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불교와 인문과학

실체는 허상이니 관계를 본다 <상>

slowdream 2008. 7. 18. 11:33

‘정절’의 상징이던 춘향이도 뒤집어보면 ‘계급 타파’ 표상

 

19. 실체는 허상이니 관계를 본다 <상>
 
기사등록일 [2008년 07월 09일 수요일]
 
 
눈 앞에 보이는 작품을 실체로 읽을 필요는 없다. 만다라가 아름다운 도형을 그린 것으로 보이지만 다양한 관계로 맺어진 세상의 구조를 표현하는 과정이다.

서양 사람들은 실체 중심의 사유를 하고, 동양 사람들은 관계 중심의 사유를 한다. 한 미국학자가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제자들을 모아놓고 실험을 하였다. 어항을 보여주고 그것을 다시 그리라고 했더니 서양 학생 대부분은 어항 속의 물고기를 그렸다. 하지만 동양 학생 대부분은 어항과 물고기와 물풀, 책상이 어울린 그림을 제출했다. 실체 중심의 사유를 하는 서양과 관계의 사유를 하는 동양의 패러다임 차이가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

 

서양인들은 사람을 만나면, “너는 누구냐?”고 곧잘 묻는다. 반면에 동양 사람은 “네 어머니와 아버지가 누구며, 너를 가르친 선생은 누구이고, 또 어떤 친구를 사귀냐?”라고 묻는다. 이 물음은 “너는 스스로 너인 것이 아니라 부모에 따라, 선생에 따라, 친구에 따라 이들과 관계망 속에서 다른 의미를 가짐”을 전제한다. 여기서 나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부모, 나-선생, 나-친구로 관계 속에 있다. 그러기에 서양은 그리스 시대부터 존재 중심의 사유를 발전시켰고, 동양은 관계와 연기의 사유를 행하였던 것이다.

 

관계 속 존재로서의 ‘나’

 

우리의 집단무의식 속에선 관계의 사유를 하건만, 서양의 문명과 인문학에 오랜 동안 학습된 한국인들 대부분이 실체론적 사고를 하는 데 더 익숙하다.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비평하는 데도 마찬가지다. 작가, 대상, 작품, 독자를 실체론적으로 바라본다.

 

작가는 동일성을 가진 주체다. 그는 어떤 사상과 이념, 세계관과 예술관을 가지고 있으며 예술적인 기질과 창조적인 영혼을 소유한 자다. 이런 전제에서 출발한 비평방식이 역사주의 비평이다. 역사주의 비평은 작품이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대상으로 간주한다. 작가가 자신의 이념이나 예술관에 따라 주제를 설정하고 소재를 선택한 후 거기에 자신의 의도를 투영한다고 보는 것이다. 비평은 이것의 역순으로 가야 하기에 역사주의 비평가는 작가의 의도를 알기 위하여 작가의 전기, 작가가 쓴 예술론을 비롯한 각종 글들, 작가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평과 진술 등을 수집한다. 이들 자료를 모아 동일성을 가진 작가를 만들고, 그 작가의 머리 속에라도 들어간 양, 대신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작품에 담긴 작가의 의도를 읽고자 한다.

 

향가를 예로 들면, 월명사가 사천왕사에 머물렀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을 바탕으로 호국사찰에 머물렀으므로 월명사를 호국불교를 지향한 승려로 동일화한다. 이를 그가 지은 작품인 ‘도솔가’와 다시 동일시하여 해석하여, 이 향가를 호국불교의 의지가 투영된다. 곧 다스림의 노래인 치리가(治理歌)로 결론 내린다.

 

우선 이런 비평은 비평 안에서 보아도 오류를 안고 있다. 물론 작품에 작가의 의도가 어느 정도 반영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의미를 일치시키는 비평은 그 작품이 3류임을 증명하는 작업이다. 어떤 작품을 3류임을 증명하는 비평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좋은 작품일수록 작가의 의도에서 멀어진다. 좋은 비평일수록 작품에서 작가의 의도를 벗어난 것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고 평가한다.

필자가 문예창작 교실 같은 곳에 가서 강의한다면, 제1성은 당연히 “의도를 버려라.”이다. 사춘기 때 짝사랑하는 사람을 향하여 밤을 새워 연애편지를 썼는데 아침에 읽어보면 너무도 유치찬란해서 찢어버린 경험이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왜? 그 님을 이 편지로 감동시켜 나에게 관심을 갖게 하겠다는 의도가 앞섰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도가 앞서서 망친 글들의 표본을 중, 고등학교 교지에 실린 시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작가의 의도가 곧 예술이라면, 예술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 철학자가 시를 쓰고 사회학자가 소설을 써야 하리라. 문학과 예술은 의도를 넘어서서 꿈을 꾸고 상상한 무엇이다. 머리가 아닌 손가락이 저절로 쓰고 있다고 느낄 때가 글을 제대로 쓰고 있는 순간이다.

 

불교에서 바라보면 더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화이트헤드가 서양철학을 플라톤의 주석에 불과하다고 지적한 데서 잘 드러나듯, 서양 철학은 이데아, 본질, 실체를 향한 고단한 날개짓이었다. 이런 사고가 불교의 영향을 받은 소쉬르에 의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맞는다. 나무의 실체는 나무에 없다. ‘나무’는 ‘풀’과 ‘관계, 구조, 차이’ 속에서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란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쇠와 관계 속에 놓으면 ‘나무’는 ‘식물성, 목질성, 생명성, 부드러움, 따스함, 자연’ 등의 의미를, ‘쇠’는 ‘광물성, 금속성, 무생명성, 단단함, 차가움, 문명’의 의미를 갖는다.

 

작가의 의도 벗어난 작품읽기

 

작가는 동일성을 가진 주체가 아니다. 오늘 하루만 하더라도 나는 다양한 정체성을 갖는다. 아침의 나와 저녁의 나, 공적인 일로 만나 업무에 대해 이야기하는 나와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는 나, 사랑하는 이를 만나 손을 잡고 산책하는 나는 각기 다르다. 나는 스스로 나인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스치듯 확인될 뿐이다. 나라고 동일성을 형성하는 것은 아버지, 학교, 국가 등 타자들에서 온 것을 내가 뒤집어 쓴 것일 뿐이다. 안중근 의사를 흠모하여 그를 닮고자 하는 자는 대의를 앞세우는 동일성을 형성하고, 이건희를 존경하는 이는 돈 잘 버는 능력이 출중한 자로 자기를 만든다. 지금 자신의 이름에 시간과 주변인의 이름을 붙여보자. “홍길동-2008, 홍길동-1980, 홍길동-친구, 홍길동-후배, 홍길동-아내”. 각각 다르지 않은가. 내가 나를 모르는데 비평가가 작가에 관련된 몇몇 자료를 퍼즐 맞추듯 하여 작가 전체를 구성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는 독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독자 또한 ‘나무-풀’이나 ‘나무-쇠’처럼 관계 속에서 드러날 뿐이다. 특히 독자는 맥락에 따라 해석을 달리한다. “나는 말을 바꾸었다.”라는 간단한 문장도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경마장이라는 맥락이라면 “나는 동물인 말을 갈아탔다.”이지만, 누구와 대화를 하던 맥락이라면, “나는 거짓말을 했다.”이며, 싸전에서 쌀을 팔던 맥락이라면 “나는 말을 속여 쌀을 팔았다.”라는 뜻이다.

 

작품도 연기의 관계 속에 있다. 이제 작가의 의도 흔적이 물씬 배어 있는 ‘작품(work)’을 버리고 ‘텍스트(text)’라는 용어를 쓰자. 텍스트의 의미는 “짜여 있어 그 질서 속에서 의미를 캘 수 있는 것”을 뜻한다. 한 편의 시나 소설은 긴밀하게 짜여있고 그 질서나 구조의 분석을 통해 의미를 추출할 수 있으니 당연히 텍스트다. 나뭇잎이 살랑거리는 것을 보고 바람이 불고 있음을 떠올리는 순간 자연의 그 장면 자체가 텍스트다.

 

텍스트를 읽을 때, 실체론적 읽기를 넘어서서 관계의 읽기를 하자는 것이 서양의 상호텍스트성 이론(intertextuality theory)이다. 상호텍스트성 이론의 남상은 보르헤스와 바흐찐이다. 중남미를 대표하는 작가인 보르헤스는 불교에 관련된 책을 내고 강의를 할 정도로 불교철학에 심취하였다. 그는 불교적 사유를 하면서 서양의 실체론이 얼마나 허구인지 깨닫고 텍스트를 쓰고 읽는 데도 연기론에 따라 쓰고 읽을 것을 제시하였다. 또 한 편에서 러시아의 사상가이자 문예이론가인 미하일 바흐찐은 서양의 실체론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불교의 연기론과도 상통하는 대화론을 폈고, 이것은 루마니아 태생의 프랑스의 문예이론가 쥴리아 크리스테바나 미국의 문예이론가 존 프로우에 이어지며 상호텍스트이론으로 체계화한다.

 

‘해석’은 관계 추적하는 과정

 

상호텍스트성이론은 한 마디로 말하여 한 텍스트를 자족적 실체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다른 텍스트와 관계 속에서 읽는 것이다. 텍스트는 닫힌 체계가 아니라 독자, 다른 텍스트와 끊임없이 만나는 열린 체계이다. 작가 또한 텍스트의 창조자이기 전에 텍스트의 독자이다. 작가는 자신이 읽은 텍스트를 바탕으로 새로운 텍스트를 창조한다. 작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읽은 다른 작가, 다른 텍스트를 모방하거나 변형을 가하거나 부정하면서 텍스트를 창조한다. 때로는 문장을 그대로 흉내내기도 하고 인물을 따오기도 하며 구성이나 플롯을 의도적으로 모방하기도 하지만, 작가가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미지와 상징, 내적 구조 등이 작가의 전의식(前意識, pre-consciousness)이나 무의식(無意識, unconsciousness)을 통해 스며들기도 한다.

 

 “예술 작품은 결국 이전의 작품에 의해서 설정된 체계, 약호, 전통으로부터 구성된다. 다른 예술양식과 문화의 체계, 약호, 전통은 한 작품의 의미에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읽기 행위 또한 수많은 텍스트들의 관계망에 던져 넣는 것이며, 해석이란 이들 관계를 추적하는 것이다.”(Graham Allen, Intertextuality)

 

따라서 예술작품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텍스트와 섞이고 관계를 갖는다. 텍스트는 독자였던 작가를 통하여, 또 작가와 공동의 제작자였던 독자를 통하여 짜지며 이 과정에서 아버지든, 교회나 국가든 개인적, 무의식적,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구조의 영향력이 스며든다. 때문에 텍스트는 독자의 지식이 깊어짐에 따라, 여러 독자가 간섭함에 따라, 독자가 접하였던 텍스트에 따라 끊임없이 변전하는 상태, (날줄과 씨줄이 만나 올을 만들고 올이 모여 직물을 이루듯) 영원한 텍스처(직물짜기, texture)이다.(Julia Kristeva, Revolution in Poetic Language )

 

이처럼 상호텍스트성의 개념은 텍스트를 내적으로 의미를 갖는 구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차이에 따라 드러나고 의미를 끊임없이 연기되는 것으로 보는 것, 역사적인 것, 내재적 시간이 아니라 이질적인 일시성에 의하여 꼴을 짓게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작품만을 실체로 보거나 읽지 말고 관계들을 보자. 텍스트는 우리 앞에 나타나고 존재하는 현전의 구조가 아니다. 수많은 다른 텍스트. 다른 작가와 독자들이 모사되고 흔적으로 겹쳐있는 것이며 다른 텍스트들의 반복과 변형에 의하여 꼴을 짓고 의미를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우리 민족의 드라마라 할 『춘향전』 텍스트엔 기존의 설화와 역사적 사실이 모사되고 흔적으로 틈입되어 있다. “홍길동-2008, 홍길동-1980, 홍길동-후배, 홍길동-아내”가 다르듯, 『춘향전』도 당시 유행한 염정소설과 연관시키면 “춘향의 지절(志節)을 통한 사랑의 승리”이지만, 『홍길동』과 관련시켜 읽으면 “천민 신분의 춘향이가 반가의 도령과 결혼하여 그의 자식이 임금 아래 만인의 우두머리인 정승이 되는, 신분을 초월한 인간 해방의 승리”이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출처 법보신문 956호 [2008-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