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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부분의 분석에서 총체성의 미학으로<중>

slowdream 2008. 10. 6. 14:45

현실제약-허무한 상상 모두 넘어 선 화엄의 미학
29. 부분의 분석에서 총체성의 미학으로<중>
기사등록일 [2008년 10월 01일 15:34 수요일]
 
 
좋은 텍스트란 현실의 구체적인 모습과 모순을 읽어낼 수 있는 반영상과, 현실의 굴레를 넘어 다양한 읽기를 통해 상상을 가능케하는 굴절상이 함께 담겨있는 작품이다.

 

화엄의 총체성의 사유를 미학으로 전환해보자. 내가 암울한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컴컴한 밤으로 비유할 수도 있지만, 그 어둠 속에서 광복의 희망을 꿈꾸면서 ‘별’을 노래할 수도 있다. 전자가 식민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면, 후자는 그를 굴절시키고 있다. 이처럼 예술 텍스트는 현실을 거울처럼 반영하기도 하지만, 프리즘을 지난 빛이 무지개로 빛나듯 굴절하기도 한다. 현실의 모방과 반영이 예술이기도 하지만, 작가는 그 현실을 의식을 통하여 반영시키는 동시에 지향의식(지향의식이란 주체가 세계와 마주쳤을 때, 그 세계를 인식하고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서 무엇인가로 현상학적으로 지향하려고 하는 의식의 단계를 말한다. 예를 들어 무서리가 내린 뒤에 다른 꽃들은 모두 시들어버렸는데 더욱 새뜻하게 피어 있는 국화를 보았을 때, 성리학적 세계관을 지향하는 선비일 경우 이를 지절(志節)의 표상으로 노래하지만, 실존주의를 지향하는 유럽의 지성인은 ‘실존’으로 형상화한다), 전의식(pre-consciousness)이나 무의식(unconsciousness)을 통하여 굴절시킨다.

 

“바람에 흔들려 눕지만 곧 일어서는 풀”은 ‘누움, 하강, 억압’과 이항대립구조를 형성하는 시어일 수 있고, 가진 자에게 억압당하지만 곧 일어서서 저항하는 민중의 은유일 수도 있다. 이처럼 문학과 예술을 현실의 반영으로만 보려 한 관점이나 이를 현실과 유리된 꿈의 양식으로 보려 한 관점, 문학과 예술을 사회문화적 맥락에 종속시켜 해석하는 방식이나 작품 외적 요인을 배제하고 작품 그 자체만을 분석과 감상의 대상으로 삼는 방식 모두 총체성을 상실한 비평이다. 전자는 예술작품을 현실이나 사회적 맥락에 종속시키고 작품의 예술적 특성이나 미학을 놓치거나 무시할 수 있다. 반면에 후자는 예술을 현실과 유리시키고 해석의 지평을 축소하며 예술에 작용하는 외부 사회적 요인이 예술 자체의 고유요인임을 허용하지 않는다.

 

때문에 화엄의 미학은 텍스트를 반영상(反映相)과 굴절상(屈折相)으로 분절하고, 각 텍스트에 담긴 세계를 화엄철학의 사법계(四法界)로 나누어 분절한 후 분석을 한 후 종합하여 그 작품이 담고 있는 총체적인 세계를 재구성한다.

 

박노해 시가 한국 노동자의 현실과 자본주의의 모순을 잘 드러내듯, 반영상은 현실을 반영한 텍스트이다. 반영상에서 실제 현실과 텍스트에 재현된 현실은, 칠판 하면 지우개가 떠오르듯, 인접성의 유추, 곧 환유의 관계를 형성한다. 반영상은 “작가가 주체로서 세계와 마주쳤을 때 자신의 의식과 경험, 그때까지 접하였던 텍스트를 종합하여 자기 앞의 개별적인 현실을 해석하고 세계를 재질서화하는 원리를 따라 현실을 나름대로 압축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은 확대시키는 과정을 통해 환유로 표명하여 구체적이고 생동적인 삶의 보편적 진실과 가능성을 드러내려는 텍스트”이다.

 

반영상에는 화엄의 사법계(事法界)와 이법계(理法界)가 포개진다. 사법계를 미학으로 전환하면 현상계이다. 현상계는 주체가 마주친 사물이나 현실이다. 알을 까고 죽는 하루살이나 들에 핀 국화를 다들 아무 관심 없이 스치듯, 현상계는 드러내는 사상(事象)대로 세계를 바라보는 경지를 뜻한다. 그러나 그 전부터 그 사물을 접하였던 이든, 처음으로 마주치는 이든, 이들 가운데 몇몇은 그 사물에 관심을 보여 ‘새로운 만남’을 이룬다. 만남을 통하여 주체는 이를 무엇인가로 해석하면서 세계를 구성한다. 예를 들어, 어떤 주체는 알을 까는 하루살이를 보며 ‘그렇듯 하루에, 해가 뜨는 온 우주의 운행을 보고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하고 알을 낳는 성자의 모습’을 읽는다.

 

또 어떤 쓰는 주체는 무서리를 맞아 모든 꽃들이 사라진 뒤 더욱 새뜻하게 피어있는 국화꽃과 새로이 만나 “저 국화꽃처럼 인간 또한 좋은 조건보다 절망의 상황에서 참다운 실존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유추한다. 이렇듯 쓰는 주체는 사물이나 현실을 텍스트로 재창조하고자 하면서 현실 속에 내재하는 보편 원리나 본질을 발견한다. 이렇게 주체가 현상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사물과 새로운 만남을 이루어 사물에 내재하는 보편원리라고 직관으로 깨달아 세계를 창조하는 경지는 이법계이다. 이를 미학으로 전화하면 ‘원리계’이다.

 

이 원리계는 진제(眞諦)의 입장에서 하나이지만 속제(俗諦)에서 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가장 좁은 범주의 원리계는 국화꽃에서 실존적 삶을 유추하듯 인간이 마주친 사물과 현실 속에 내재한 본질을 인식하는 경지이다. 그 다음 범주의 원리계는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듯, 한 사상(事象)을 통하여 여러 사상이 담고 있는 보편 원리를 인식하는 경지이다. 가장 너른 범주의 원리계는 만물이 수억 가지의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모두 연기되어 있어 공(空)하다고 하듯 세계의 실체에 어느 정도 다다른 경지이다.

 

반영상과 굴절상의 조화

 

굴절상은 프리즘이 한 줄기 빛을 무지개로 바꾸듯 현실을 굴절시킨 텍스트이다. 쓰는 주체로서의 예술가는 현실을 반영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데서, 현상계와 원리계간의 괴리나 세계의 부조리를 표상하는 데서 결핍을 느끼며 욕망을 지향한다. 이때 쓰는 주체와 현실 사이에 현전하던 의식의 자리를 지향의식, 전의식과 무의식이 대체한다. 지향의식, 전의식과 무의식은 서로 결합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면서 현실을 다른 무엇으로 전화시키거나 부정한다.

 

굴절상은 사리무애법계(事理無碍法界)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가 담겨 있다. 사리무애법계를 미학으로 전화하면 진자계이다. 진자계는 쓰는 주체가 지향의식에 따라 현실과 사물, 그리고 이들에 내재하는 원리를 발견한 후 이 원리를 통하여 현실을 바라보며 현실과 욕망, 당위와 존재, 이데올로기와 삶, 개별적 삶과 보편적 삶, 절대와 상대, 현상과 본질, 역사적 존재와 실존적 존재 사이를 시계의 진자처럼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경계이다. 예를 들어 이주노동자가 부당하게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현실에서 당위는 당연히 이들이 다른 사람과 똑같이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당위나 보편이 그대로 행하여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과학이다. 삶은 예술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생동하며 복잡하다. 결국 예술은 부분으로 전체를 말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유비추리의 오류를 덜 범하고 삶의 총체성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면 양자 중 한쪽에 머물 것이 아니라 양자 사이를 끊임없이 진동하며 종합을 꾀해야 한다. 극단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보여준 것처럼 예술이 진동을 멈추고 어느 한 편에 서고자 할 때 예술은 정치나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하며 예술이 갖는 부정적인 힘조차 잃는다.

 

사사무애법계는 현상과 현상이 완전 자재하고 융섭하는 경계로 사(事)가 리(理)의 도움 없이 다른 모든 사(事) 속으로 자유롭게 들어가고 융섭하는, 사(事)와 사(事)가 무애할 뿐만 아니라 만유(萬有) 그 자체가 서로를 비추어주고 서로를 침투하여 하나가 곧 세계이고 세계가 곧 하나인 경지이다. 즉 세계는 서로 방해를 하지 않고 서로를 비춰주고 포섭하여 하나로 융합하여 총체성(總體性)을 지향하는 것이다.

 

사사무애법계를 미학으로 전화하면, 승화계이다. 승화계는 모든 대립과 갈등을 승화하여 이룩한 총체성의 세계이다. 승화계는 주체와 대상, 이상과 현실, 현상계와 원리계, 세계의 부조리와 자아 등 여러 관계에 있을 수 있는 대립과 갈등을 총융시킨 경계이다. 쓰는 주체로서의 예술가가 현실의식의 작동을 완전히 멈추고 지향의식, 전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모든 대립과 갈등을 총융시킨 상상력을 펼칠 경우 그 경지는 승화계로 나타난다. 승화계는 쓰는 주체가 텍스트 상에 직접 제시할 수도 있고 숨겨두어 읽는 주체가 독서하는 과정에서 읽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읽는 주체는 주체와 대상, 존재와 당위, 개별과 보편, 절대와 상대, 현실과 욕망 등의 대립이 하나로 원융된 세계의 황홀감 속에서 노닐게 된다.


우리는 박경리의 ‘토지’를 통해 일제 식민지 시대의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중첩된 부조리 속에서 여러 군상의 삶과 이 속에서 가장 인간답고 정의로운 삶은 무엇인지 되새기게 된다. 이처럼 반영상은 현실을 반영하여 생동하는 삶의 구체적인 모습, 그에 담긴 세계의 부조리를 보여주고 이에 담긴 삶의 진실을 드러낸다. 대신, ‘쓰는 주체’를 현실을 반영하는 “모방적 예술가”로 머물게 하며, ‘읽는 주체’를 텍스트에 담긴 반영상과 현실을 관련시키며 텍스트의 의미를 역사주의 비평식으로 해석하게 하는 “역사적 독자”에 머물게 한다.

 

‘박하사탕’이 좋은 영화인 이유

 

우리는 영화 ‘박하사탕’에서 1980년 군부독재 세력에 의해 자행된 광주학살이 순수한 사랑을 하려는 평범한 청년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해 곱씹는 한편, 기차가 거꾸로 가면서 서사의 시간이 과거로 역전되는 독특한 구성을 보면서 “필름을 되돌리듯 역사를 성찰할 수 있지만, 그 역사의 무게에 짓눌린 맑은 영혼을 되살릴 수 없다.”는 메시지를 읽는다. 이 영화에서 전자가 반영상이라면, 후자는 굴절상이다. 대중의 인기를 얻는 데 성공한 이 영화가 예술성도 있는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후자 때문이다.

 

이처럼 굴절상은 미학적으로 조밀하고 아름다운 구성을 하여 현상의 보이는 세계를 떠나 세계의 숨겨진 본질을 드러내려 하며, 정보의 양은 많아 해석의 지평을 연다. 그만큼 ‘읽는 주체’를 현실에서 자유롭게 하나 해독이 쉽지는 않다. 굴절상은, ‘쓰는 주체’를 “내포적 예술가”로 거듭나게 하여 그가 텍스트를 다양하게 의미화하게 하며, ‘읽는 주체’를 텍스트에 담긴 현실을 다양하게 해독하도록 안내하는 내포적 독자로 거듭나게 한다.

 

그러므로 가장 바람직한 유형은 신라 향가나 이상의 ‘날개’, 피카소의 ‘게르니카’처럼, 반영상과 굴절상이 조화를 이룬 텍스트이다. 이 경우 독자는 반영상을 통하여 현실을 읽어내면서도 굴절상 때문에 역사주의적 해독을 넘어서서 텍스트의 숨겨진 의미를 해독하려 한다. 그러기에 작품을 통하여 현실의 구체적인 모습과 모순을 읽을 수도 있지만, 현실의 굴레를 넘어 다양하게 읽기를 하며 상상을 펼칠 수 있다. 반영상은 굴절상이 현실이 없이 비상하는 것을 붙잡아매고, 굴절상은 반영상이 쳐버린 울타리를 풀어버린다. 좋은 텍스트일수록 반영상과 굴절상의 이런 상호작용이 1차로 끝나지 않고 계속 반복된다. 이렇게 하여 텍스트의 의미는 끊임없이 드러나고, 반영상이 야기할 수 있는 닫힌 읽기도, 굴절상이 수반할 수 있는 비정치성과 비역사성도 지양된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출처 법보신문 967호 [2008년 10월 01일 1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