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불교와 인문과학

동일성의 미학에서 눈부처의 미학으로

slowdream 2008. 7. 31. 14:24

22. 동일성의 미학에서 눈부처의 미학으로

 

‘너’에 대한 배척이 대학살의 悲史 잉태
기사등록일 [2008년 07월 29일 화요일]
 
캄보디아 대학살의 주인공 폴포트는 ‘지적이며 따스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도시적인 것과 부르조아지적인 것’을 ‘타자’로 설정한 그의 실수는 170만명 학살이라는 비극을 불렀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일러 ‘나’라고 하는가. 학생들에게 너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대개 자기의 모습에서 시작하여 자신의 성격과 능력에 대해 말한다. 동료, 아니면 일반 사람들과 다른 자신만의 무엇을 내세운다. 남을 말하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눈은 작지만 코가 오뚝하고요. 키는 175센티고요, 수학은 못하는데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하고, 불의를 보면 못 참지만 사랑하는 이에게는 따뜻하고 부드러워요.” 한국인에 대해 물으면 대개, “피부는 다소 노란 빛이 도는 살색이고, 눈은 작은 편이고 키와 코는 중간 정도고요, 은근하고 끈기가 있고, 머리가 좋고 성격은 좀 급한 편인데 공동체를 향한 열망이 강하고 신바람이 나면 가진 능력 이상의 저력을 발휘해요. 강대국에 대해 콤플렉스가 있는 반면에 5천 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자부심이 무척 강하죠.”라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 백인, 중국인, 일본인들을 ‘타자’로 설정하고 그들과 구분되는 무엇으로 한민족의 동일성을 형성한다.

 

작품을 비평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선 작가는 다른 작가와 다른 무엇, 곧 동일성을 가진 존재다. 작품 또한 다른 작품과 구분되는 독특한 무엇이다. 독창성이 없다는 것은 그 작품이 삼류라는 것과 동의어다. 비평과 감상이란 그 작품만이 갖고 있는 고유의 가치와 의미와 아름다움을 읽고 평가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착각이든 망상이든, 동일성을 형성하여 생각하고 행동한다. 내가 남과 다른 존재이고 한민족이 일본인과 다르다고 여기는 것처럼, 동일성이 당연한 것일 뿐만 아니라 정당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20세기가 전쟁과 학살의 세기가 된 근본요인이 바로 동일성 때문이라고 한다면 몇 명이나 동의할까.


이라크전에서 보듯 전쟁의 근본원인은 석유 때문이다. 20세기의 전쟁과 학살은 자원을 확보하고 시장을 확대하기 위한 욕망이 부른 것이다. 하지만, 이라크에 백인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이 기독교를 믿었어도 미국은 민간인에게 폭격을 하고 핵폭탄과 다름없는 모아브를 마구 투하하였을까?

 

유학 시절에 폴 포트(Pol Pot)를 만난 프랑스의 지성들은 그가 아주 온화하고 지적이며 상대방을 설득하는 능력이 뛰어나면서도 겸손하고 따스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캄보디아 인구의 1/4에 달하는 170만 명을 킬링필드로 보냈을까? 이상주의자였던 그의 뜻만큼은 숭고하였다. 캄보디아 농촌을 보고서 그는 캄보디아 전체를 농촌처럼 서로 사랑하고 연대하며 순박한 인심을 가진 공동체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동일성으로 하여 ‘도시적인 것과 부르조아지적인 것’을 타자로 설정하는 실수를 범하였다. 그는 이를 철저히 배제하고서 절대 순수한 농촌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는 도시와 시장, 학교를 없애버리고 안경을 낀 사람도 ‘도시스러움’을 갖고 있다고 처형할 정도로 타자에 대해 폭력을 가하여 농촌공동체의 동일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같지 않은 것’에 대한 폭력

 

월남전에 참전한 군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전투가 끝난 뒤 첫날밤 보초를 서는데 베트콩이나 월맹 정규군 시체는 수 백 구가 널브러져 있어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한다. 그런데 다음 날 순찰을 돌다가 그 중 한 구의 시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안 다음 날 밤엔 무서워서 보초를 서는 내내 벌벌 떨었다고 한다. 남미 원주민 아이의 다리를 쥐고 머리를 바위에 부딪쳐 몇 번에 죽나 시험하던 스페인의 군인들, 대검으로 임산부의 배를 갈라 살아서 꿈틀거리는 태아를 불 속에 던져버리던 난징 대학살 때의 일본 군인들, 베트남 여인을 윤간하고서 화염방사기로 태워 죽이던 미군들, 그 모습만 보면 이들은 악마의 화신이다. 하지만, 그들도 첫사랑에 온밤을 설렘으로 지새우고 키우던 강아지의 죽음에 눈물을 훔치던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다만 “저들은 우리 편이 아니야. 저들이 사라져야 우리가 잘 살 수 있어.”라는 식의 배제 담론과 이로 형성된 이데올로기가 그들을 그렇게 악마로 바꾸어버렸던 것이다. 나치즘의 유대인 대학살과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 스탈린시대의 수용소군도, 미군의 밀라이 대학살, 폴포트의 킬링필드, 유고의 인종 청소, 부시의 이라크전과 라덴의 9.11테러 모두 “너는 우리 편이 아니다.”라는 배제 담론의 소산이다. 오사마 빈라덴과 부시의 연설문을 읽으면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자신의 편에 가담하지 않는 자는 악이고 이를 지구상에서 영원히 구축해야 한다는. 그들은 같은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조차 근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적으로 간주하고 저주를 퍼붓고 공격을 한다.

 

이처럼 동일성의 사유는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을 행사한다. 동일성이 형성되는 순간 세계는 동일성의 영토로 들어온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나뉜다. 동일성은 자기 바깥의 것들을 모두 타자로 간주하고 이를 자신과 구분하고 대립시키면서 동일성을 강화한다. 이를 통해 동일성은 자신과 다른 것을 물리치고 이에 폭력을 가하여 없애고 동일성을 더욱 확보하려 한다. 이에 머물지 않고 ‘차이’를 포섭하여 이를 없애거나 없는 것처럼 꾸민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외친 이후 서양 철학은 오랜 동안 주체중심의 사고, 동일성의 사유를 하였으며 예술을 읽고 비평하는 방식도 철저히 이를 따랐다. 이에 맞서 데리다는 동일성에 바탕을 둔 서양 철학 전반을 해체한다. 사물의 의미는 그 실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다른 사물의 차이 사이에 있다. “자의성(arbitrariness)은 기호의 체계의 충만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요소들 사이의 차이에 의하여 구성될 때만 일어나는 것이다.”(Jacques. Derrida: Speech and Phenomena and Other Essays on Husserl’s Theory of Sign)

 

 들뢰즈는 이를 더 심오하게 발전시킨다. “개념 안의 동일성, 술어 안의 대립, 판단 안의 유비, 지각 안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한 개념적 차이는 결국 동일성으로 환원한다.”(Gille Deleuze: Difference and Repetition) 때문에 그는 어떤 방식으로도 동일성으로 귀환하지 않는, 개념이나 이성이 아니라 감성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차이 그 자체’에 주목한다. 원효는 이미 8세기에 이와 상당히 유사한 논의를 하였다. 그는 연기(緣起)와 공(空)을 바탕으로 차이의 철학인 변동어이(辨同於異)론을 편다.

 

“같다는 것은 다름에서 같음을 분별한 것이요, 다르다는 것은 같음에서 다름을 밝힌 것이다. 같음에서 다름을 밝힌다 하지만 그것은 같음을 나누어 다름을 만드는 것이 아니요, 다름에서 같음을 분별한다 하지만 그것은 다름을 녹여 없애고 같음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같음은 다름을 없애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같음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다름은 같음을 나눈 것이 아니기에 이를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단지 다르다고만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들이 같다고 말할 수 있고, 같다고만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들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원효, 『금강삼매경론』)

 

원효의 말대로 동일성이란 것은 타자성에서 동일성을 갖는 것을 분별한 것이요, 타자성이란 것은 동일성에서 다름을 밝힌 것이다. 동일성은 타자를 파괴하고 자신을 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동일성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타자성은 동일성을 해체하여 이룬 것이 아니기에 이를 타자라고 말할 수 없다. 주(主)와 객(客), 현상과 본질은 세계의 다른 두 측면이 아니라 본래 하나이며 차이와 관계를 통하여 드러난다. 주체에는 이미 타자가 들어와 있고 타자엔 주체가 스며있다. 화쟁은 주와 객, 주체와 타자를 대립시키지도 분별시키지도 않는다. 양자를 융합하되 하나로 만들지도 않는다.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중간도 아니다. 주와 객, 주체와 타자가 서로를 비춰주어 서로를 드러내므로 스스로의 본질은 없고 다른 것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것과 차이를 갖기에 진리다.

 

“융합하되 하나로 만들지 않는다”

 

변동어이의 차이, 곧 역동적이고 생성하는 차이는 개념적인 차이와 다르다. 내가 동남아 노동자를 차별하고 멸시하는 것이 동일성의 사유와 실천이라면, 그들을 한국인과 똑같이 존엄한 존재로 포용하고 똘레랑스로 대하는 것은 차이의 사유와 실천이다. 하지만 이것이 변동어이의 차이, 혹은 차이 그 자체는 아니다. 개념적 차이일 뿐이다. 그들에게서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 죽은 내 형, 서독에 간호사로 가서 의사에게 강간당하고 자살한 내 누이, 미국에서 아무 죄 없이 백인 경찰에게 부당함을 호소하다 사살당한 내 삼촌을 발견할 때, 나에게서 일하다가 손가락을 잘리고 다리가 절단되자 불법체류 외국인으로 신고하여 한 푼도 보상하지 않고 추방한 한국 기업주의 모습을 확인할 때 그 차이에 이르는 것이다.


한 이스라엘인이 자신과 다른 팔레스타인의 문화를 인정하고 그들을 차별하지 않고 유대인과 똑같이 관용으로 대하는 것은 개념적 차이를 인식한 데서 오는 것이다.  하지만 연극 ‘Plonter’의 배우와 스텝들은 개념적 차이에 바탕을 둔 관용이 얼마나 허술하고 관념적인지 절감하였다. 이 연극은 자살폭탄 테러로 남편을 잃은 이스라엘 여인과 이스라엘 군인의 총에 아들을 잃은 팔레스타인 여인을 중심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과 화해를 다룬 것이다. 이 연극에서 5명의 이스라엘인 배우가 팔레스타인 역을, 4명의 팔레스타인 배우가 이스라엘인 역을 연기하였다. 이제까지 상대방을 관용으로 대했던 그들도 서로 역할을 바꾸어 연기를 하면서 처음엔 서로 소리를 지르고 울부짖으며 싸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들은 7개월의 공동 작업을 통해 내 안의 타자, 상대방의 눈부처를 발견하고서 서로를 진정 이해하고 포용하게 되었고 결국 연극을 완성하였다. 바로 이들 배우는 감성과 몸을 통해 변동어이의 차이를 깨달은 것이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법보신문 959호 [2008-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