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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사 비로자나여래좌상. 현존 비로자나불 석상 가운데 최고(最古)로 손꼽히지만 무엇과 비교하느냐에 따라 평가와 이해는 현저하게 달라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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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이든, 불탑이든, 선시든 내 눈 앞에 존재하는 저 텍스트는 실체가 아니다. 눈 앞에 보이고 존재하는 현전(現前, pre′sence)과 보이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부재(不在)의 관계 또한 대립적이 아니라 차이적이다. 누구인가가 몹시 그리운 것을 두고 한국인은 “눈에 밟힌다.”라고 표현한다. ‘눈에 밟힘’은 어떤 대상이 없어서 몹시도 그리워 환상으로 만들어진 대상이 구체성을 띠고 나타났다가 눈에 밟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났다가는 사라지는 반복이 끊임없이 되풀이될 때 사용하는 말이다.
‘눈에 밟힘’은, 일심(一心)이 있는 것이면서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면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면서 보이지 않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것이면서 보이는 것이다. 없어서 그리우면 눈에 선한 법이다. 님을 그리워하여 떠올리면 눈에 선하여 마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타나는 순간 님의 부재를 더욱 실감한다. 부재가 눈앞에 현전을 드러내며, 눈에 선해지는 현전은 부재를 인식시킨다.
존재하는 텍스트는 실체 아니다
이렇게 양자가 불일불이의 관계로 만나면 눈에 밟히게 된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밟힌다”라는 표현이다. 눈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형체가 없는 것인데 “밟힌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밟힌다는 것은 “낙엽을 밟는다”처럼 구체적 사물을 발로 디딜 때에나 활용하는 낱말이다. 추상이 쌓이고 쌓여 눈에 밟힐 정도로 구체로 전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밟히는 순간 구체는 사라지고 추상, 이미지만 남는다.
이렇게 부재와 현전, 만남과 헤어짐, 추상과 구체가 하나로 아우러진다. 추상의 한 관념에 구체적 형상을 입혀 추상이 공화(空華)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 관념이 왜곡을 낳는 것을 막으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한다. 형이상학적인 것을 형이하학적인 것으로 드러내면서도 형이상학이 갖고 있는 보편성과 깊이를 해치지 않는다. “눈에 밟힌다.”라는 말의 예를 통해 “‘현전의 순간’이란 실제로는 부재와의 차이의 관계(differential relation)로부터 산출된다.……현전은 오직 동일성 내부의 다른 것, 즉 타자성(alterity)에 의존함으로써만 스스로 존재한다.”(Michael Ryan, Marxism and Deconstruction-A Critical Articulation) 라는 말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고, 지금 첨단을 달리는 서양의 인문학인 차이, 또는 타자성의 철학이 얼마나 불교와 가까운 지도 유추할 수 있다.
지금 현전하는 것이 스스로 본질을 드러내거나 의미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명박 대통령을 전두환 다음으로 몹시 싫어한다.”라는 문장에서, 흔히 생각하듯, ‘이명박’의 가치와 의미는 이 문장 안에 현전하지 않는다. ‘이명박’은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 가운데 선택된 것이며, 부재한 이들을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 이명박의 가치가 비로소 드러난다. 부재한 ‘이승만’을 드러내면 ‘이명박’은 “같은 독재자이지만 국민의 저항을 받았을 때 스스로 하야할 줄 아는 미덕을 갖추지 못해 수백 만 명이 수십일 동안 시위를 해도 꼼수만 부리는 대통령”이란 가치가 나타나며, ‘박정희’와 차이에선 “60년대엔 조국의 근대화가 어느 정도 필요했지만 디지털시대에서 대운하 등 아날로그적 산업화를 독선적으로 추구하는 대통령”이란 가치가, “‘김영삼’과 차이에선 “무능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수시로 너무도 쉽게 거짓말을 하여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잃은 대통령”이란 가치가, ‘김대중’과 관련해선 “경제를 살리라고 뽑아주었더니 오히려 망치는 대통령”으로, ‘노무현’과 관련해선 “기독교와 소수의 특권층의 이익 옹호에만 집착하는 대통령”이란 가치가 드러난다. 이처럼 현전한 ‘이명박’의 가치와 의미는 부재한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보이지 않는 것이 지금 보이는 것의 의미와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문장보다 훨씬 길고 복잡한 텍스트 차원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석남사 비로자나여래좌상을 대하고 있다고 치자. 그 순간 현전 텍스트는 비로자나 불상이지만, 부재텍스트는 도피안사의 비로자나여래좌상을 비롯한 수많은 비로자나 불상, 『화엄경』, 『대일여래경』 등이다. 부재텍스트를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저 불상의 가치와 의미는 달라진다.
무엇과 무엇을 비교할 것인가
도피안사의 비로자나여래좌상을 부재텍스트로 하면, 석남사의 불상은 복련과 앙련이 겹으로 수려하게 핀 삼중의 연좌대 위에 지권인을 하고서 기품 있게 앉은 구도와 화려한 문양의 광배, 위엄이 있으면서 친근한 상호, 통견의 촘촘한 옷 주름의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상호는 눈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고 눈썹 또한 수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며 코도 흐르는 선이 미려하지 않다. 입은 다문 형세다. 전반적으로 위엄이 있지만 인도인의 형상이라기보다 신라인의 얼굴에 가깝다. 광배엔 화불과 문양이 아름답고 불꽃이 하늘을 향해 타오르고 있다. 무릎을 중간에서 그 밑으로 잘라 대좌에 비하여 조금 키가 낮아 보이지만, 가슴은 당당하고 풍만하다. 통견 위로 흘러내린 주름선이 자연스럽다. 겹연꽃무늬의 연꽃이 활짝 핀 상대석과 쌍연꽃무늬로 아로새긴 하대석이 장중하고, 원래의 무릎을 상상으로 복원시키면 대좌와 몸, 다리, 얼굴, 광배의 비율이 적당하다.
불상을 보는 순간 부재텍스트로 『화엄경』을 떠올리면, 전체 불상의 모습, 특히 지권인을 보며, “저것은 불상이 아니다.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이며 우주 만물이 서로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화엄의 진리 그 자체이다.”라는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대일여래경』을 부재텍스트로 삼으면, 전반적으로 통견과 신체에 밀착된 대의(大衣) 등 굽타 양식에 가깝지만 신라인의 얼굴을 한 상호를 주목하게 된다. 그를 보며 “저 불상은 내세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부모로부터 받은 현신(現身)을 가지고 곧 바로 대일여래(大日如來)가 되고자 한 신라인의 즉신성불(卽身成佛) 사상의 구현이다.”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당대 신라인들은 굽타 양식의 불상을 수용하되, 창의성을 발휘하여 상호만큼은 신라인의 모습으로 변형시키고 화려한 문양을 한 광배를 달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손으로 지권인을 하도록 형상화한 것이다. 한국의 관료를 부재텍스트로 간주하면, “강우방 선생의 『한국불교조각의 흐름』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한국의 비로자나 석불이 9세기경 중엽부터 유행한다는 통념을 깬, 766년에 조성된 비로자나 석불상인데, 어찌 운반의 편의를 위하여 무릎 하단부를 자를 수 있단 말인가?”라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며 행정편의주의에 희생된 수많은 불상과 유물유적이 부재텍스트로 의식의 표면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한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와 깊은 연관 속에 있으며 다른 텍스트와 ‘차이’를 통하여 의미를 드러낸다.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 구조의 반복과 변형, 모사와 굴절에 의해 형성된다. 이제 이해의 편의상, 석남사 불상을 ‘현전 텍스트’로, 화엄경을 ‘부재 텍스트’로 간주하고, 원효의 불일불이론의 씨와 열매를 현전텍스트와 부재텍스트로 대체한 글을 읽어보자.
텍스트는 스스로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으나 다른 텍스트와 ‘차이’를 통하여 의미를 갖는다. 현전 텍스트(석남사불상)와 부재 텍스트(화엄경)는 별개의 텍스트이므로 하나가 아니다[不一]. 그러나 현전 텍스트는 부재 텍스트와 관계를 통하여 비로소 의미를 드러내고 부재 텍스트는 현전 텍스트를 통하여 재현되니 양자가 둘도 아니다. 부재 텍스트는 현전 텍스트에 흔적으로 남아 있고, 이 흔적을 찾아낼 때마다 현전 텍스트의 의미는 달라진다. 그래서 “텍스트는 현전의 구조가 아니라 흔적과 타자성의 찾기의 구조이다.”(John Frow, “Intertextuality and ontology”) 부재 텍스트는 현전 텍스트를 제한하는 동시에 현전 텍스트를 통해 재현된다. 부재 텍스트는 그 텍스트의 전제 조건인 동시에 계기이다.
부재 텍스트는 현전 텍스트 없이 존재하지 못하므로 공(空)하고, 현전 텍스트 또한 부재 텍스트 없이 존재하지 못하므로 이 또한 공하다. 그러나 씨가 죽어 싹이 돋고 줄기가 나고 가지가 자라 꽃이 피면 열매를 맺듯, 부재 텍스트가 흔적을 남긴 채 사라지는 순간 현전 텍스트가 드러난다. 열매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지만 땅에 떨어져 썩으면 씨를 내듯, 현전 텍스트가 자신을 소멸시키는 순간 부재 텍스트가 재현된다.
이처럼 텍스트는 자족적 실체가 아니다. 다른 텍스트와 관계 속에서, 자신의 텍스트를 숨기려는 순간 다른 텍스트가 드러난다. 씨는 스스로 공하나 썩어 열매를 맺는 것처럼, 부재 텍스트가 없으면 현전 텍스트가 없으며 부재 텍스트가 사라지는 순간 현전 텍스트가 드러나고 현전 텍스트가 사라지는 순간 부재 텍스트가 드러난다. 열매일 때는 씨가 없듯, 현전 텍스트가 독자와 만나 실현될 때 부재 텍스트는 현전 텍스트 속으로 사라진다.
씨는 공하나 열매를 맺 듯
씨일 때는 열매가 없듯 부재 텍스트가 드러나는 순간 현전 텍스트는 사라진다. 홀로는 의미를 드러내지 못하고 재현되는 순간 사라져버리니 존재한다 할 수 없으며, 다른 텍스트와 관계 속에서 의미를 드러내고 다른 텍스트가 사라지는 순간 한 텍스트가 드러나니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어느 한 편의 극단의 해석, 어느 텍스트만의 의미에 치우쳐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한 텍스트와 다른 텍스트 사이에서 의미가 드러나니 한 텍스트를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한 편에 치우친 해석을 지양한다고 해서 한 텍스트와 다른 텍스트의 의미를 절충하여 중간의 해석을 하는 것 또한 아니다. 상호텍스성의 해석은 두 텍스트 사이에서 진동한다. 때문에 한 텍스트에 대해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말할 수 없다.
이처럼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와 관계와 차이, 때로 심층구조를 정밀하게 분석해야 드러나는 흔적으로 남아 있는 수많은 부재한 텍스트와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현전 텍스트와 끊임없는 상호 관계의 망 안에서, ‘찰나의 순간에’ 텍스트로서 가치와 의미를 갖는 것이다. 우리 눈 앞에 보이는 실체를 넘어 타자들, 다른 텍스트들과 사이, 관계, 차이를 읽을 때 진정으로 ‘불교답게’ 텍스트를 읽는 것이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법보신문 958호 [2008-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