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불교와 인문과학

실체는 허상이니 관계를 본다 중

slowdream 2008. 7. 18. 11:43

숲 이용한 치수, 상생 강조한 ‘화쟁’의 상징

 

 

 

20. 실체는 허상이니 관계를 본다 중
기사등록일 [2008년 07월 15일 화요일]
 
 

지리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상림은 신라시대 최치원이 조성한 세계 최초의 인공림이다. 물길을 트고 숲을 조성해 홍수를 막은 이 치수법은 우리 민족이 지녔던 화쟁 사상의 단면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상호텍스트성 이론은 실증주의 비평, 역사주의 비평 등 실체론에서 비롯된 비평에 사망선고를 내리고 작품과 텍스트를 읽는 새로운 지평을 펼치고 있다. 원래 관계의 사유를 하는 우리나라 학자가 이 이론을 세상에 처음 펴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지금까지도 한국에 이 이론이 본격적으로 수용되거나 적용되지 않고 있다. 문예지에 단편적으로 소개된 것이 고작이다. 지금 서양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가 한창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고 실망할 것은 없다. 필자가 보기에 이 이론은 정점에서 만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근본적인 원인은 실체론이 서양 학자들의 무의식까지 지배하고 있는 탓이다. 그들은 관계의 사유로 텍스트를 읽는 데 아직 미숙하다. 그렇다면 완전히 실체중심주의에서 벗어난 불교의 연기론을 적용하면 이 이론은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도약하지 않을까.

 

원효의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론을 응용하면 상호텍스트성 이론을 좀 더 입체적인 관계 읽기로 한 단계 향상시킬 수 있다. 원효는 화엄연기론의 한 개념인 불일이불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하나도 둘도 아닌 ‘열매와 씨’

 

“열매와 씨가 하나가 아니니 그 모양이 같지 않기 때문이요, 그러나 다르지도 않으니 씨를 떠나서는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또 씨와 열매는 단절된 것도 아니니 열매가 이어져서 씨가 생기기 때문이요, 그러나 늘 같음도 아니니 열매가 생기면 씨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씨는 열매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니 열매일 때는 씨가 없기 때문이요, 열매는 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씨일 때는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기 때문에 생(生)하는 것이 아니요, 늘 같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멸(滅)하는 것이 아니다. 멸하지 않으므로 없다고 말할 수 없고, 생하지 않으므로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두 변을 멀리 떠났으므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가운데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므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할 수 없다.”(원효, 『금강삼매경론』)

 

씨는 스스로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으나 열매와의 “차이”를 통하여 의미를 갖는다. 씨와 열매는 별개의 사물이므로 하나가 아니다[不一]. 사과 씨에서는 사과를 맺고 배의 씨에서는 배가 나오듯, 씨의 유전자가 열매의 거의 모든 성질을 결정하고 열매는 또 자신의 유전자를 씨에 남기니 양자가 둘도 아니다[不二]. 씨는 열매 없이 존재하지 못하므로 공(空)하고, 열매 또한 씨 없이 존재하지 못하므로 이 또한 공하다. 그러나 씨가 자신을 땅에 던져 소멸시키면, 싹이 돋고 줄기가 나고 가지가 자라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다. 열매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지만 땅에 떨어져 썩으면 씨를 낸다. 씨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면 씨는 썩어 없어지지만, 씨가 자신을 공하다고 하여 자신을 흙에 던지면 그것은 싹과 잎과 열매로 변한다. 이렇게 하여 공(空)이 생멸변화(生滅變化)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세계는 홀로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지만 자신을 공하다고 하여 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씨는 스스로 공하나 썩어 열매를 맺는 것처럼, 이것이 없으니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니 이것이 있다. 또 씨가 있어 열매를 맺고 열매가 있으니 씨가 나오는 것처럼, 이것이 있으므로 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해서 이것이 있다. 열매일 때는 씨가 없으므로 씨는 열매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씨일 때는 열매가 없으니 열매는 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으므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고 늘 같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으므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멸하지 않으므로 존재하지 않는다 할 수 없고, 나지 않으므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중부정을 통해 공한 것이 공한 것이기에[空空] 오히려 존재를 긍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졸저, 『화쟁기호학-이론과 실제』)

 

홍수를 막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댐을 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물이 흐르는 대로 물길을 터주는 것이다. 서양은 전자의 방식을 선택하였다. 근본적으로 실체론과 이분법의 사유 때문이다. 서양 사회는 인간과 자연을 실체로 간주하고 양자 사이에 이항대립 관계를 설정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한 쪽에 우월한 권력을 부여한다. 남자와 여자의 이항대립관계에서 가부장제도는 남자에게 우월한 권력을 부여한다. 이 경우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이 정당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처럼,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권력이 인간에게 주어졌으므로 인간이 자신의 의도대로 자연을 부리는 일이 정당성을 갖는다. 서양은 이에 따라 댐을 쌓듯 인간 주체가 자연에 도전하여 자연을 개발하고 착취하는 것을 문명이라 하였고, 이것으로 그들은 17세기 이후 자연과 서양 이외의 지구촌 사회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댐은 물의 흐름을 방해하여 물을 썩게 하고 결국 거기에 깃들여 사는 수많은 생물을 죽이고 심지어는 주변의 기후를 변화시키고 지진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렇듯 이항대립에 바탕을 둔 서양의 패러다임이 바로,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를 비롯하여 소외의 심화, 공동체의 해체 등 거의 모든 현대성(modernity)의 위기를 낳는 근본 동인이다.

 

댐 대신 나무 심은 최치원

 

댐을 쌓는 것이 실체론과 이분법에서 비롯된 현대, 혹은 서양의 패러다임에서 비롯된 대안이라면, 물길을 터서 물을 흐르게 하고 나무를 심는 것은 화쟁의 불일불이(不一不二)의 패러다임에서 비롯된 대안이다. 화쟁의 패러다임을 가졌던 최치원은 홍수를 막기 위하여 둑을 쌓는 대신 물길을 트고 숲을 조성하였다. 지금도 지리산 자락의 함양군 함양읍 대덕동에 가면 낙엽활엽수림으로선 유일하게 천연기념물(제154호)로 지정된 상림(上林)이란 숲이 있다.

 

1,100년 전 신라 진성왕(887년~896년) 때 고운 최치원이 이곳의 태수로 부임하였다. 이 마을의 가장 큰 문제는 위천이 해마다 넘쳐 홍수를 일으켜 논과 밭을 삼키고 사람도 죽게 한다는 것이었다. 최치원은 둑을 쌓는 대신 위천을 따라 숲을 조성하였다. 이 숲이 바로 상림이다. 흔히 광릉을 세계 최초의 인공림으로 알고 있지만 그보다 600여년 이상 앞선 9세기 경에 조성한 세계 최초의 인공림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숲이 바로 상림이다. 하림(下林)이 사라져 그때 숲이 반도 안 남았지만, 지금도 폭 200~300미터, 길이 2킬로미터에 걸쳐 200년 된 갈참나무를 비롯하여 114종, 2만여 그루의 활엽수목이 원시림과 같은 깊은 숲을 이루고 있다.

 

댐은 물을 썩게 하고 생명들을 죽이지만 숲은 빗물을 품었다가 정화한 다음 서서히 내보낸다. 사람이 걸어다녀 다져진 토양은 시간당 10밀리의 비를 품는 반면에, 잘 가꾼 숲은 시간당 200밀리 이상의 강우를 가둔다. 최치원은 왜 활엽수만 심었을까? 임업연구원이 광릉수목원에서 실험하였더니 활엽수 천연림은 사방공사를 한 침엽수와 활엽수가 섞인 숲에 비하여 우기에는 헥타아르 당 28.4톤의 물을 머금고 반대로 건기에는 2.5톤의 물을 더 흘려보내는 것으로 밝혀졌다. 고인 물은 썩지만, 흐르는 물은 산소를 머금고 이온 작용으로 자연 정화를 하며 온갖 생명들을 품는다.

 

씨와 열매의 관계처럼, 물은 자신을 소멸시켜 나무의 양분이 되어 나무를 이루고, 나무는 뿌리로 흙 사이에 많은 구멍을 만들어 물을 넉넉히 품어 준다. 이렇게 하여 상림은 천 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위천의 홍수를 막으면서도 물을 맑게 유지할 수 있었다. 이처럼 불일불이론은 우열이 아니라 차이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고, 투쟁과 모순이 아니라 자신을 소멸시켜 타자를 이루게 하는 상생의 사유체계이다. 서구의 이항대립의 철학이 댐을 쌓아 물과 생명을 죽이는 원리를 이룬다면, 불일불이는 그 댐을 부수고 물이 흐르는 대로 흐르며 물은 나무를 살게 하고 나무는 물을 품는 원리이다.

 

상생의 사유체계 ‘불일불이’

 

불일불이론과 반대로, 서양의 형이상학에서 현전(現前, pre′sence)이란 실체로서 지금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들은 의식에 ‘현재’라는 특권을 부여한다. 현전은 존재의 근원적인 의미가 ‘바로 이 순간에’ 의식 속에 드러나는 것이다. 서양의 형이상학은 말을 ‘지금 여기에서’ 현전의 방식으로 내면의 진실을 직접 전달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내면의 의식에서 나오는 음성은 본질직관이 청각기관을 통한 것이며, 세계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은 바로 이성이다. 때문에 말중심주의(phono-centrism)의 바탕에는 이성중심주의(logo-centrism)가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근원적인 시간의 지평에 놓일 수 없다. 말 역시 텍스트의 이차 형식이다. “언어에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F. Saussure: Course in General Linguistics. ) 앞 장에서 말했듯, 나무가 스스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풀’과 관계, 혹은 차이를 통하여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라는 의미를 드러낸다.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말이나 소리가 아니라 문자가 지닌 차이다.


인용하였던 원효의 불일불이론 관련 글에서 ‘씨와 열매’를 ‘부재 텍스트와 현전 텍스트’로 대체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할 수 있다.

 

“부재 텍스트와 현전 텍스트는 하나가 아니니, 쓰여진 것이 같지 않기 때문이요, 그러나 다르지도 않으니, 부재 텍스트를 떠나서는 현전 텍스트가 없기 때문이다. 또 부재 텍스트와 현전 텍스트는 단절된 것도 아니니, 현전 텍스트가 이어져서 부재 텍스트가 생기기 때문이요, 그러나 늘 같음도 아니니, 현전 텍스트가 드러나면 부재 텍스트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부재 텍스트는 현전 텍스트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니, 현전 텍스트일 때는 부재한 텍스트가 없기 때문이요, 현전 텍스트는 부재 텍스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부재 텍스트일 때는 현전 텍스트가 없기 때문이다.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기 때문에 생(生)하는 것이 아니요, 늘 같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멸(滅)하는 것이 아니다. 멸하지 않으므로 없다고 말할 수 없고, 생하지 않으므로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두 변을 멀리 떠났으므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가운데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므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할 수 없다.”

 

이도음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법보신문 957호 [2008-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