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불교와 인문과학

위험한 국가주의

slowdream 2008. 8. 28. 19:26

위험한 국가주의
“개인과 시민을 국가의 부속품으로 동원하기 때문이다”


“혼자 드는 게 아니다. 4800만이 함께 드는 것이다.” 역도선수 장미란씨가 금메달을 딴 후에 방송된 어떤 광고에 나온 말이다. 애국심을 강조하는 수사이지만 한 편으로는 섬뜩하다. 한 개인의 영예를 나라 전체로 확대하는 이 논리에는 전체주의, 국가·국민주의가 깔려 있다. ‘국민영웅 박태환’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띤다. (하지만 그가 시상식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질 때 가슴에 손을 얹지 않고 꽃다발을 들고 있었던 것은 매우 신선한 모습이었다.) 국가들 간의 경쟁과 친선을 동시에 도모하는 것으로 알려진 올림픽은 국기 게양과 국가 연주를 통해 개인을 국가로 수렴하는 의식이 되어버렸다. 상업주의와 내통하면서 국가주의는 국민을 재생산하고 국민을 국가의 소유물로 고정시킨다. ‘국부’ ‘국모’ ‘국민교육헌장’ ‘국운’에서 시작하여 ‘국사’ ‘국어’ ‘국위 선양’ ‘국립’ ‘국민의례’ ‘국익’ ‘국기에 대한 맹세’ ‘애국조회’ 등은 여전히 한국에서 국가가 사회와 개인 위에 군림하는 제왕적 조직임을 드러낸다. 민주적 토대가 약할수록 국가는 강하고 사회는 국가에 지배된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 개인주의와 자유의 확대로 국가주의는 약화되고 있지만 여전히 그 힘과 정당성은 한국사회를 압도하고 있다.

한국에서 국가주의는 왜 이리 강할까? 그것은 무엇보다 식민지 35년의 경험을 통해 ‘나라 잃은 설움’을 처절히 깨달았고 분단체제 속에서 적대적 안보의식이 강화되면서 안보의 주체로 강력한 국가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안보 없이 국가 없고 국가 없이 국민 없다”는 구호는 이런 의미를 적확하게 담고 있다. (또한 자생적 부르주아가 취약해 산업화의 동력이 시민사회가 아니라 국가에서 나온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반공독재시대에도 민주화세력은 정부를 비판하고 바꾸려 했지 국가 자체를 의문시하지 못했다.

근대국가는 행정·입법·사법부, 경찰 및 군대(합법적 폭력의 독점), 그리고 공기업을 포괄하며 특정한 영토와 주민에 대해 지배력과 주권을 행사하는 조직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국가=나라=사회=국민=시민=대기업이라는 잘못된 등식이 자리잡고 있다. 재벌총수는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다는 이유로 집행유예를 받으며 양궁 선수들은 ‘국위 선양’을 한 자랑스러운 ‘국민’이 되고 만다. 국가가 구성원 개인의 행복과 안전을 위한 수단이며 국가와 시민의 관계는 ‘계약’적이라는 의식이 약하다. 국가는 초월적이고 신성하며 선험적이다.

이런 국가주의가 위험한 것은 무엇보다 사회의 개별적 구성원을 국가의 부속품 및 수단으로 동원하기 때문이다. ‘국가경쟁력’이라는 개념은 이미 개인과 시민을 집단의 구성요소로 대상화하는 적절한 예다. ‘국민학교’는 사라졌지만 ‘국민’은 건재하다. 그것은 개별적·집단적 정체성 위에 군림하는 국가적 정체성 및 귀속성을 암시한다. ‘국민’은 국가가 부과하는 동질적 정체성 및 의무를 정당화하면서 국가와 긴장관계를 갖는 사회의 시민의식, 독립적인 개인의식을 억압하고 약화한다. 개인들·집단들 간의 복잡하고 세심한 차이, 자유, 인권, 다양성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국가가 부과하는 규범과 표준은 여성, 장애인, 이주노동자, 양심적 병역거부자, 동성애자, 청소년 및 노인, 비정규직 노동자를 타자화하며 배제시킨다. 동시에 타민족 및 타국가는 ‘우리’가 아닌 ‘남’이 된다. 유사시에 이들 타자는 차별과 제노사이드(학살)의 근거가 된다.

국민국가의 틀을 벗어나려는 운동은 여성주의자, 생태주의자, 장애인에게서 선구적으로 나타난다. 이들에게는 성별, 환경, 장애 여부가 국민적 정체성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시장근본주의에 맞서 민족국가를 강화하는 게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부의 계급적·성별적 모순을 은폐하고 기득권 세력의 헤게모니를 되레 강화할 위험이 있다. 민주적 선거만으로는 국가의 본질적 성격이 바뀌지 않는다. 중단기적으로 국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여성화, 녹색화, 민주화, 복지화는 가능하고 필요하다.

국가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분권화와 협치(governance)를 발전시키고 다중적 정체성 및 이해관계를 인정하며 크고 작은 다양한 공동체들을 만들어내고 개인들의 차이와 밀실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다. 태극기가 난무했던 촛불집회는 기존의 국민·국가적 정체성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거기서 벗어나려는 소집단 및 개인의 다양한 몸부림을 보여주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권혁범|대전대 교수·정치학>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