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불교와 인문과학

이분법에서 퍼지의 미학으로 <상>

slowdream 2008. 9. 9. 04:49

버려야 할 ‘허위’ 속에도 취해야 할 ‘진리’ 있다
25. 이분법에서 퍼지의 미학으로 상
기사등록일 [2008년 09월 01일 월요일]
 
 
가을의 단풍을 무슨 색이라 해야 할까? 하나와 다른 하나만이 존재하는 이분법으로 세상을 본다면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 마저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날은 아직 덥지만 볼을 스치는 바람엔 가을 기운이 스며있다. 가을이 되면 이제 푸르던 잎들은 울긋불긋 다양한 빛으로 치장을 할 것이다. 우리 산야에 가장 흔한 참나무 나뭇잎을 두고, 어떤 이들은 노랗다 하고 어떤 이들은 갈색이라 한다. 같은 갈색이라도 짙은 갈색, 흐린 갈색, 노랑 빛이 도는 갈색, 흙색, 황토색 등으로 제각각이다. 갈색을 만 가지, 억 가지로 구분한다 하더라도 내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참나무의 낙엽의 빛깔을 제대로 지시하는 것일까?

 

인류 문명이 시작될 때 선인들은 같은 의문에 휩싸였다. 일군의 사람들은 우리 인간의 의식으로 그에 다다를 수 없으며,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일군의 사람들은 이를 둘로 나누면 쉽게 이해가 가능하고 사람들과 소통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스 사람들은 저 높이 끝도 없이 펼쳐진 것은 하늘이요,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곳은 땅, 어두우면 밤이요, 밝으면 낮이라 하였다. 그렇듯, 진리와 허위, 주와 객, 본질과 현상 등 세계를 둘로 나누고 보니 이는 이해가 가능한 것으로 다가왔고 그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도, 서로 의미를 소통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폭력적 서열 내포한 이분법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더욱 체계화하여 이분법적 모순율, 곧 ‘A or not-A’의 논리로 정리하였다. A가 아니면 나머지는 A가 아닌 것이어야 한다. 동일한 사물이 동일한 사물과 동시에 동일한 점에 속하면서 또한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즉 A이면서 A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후 서양의 거의 모든 철학과 예술은 이를 근본적인 원리로 삼았다. 이데아는 이데아이고 그림자는 그림자였고 주체는 주체요 대상은 대상이었지, 이데아인 동시에 그림자요 주체인 동시에 대상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미학과 예술론 또한 형식과 내용, 자율과 타율, 미와 추, 재현과 표현, 미메시스와 판타지 등으로 둘로 나누어 아름다움과 그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 정의하였다.

 

그러나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적 사유에는 하나가 다른 것보다도 우위를 차지하고 지배하는 폭력적 계층질서가 존재한다.”(Jacques Derrida, Positions) 이성중심주의에 바탕을 둔 서구의 형이상학은 정신/육체, 이성/광기, 주관/객관, 내면/외면, 본질/현상, 현존/표상, 진리/허위, 기의/기표, 확정/불확정, 말/글, 인간/자연, 남성/여성 등 이분법에 바탕을 둔 야만적 사유이자 전자에 우월성을 부여한 폭력적인 서열제도이며, 처음과 마지막에 “중심적 현존”을 가정하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20세기 인류사회의 모순의 근저에는 이항대립의 야만이 숨어 있다. 실존주의든 현상학이든, 서구의 현대 철학과 미학은 이항대립의 사유체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항대립의 사유체계 속에서 주체는 객체를 마음껏 해석하거나 변형시키면서 단지 주체를 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켰으며, 이성은 합리성의 이름으로 무지몽매함을 밝히는 대신 진리를 절대화하고 과학기술을 도구화하였고 감성과 욕망을 최대한으로 절제시키고 억압하였으며 스스로를 도구화하였다.

 

인간이 우위에 서서 그의 의지와 편리대로 마음껏 자연을 개발하는 것이 문명이었고, 제3세계는 문명인 서양에 의하여 교화되고 근대화하여야 하는 미개와 야만이었으며, 여성은 자연과 마찬가지로 남성에 의하여 끊임없이 개발되고 착취되어야 하는 대상이었다. 이런 사고의 소산으로 인류는 지금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 소외와 불안의 보편화와 심화, 구조적 갈등과 폭력의 강화, 따뜻한 공동체의 붕괴와 도덕적 타락, 위기의 일상화 등의 모순을 겪고 있다.

 

이에 대해 퍼지공학자들은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편다. 이들에 의할 때 실제 세계는 ‘A and not-A’이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면 답은 정확히 ‘Yes or No’로 갈리지 않는다. 물론 상당수가 손을 들었고 그에 못지않은 사람들이 손을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손을 들다가 만 사람, 손을 반쯤 들다 내린 사람이 꽤 존재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다. 사랑한다고 답한 이들도 100%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마음도 싫어하는 마음도 있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더 강하기에 사랑한다는 쪽에 손을 든 것이다. 싫어한다고 손을 든 이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실제 세계는 A가 아니면 not-A인 것이 아니다. ‘A and not-A’, 곧 퍼지(fuzzy)이다.

 

반대되는 것을 원융시키는 중도

 

의상의 화엄 사상이 귀일하는 곳은 불(佛)이며, 법의 중도(中道) 자리이다. “정(情)으로서 말하면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은 항상 양 변에 있다. 만약 이(理)로서 말하면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은 예로부터 중도이어서 어떤 분별도 없다. …… 중도는 이변을 융회하는 것이다. …… 중도의 뜻은 무분별(無分別)이란 뜻이다. 무분별한 법은 자성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끝없이 연(緣)을 따르니 또한 이도 머물지 않는다.”(『화엄일승법계도』)

 

의상은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도의 논리를 편다. 중도란 원래 연기에 바탕을 두고 공성(空性)을 드러내는 것이고 4구를 모두 부정해야 하지만, 이분법의 패러다임과 비교하면, 서로 반대되는 것이 서로를 이루어 하나로 원융하면서 법성을 드러낼 수 있음은 중도 때문이다.

 

왼 쪽에 나무에서 갓 따온 사과가 있다. 이를 베어 먹는다. 한 입에서부터 두 입, 세 입 베어먹기 시작하여 다 먹고 씨를 뱉었다. 왼 쪽 끝의 사과를 존재한다고 한다. 오른 쪽 끝의 사과를 부재(不在)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존재한다고 생각한 왼쪽 끝의 사과는 100% 온전한 사과인가? 과수원에서 바로 딴 사과라 하더라도 나무에서 따 가지고 오는 사이에 점점 닳고 있다. 다 먹고 씨를 뱉었을 때 사과는 완전히 사라졌는가? 우리는 과육을 먹었을 뿐이다. 씨와 껍질은 남아 있다. 우리는 사과를 손에 쥔 경우에 사과가 있다고 말하고 다 먹어버린 후에는 사과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과는 100%에서 0% ‘사이에’ 존재한다. 우리는 0과 1에 대하여 말하지만 진리는 그 사이에 있다. 바트 코스코의 말대로 “세계는 회색이지만 과학은 흑과 백이다.”( 바트 코스코, 『퍼지식 사고』) 실제 세계가 회색이니 세탁기, 진공 청소기, 카메라, 캠코더, 헬리콥터 등에 퍼지의 원리를 응용하였더니 기계의 오류를 줄이고 기계의 지능지수를 높일 수 있었다.

 

글을 읽고 있는 지금은 낮인가, 밤인가? 통상 밝으면 낮, 어두우면 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낮은 12시에서 0.00001초도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는 찰나에 스쳐간다. 정오에서 0.001초라도 지났으면 벌써 그만큼 밤이 진행된 것이며, 반대로 0.001초라도 모자랐다면 그만큼 낮이 덜 진행된 것이다. 밤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어느 것을 분별하여 둘로 나누는 것은 두 극단을 취할 때나 가능한 것이다. 지금은 낮인 동시에 밤이다.

 

낮은 스스로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공(空)하다. 밤이 있어서 낮이 있다. 밤을 견주면 낮이 드러나나 낮은 가명일 뿐이다. 밤이 있어 드러난 것이다. 절대 낮은 존재하지 않는다. 낮엔 이미 밤이 담겨 있다. 그러니 낮과 밤을 분별하지 않는다. 이것이 생하나 생을 일으키지 않고 머물지도 않는 중도의 원리 가운데 하나다.

 

원효는 따르는 동시에 따르지 않는 순이불순([順而不順)의 논리를 편다. “유(有)라는 견해에 동조하여 설법하면 공(空)이라는 견해와는 맞서며, 만일 공(空)이라는 집착에 동조하여 설법하면 이것은 유(有)라는 집착에 맞서는 것이니, 동조건 반대건 더욱 다툼만 조장하게 되는 것이다. 또 저 두 견해에 다 동조하면 그 안에서 스스로 모순을 일으켜 다투게 될 것이요, 만일 저 두 견해에 다 반대하면 그 두 견해와 다투게 될 것이다.

 

다 버릴 수도 다 취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동조도 말고 반대도 말고 설법하라는 것이다.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말대로 해석하자면 모두 다 허용하지 않는 것이요,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을 따라 말한다면 허용하지 않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반대하지 않기 때문에 그 정(情)에 어긋나지 않고, 동조하지 않기 때문에 도리에 어긋나지도 않는다. 정에 대해서나 도리에 대해서나 서로 어긋나지 않는 까닭에 ‘진여에 상응하는 설법을 한다는 것이다.”(『금강삼매경론』)


중관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가유(假有)라도 존재를 긍정하는 유식은 사물의 공성(空性)을 제대로 보지 못한 오류이며, 유식에서 바라보면 중관은 모든 것을 부정하기만 한다. 그렇듯, 각기 다른 견해로 맞설 때, 한 의견이 진리라는 이유로 이에 전적으로 동조하면 반대되는 의견에 담겨 있는 진리를 잃게 된다. 또 한 의견이 허위라는 이유로 이에 전적으로 반대하면 반대되는 의견에 담겨 있는 허위를 보지 못하게 된다. 또 두 견해를 모두 옳다고 하면 두 견해가 스스로 모순을 일으켜 다투며 두 견해에 있는 허위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된다. 반대로 두 견해가 모두 그르다고 하면 그 두 견해와 다투게 됨은 물론 두 견해에 담겨 있는 진리를 보지 못하게 된다. 모든 사람이 허위라 하는 것에도 일말의 진리가 담겨 있고 모두가 진리라고 하는 것에도 한 자락의 허위를 담고 있다.

 

그러니 올바로 진리를 전달하는 방법은 A and not-A, 즉 동조도 하지 않는 동시에 반대도 하지 않는 것이다. 전적으로 동조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에 담겨있는 허위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고 반대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에 담겨있는 진리를 잃지도 않는다. 반대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에 담긴 근본 취지와 목적을 어기는 것이 아니고 동조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의 허위를 솎아내고 그에 담긴 도리를 제대로 받아들여 견해의 근본 뜻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순이불순의 논법은 진정한 진리에 이르는 길이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출처 법보신문 963호 [2008-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