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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이나 이분법을 지양하고 중도를 추구하는 ‘사수’는 불교에만 있는 미학이다. 더러운 흙탕물 속에서 피어오른 연꽃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도 바로 이런 불교 미학의 산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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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분법의 분별심을 없애고 무유호추론도 넘어서서 진정 불교적으로 올바르게 읽을 수 있는 퍼지의 미학이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미와 추를 구분하는 것은 분별심이기에 망상이며, 미와 추는 각각 부처와 중생의 관계에 대응하기에 이를 분별하면 진속불이(眞俗不二)의 원리 - 곧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여서 모든 중생 속에 불성이 있어 중생이 수행과 정진을 하여 부처가 되고, 부처는 다시 중생이 되어 중생을 깨닫게 해야 진정 부처가 되는 - 와 맞선다.
미추는 분별이기에 망상심
가을 들판에서 한들거리는 들국화는 아름답다. 꽃잎이 꽃술과 조화를 이룬 모습과 노란 꽃잎이 파란 가을 하늘과 대조를 이룬 것을 보면 마음이 하뭇하다. 더 가까이 가서 코를 꽃송이에 박고 가슴 깊이 향기를 들이마시면 가을은 이미 몸이 된 기분이다. 숲을 스치고 지나는 산들바람 소리가 더해지면 금상첨화다. 어떤 이는 꽃잎을 하나 따선 맛보며 국화주라도 마신 양 눈을 감고 취한 표정을 짓고, 어떤 이는 꽃잎을 살갗에 문질러 보기도 한다. 그렇듯 눈으로, 코로, 혀로, 귀로, 살로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것이 색온(色蘊)이다.
색온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즐겁거나[樂受], 괴롭거나[苦受],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捨受] 세 단계이다. 낙수가 미적 쾌(快)라면 고수는 미적 불쾌일 것이며, 사수는 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상태다. 사수는 A or not-A가 아니라 퍼지의 A and not-A, 극단이나 이분법을 지양하고 이것과 저것의 중도(中道)를 추구하는 불가에만 있는 미학일 것이다. 국화꽃을 올바로 감상하는 것은 극단적으로 그를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나 추하다고 하는 것에서 떠나 아름답기도 한 동시에 추하기도 하다고 감상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마음이 즐겁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미와 추를 구분하여 본다. 하지만, 미추의 구분과 분별 또한 인간이 만든 망상일 뿐이다. 아름다움은 그 대상 스스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미학적 틀을 가지고 그리 생각하고 말하는 것뿐이다.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 지점에서 상대방은 추함을 느낄 수 있다. 내가 추하다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아름답다며 달려오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이영애, 고소영, 김태희, 한예슬 등을 아름답다 하지만, 뚱뚱한 것이 미라 여기는 사모아 사람들이나 입술이 10센티는 넘어야 미인이라는 아프리카 수르마족의 눈에는 추녀로 보이며, 어떤 가난한 청년 팬이 돈이 한 푼 없어 대신 따온 들꽃을 버리는 사람이라면 추할 뿐이며, 장자의 비유대로 풀벌레들은 그들을 괴물로 보고 도망을 간다.
찬불가를 들으면 마음이 평안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탄의 음악이라고 귀를 막고 달아나는 이도 있다. 전라남도 사람들이 자주 맛있게 먹는 홍어를 같은 한국인임에도 먹지 못하는 자들이 대다수다. 강아지풀로 살살 간질이면 흥분을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소름이 돋는 이들도 있다. 흔히 오감 가운데 후각만은 절대적이라 생각하지만, 미국의 한 연구소에서 유황과 인분과 생선 썩은 것 등등을 섞어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더러운 냄새를 만들어 각 민족에게 맡게 했더니 모두가 코를 막고 줄행랑을 놓았는데 한국인만 그러지 않더란다. 다른 민족에게 그 냄새는 다시는 맡아서는 안 될 고약한 악취였지만, 한국인에게는 고향과 어머니를 떠오르게 하는 푸근한 발효식품의 향기였다.
맹목적인 사랑에 빠진 이들은 ‘맹목(盲目)’이라는 말대로 상대방의 모든 점을 극단적으로 아름답게 여긴다. 그러다가 사랑이 식으면 상대방의 단점이 시나브로 사랑의 자리를 밀어내고 증오가 대신하게 한다. 빨이 더워지면 빨리 식는다는 말을 증명하듯,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진다. 진리가 1과 0 사이에 있듯, 참된 사랑 또한 그 사이에 있다. 다른 이들이 추하다고 하는 것을 아름답게 여길 줄 아는 이들에게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란 광고 문구는 이해가 되지 않는 텍스트이다.
올바른 인간관계란 A or- not-A가 아니라 A and not-A, 곧 상대방을 사랑하면서도 싫어하는 것이며, 상대방의 아름다운 점을 보면서도 추한 점도 동시에 보는 것이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틈에서 참을 읽는다
퍼지의 미학을 풀어서 말하면, 틈의 읽기와 참의 미학이다. 우리말에서 ‘틈’과 ‘참’은 시공간을 모두 아우르는 포스트모던적 개념이다. 틈은 공간적으로 벌어진 사이, 간격인 ‘space’와 일을 하다가 쉬게 되는 시간적인 겨를을 뜻하는 ‘spare’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틈의 읽기란 동일성이 빚은 이분법의 오류에서 벗어나 미와 추, 형식과 내용, 텍스트와 맥락, 작가와 독자, 이성과 감성, 주와 객의 양극단을 버리고 그 사이의 틈에서 끝없이 진동하는 가운데 숱한 의미를 창출하면서 독자에게 ‘세계의 틈’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말에서 ‘참’은 진리(truth)를 가리키는 동시에 길을 걷다가 쉬는 곳(rest)을 뜻한다. 독자는 읽기의 틈을 통해 세계의 참을 형성하고 참에 머물며 생각을 하고 상상을 하면서 참, 곧 진리에 다다른다.
주지하듯, 석굴암은 불교미의 정화다. 전에 소개했던 본존불은 물론 주변의 팔부중과 인왕상이 모두 지극한 조화를 이룬, 화엄의 총체성 세계의 구현이다. 참배자의 시각상 착시 현상까지 고려하여 광배를 타원형으로 만들 정도로 조금의 틈이나 오차도 주지 않은 채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숨을 멎게 한다. 그 미의 극치에서 떨다가 천장을 바라보면 궁륭형 천장을 덮은 덮개가 세 갈래로 갈라진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조성 당시에 새로 만들지 않고 깨진 것을 그대로 얹은 것이다. 석굴암의 미학에서 보면 그는 조화를 깨는 추다. 하지만, 그것이 있어 우리는 숨을 쉬게 된다. 거꾸로 갈라진 덮개의 미학에서 보면, 완벽한 조화야말로 비인간적이다. 미는 완벽한 조화와 깨어진 돌 사이에 있다. 석굴암을 제대로 보는 것은 덮개와 본존불, 곧 성과 속, 신과 인간, 조화와 균열, 완벽함과 실수 사이를 오고가며 읽는 것이다.
소설적 상상이지만, 그 틈에서 깨어진 덮개를 그냥 올린 이- 그가 김대성이든 아니든-의 깊은 뜻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한다. 설화엔 돌이 갑자기 세 갈래로 갈라졌다고 한다. 그 순간 석굴암의 불상을 조각한 장인은 새로 만들까 그대로 쓸까 고민하였을 것이다. 완벽을 추구하는 신라 최고의 장인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새로 만들어야 한다. 처음엔 화룡점정(畵龍點睛)을 기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보니 깨진 덮개가 더 멋져 보였다. 우선 그것은 본존불을 비롯한 아래의 천의무봉의 불상과 대조를 이룬다. 아래가 부처라면 이건 중생이요, 아래가 불국토라면 이건 이승이다. 저절로 금아 간 것이니 하늘의 뜻인데, 세 갈래로 갈라진 품이 삼재(三才)의 삼태극과 흡사하여 불교와 재래 신앙을 하나로 아우르려는 화엄만다라의 세계관과 부합한다. 신의 솜씨로 빚었다는 평가를 받는 예술품에 하나쯤 인간의 실수의 흔적을 끼워주는 것이 더욱 파격의 멋을 더할 듯도 들었다. 대강 이런 뜻으로 깨진 덮개를 올려 성과 속, 부처와 중생, 조화와 균열이 하나가 되는 진정한 만다라를 구현한 것이 아닐까?
연꽃이 흐드러진 유월의 어느 날 지리산 실상사를 찾았다. 절 앞 연못에 연꽃이 만개하였다. 투명하게 그지없이 하얀 연꽃을 보면 청정 세계가 바로 그곳이란 생각이 그리 과장이 아니다. 연꽃이 그리 아름다운 것은 꽃들이 흐드러지고 바람이 맑은 지리산 산록이 아니라 진흙의 흙탕물 속에서 피기 때문이다. 더러운 물속에서 하늘을 향하여 피워 올린 지극한 순백의 꽃송아리를 보노라면 아름다움과 깨달음이 일치하는 경지에 이른다. 진흙과 흙탕물 없이 연꽃이 없고, 연꽃이 없다면 진흙과 흙탕물도 없다. 진흙과 흙탕물의 더러운 성분이 연근으로 들어가 순백의 연꽃을 이루고, 연은 꽃을 피우고는 져선 진흙이 되고 흙탕물이 된다. 진흙과 흙탕물이 있어서 연꽃은 더욱 아름답고 연꽃이 있기에 진흙과 흙탕물도 아름답다. 이 경지에서 연꽃과 진흙, 부처와 중생, 미와 추의 구분은 무너진다.
연꽃밭을 지나면 천왕문이다. 사천왕이 있다. 지국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 다문천왕이 자리하고 있다. 모두 무섭고 흉측한 얼굴이다. 눈은 주먹만하고 광대뼈가 튀어나왔고 코도 사발만하며 표정도 무섭다. 하지만 그 추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본다. 눈이 크면 클수록, 귀가 전체 얼굴과 불균형을 이루면 이룰수록, 몸통이 너무 비대할수록 사천왕은 오히려 순진해보이고 해학적인 동시에 아름답다. 멋없이 커다란 눈은 중생의 고통을 보는 심안이며, 툭 튀어 나온 광대뼈는 악귀를 위협하는 권위이며, 멋없이 긴 칼은 중생에게 고통을 주는 악귀를 단 칼에 내리치는 보검이며, 손 위의 조그만 탑은 방황하는 중생들에게 지혜의 빛을 주는 보탑이다. 그러기에 조화가 깨지면 깨질수록, 무섭게 보이면 보일수록 사천왕은 순진해보이고 아름답다. 여기서 통일, 균정, 비례, 조화, 율동, 대조를 형식의 법칙으로 본 서구의 미학은 설 자리를 잃는다.
진흙에서 피기에 아름다운 연꽃
우리의 신화나 설화에서 선은 악이며 적대자는 조력자이다. 주체가 지향하려는 세계를 방해하는 용이 나라와 불법을 지켜주는 호국룡이나 호법룡으로 변한다. 적대자가 끝까지 주체의 대립자로 기능을 하지 않으며, 적대자와 조력자가 상생의 관계를 이룬다. 처음에 적대자로 주체의 대상 지향을 방해하던 적대자들은 곧 주체의 여러 신이함에 설복되어 주체의 조력자로 변하여 주체의 행위에 동참한다.
형식과 내용도 마찬가지다. 형식이 내용이고 내용이 형식이다. 연꽃은 아름다운 품새를 가졌기에 깨달음의 세계를 보여주고, 깨달음의 세계를 보여주기에 아름답다. 사천왕은 불균형과 비균정의 형식을 지니기에 해학적이고 호법의 의지를 보여주고, 호법의 의지를 보여주기에 흉측하고 무서운 모습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더 나아가 포근함과 평안함을 느낀다.
텍스트가 맥락이고 맥락이 텍스트다. 연꽃은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미술시간의 맥락이라면 미적 대상의 하나이고, 요리사에겐 연밥의 재료이며, 제3세계 작가에게는 진흙과 같은 제3세계의 현실을 극복하고 피어난 문학이며, 스님에겐 깨달음의 세계이다. 반대로, 연꽃이 어떤 모양과 구도를 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건 문수보살이기고 하고 관음보살이기도 하며, 길 위에서 구걸하는 노숙자이기도 하고 잔치에 가려고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내 어머니이기도 하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출처 법보신문 965호 [2008년 09월 16일 1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