큼이나 ‘토지’의 앞머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은 음산하다. 밭은 기침을 토해내는 파리한 안색의 최치수, 동학 접주 김개남의 아들을 몰래 낳고 평생 죄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윤씨 부인, 다섯 살에 엄마로부터 버림받은 다섯 살의 서희, 출신 내력을 모르는 길상, 슬픈 내력을 말할 수 없는 구천, 어릴 때 보았던 맞아죽은 종의 큰 발을 환상처럼 안고 사는 봉순네, 무기(巫氣)가 있어 소꿉장난을 하면서도 객귀(客鬼) 물림을 하는 봉순이, 죽음을 기다리는 바우할아범 등이 풍기는 분위기다. 이는 최참판집 식구들은 물론이고 앞으로 조선 백성들이 겪어야 할 죽음의 의례를 암시하는 것이다.

 

더구나 박경리는 ‘토지’ 연재를 시작한 지 두 해가 못 된 1971년 암 선고를 받고 수술을 받는다. ‘토지’는 죽음의 그림자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하지만 죽음에서 비롯했기에,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강렬한 희망이 이후 ‘토지’의 세계를 일관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해보라. ‘토지’에 허투루 죽는 사람이 있는지, 함부로 목숨을 빼앗는 일이 있는지? 표독한 귀녀의 죽음에도, 묘향산 어느 골짝에서 죽는 별당아씨의 처량한 죽음에도, 거기에는 마냥 미워하거나 손가락질할 수 없는 생명감과 정당성이 깔려있다. ‘토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아름답고 활력 넘치는 삶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죽음의 인식에서 비롯된 ‘무서운 깊이’이다.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박남수, ‘아침 이미지’) 빛은 어둠에서 나온다. 크게 의심하지 않으면 크게 깨닫지 못한다는 철인의 말대로 무지는 자각을 낳고, ‘돌아온 탕아’처럼 죄악은 구원을 낳는다. 절망은 희망을 낳고, 무지는 지식을 낳고, 이별은 사랑을 낳는다.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상상이 새로운 삶을 잉태하고 낳는다.

 

 

<이승수 경희대 연구교수>

출처 경향신문 2008년 07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