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종시대의 불교사상이 이성의 철학은 아니지만, 인간의 사유를 통하여 이해케 하는 길을 가기에 교종은 철학적 방편을 쓰고 있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선종은 철저히 그런 방편을 무시한다. 그래서 반철학적이라고 부른다. ‘부처님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똥막대기’나 ‘뜰앞의 잣나무’라는 중국 대선사들의 응대는 철저히 철학적 사유를 우습게 여기는 발상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선종은 의식과 이성의 영역에 와닿는 말과 심지어 사유 가능성을 철저히 부정한다.
선종은 의식의 언어를 지운다. 선종은 무의식의 영역으로 마음이 직입할 것을 도모한다. 진정한 마음의 무의식적 언어를 발견하기 위하여 오감의 의식과 오감의 데이터를 잠재우는 마음의 평정심을 얻어야 한다. 마음의 평정심은 요별경식(了別境識=오감과 의식)의 느낌을 고요히 하는 길을 통하여 얻어진다. 요별경식의 느낌을 고요히 하는 길은 오감의 작용을 잠재우는 수면으로서 가능하지 않다. 산란한 의식의 마음도 선의 길을 방해하지만, 또한 잠자듯이 멍청해지는 무기(無記)도 선의 입문이 안된다. 선은 의식의 작동을 차단하고 의식을 고요하게 하는 가장 단순한 무의식적 열림의 순간을 뜻한다.
앞의 글에서 무의식의 양식은 사회적 무의식으로서의 제7식인 말나식과 자연적 무의식인 제8식으로서의 아뢰야식으로 나누어진다고 언설한 바가 있었다. 사회적 무의식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영위함으로써 자아우선의 이기적 경향을 하나의 무의식으로 터득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사회생활을 통하여 경쟁심과 이기심, 그리고 분별심을 갖게된다. 모든 이기주의적인 인간의 무의식적인 경향은 다 사회생활의 과정에서 얻어지거나 또는 그 습기에서 생긴다. 사회생활은 인간됨의 불가피한 과정이지만, 그 과정이 바로 인간에게 선악의 이중성을 심어 놓는다.
그렇다고 사회생활을 지우고 자연상태로 그냥 지속한다는 것은 인간조건에 맞지 않는 공상에 불과하다. 선(禪)은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사회생활을 지속하면서도 자연상태의 무구한 본능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일종의 자연회복운동과 다르지 않겠다. 선은 사회생활의 불가피한 지능을 자연상태의 본능으로 되돌리려는 마음운동에 다름 아니겠다. 인류는 사회생활을 통하여 본능을 아주 반도덕적인 타락의 양식으로 간주했다. 즉 이기적이고 소유욕적인 욕심의 양식으로 본능을 여겨 도덕적인 지성의 힘으로 그 본능의 이기심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명분상으로 생각한 주장이지만, 새빨깐 거짓말이다.
무의식의 본능은 의식의 주장에 의하여 약간 지연되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선은 자연에서 모든 동식물이 아주 쉽고 아주 간결하게 알아차리듯이 그렇게 아는 본능을 다시 회복하려는 운동이다. 지진이 곧 일어난다는 것을 동물들은 자연히 알아차린다. 인간만이 그 본능을 사회생활에서 상실하여 멍청하게 앉아서 당한다. 인간은 사회생활을 통하여 그 자연적 본능을 잃고 지능(지성)의 방편을 간접적으로 추론해서 인식하려 한다. 본능은 지능처럼 간접적인 추론을 거쳐 일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높고 물이 깊듯이 직접 직관해서 안다. 간접적인 추리가 아니라, 직접 직관으로 알아차리는 것은 안긴이 자연을 다시 재발견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런 동물적 본능을 인간은 직관이라 부른다. 인간이 순간에서 순간으로 연결되는 직관의 능력을 터득하기 위하여 자연과 공명하는 자연성을 들어내기만 하면 된다. 이 자연성이 불성이다.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