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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부분의 분석에서 총체성의 미학으로 <하>

slowdream 2008. 10. 20. 15:19
30. 부분의 분석에서 총체성의 미학으로 <하>
기사등록일 [2008년 10월 07일 20:12 화요일]
 
 
시인의 눈에 비춰진 바다 아래 세계는 삶과 죽음이 갈등하고 욕망이 들끓는 속제다. 시인 바쇼는 바다 속 문어와 그를 잡기 위한 문어단지 사이에서 무상을 읽었다.

 

 

화엄의 미학은 그림이든 문학작품이든, 소설처럼 긴 텍스트든 선시처럼 짧은 텍스트든 모두 적용이 가능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 형식으로 5/7/5, 단지 17자에 시상을 압축한 하이쿠에 응용해보자. 이것이 가능하다면 다른 장르나 텍스트에는 좀 더 쉽게 적용할 수 있으리라. 마츠오 바쇼(松尾芭焦)의 하이쿠를 한 수 골라 화엄의 미학으로 해석하여, 부분이 전체가 되고 전체가 곧 부분이 되면서 주와 객이 하나로 원융(圓融)되는 경지를 느껴보자.

 

문어단지여, 그리 덧없는 꿈을/여름의 달밤
(壺や, はかなき夢を/夏の月)

 

바쇼가 1688년 5월말 아카시를 여행했을 때 읊은 하이쿠다. 계절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계어(季語)는 ‘여름의 달밤’으로 초여름 수평선 위로 그믐달이 비춘 바닷가가 배경 이미지를 형성한다. 잠시 휴지(休止)를 두어 이미지를 떠오르게 하고 생각할 틈을 주는 키레[切れ]는 “문어단지여!”로, 사유의 여백 속에 문어와 단지 사이에 얽힌 여러 환유와 은유를 떠오르게 한다. 문어단지는 문어가 야행성 동물이므로 대개 저녁에 바다에 내렸다가 새벽녘에 거두니, 이 시를 읊은 시점은 문어단지를 이미 내린 후 그믐 달빛이 깔린 초여름 밤이다.

 

이 하이쿠에서 핵심어는 ‘문어단지’이다. ‘-여(や)’로 길게 여운을 형성하는 가운데 이는 1차적으로 환유로 읽힌다. 환유로 읽히면서 ‘문어’와 ‘단지’의 의미는 분리된다. 핵심어인 문어는 부분-전체 관계로는 ‘8개의 다리, 둥그런 머리, 빨판, 먹물’ 등을 연상시킨다. ‘8개의 다리, 둥그런 머리, 빨판, 먹물’에서 각각의 단어가 바로 ‘문어’를 연상시킬 정도로 부분-전체의 환유관계는 밀접하다. 공간적으로 보면, 문어는 일본에서 문어가 많이 잡히는 항구인 아카시, 문어가 사는 바다, 문어가 좋아하는 구멍과 굴을 환기한다. 시간적으로는 문어와 계절이 관계가 없으나, 산란하는 때인 초여름을 떠오르게 한다. 후반부에서 여름을 한정하고 있고 달이 떴으니 초여름 중에서도 밤이다.


문어는 초여름날 밤 아카시 인근의 바닷가라는 구체적 시공간을 시적 맥락으로 부여하며, 이에 그치지 않고 독자들에게 바쇼와 자신의 삶 중 문어와 관련된 경험이나 작품을 연상시켜 이와 상호텍스트성 관계에서 이 하이쿠를 읽도록 한다. 여기서 겉으로 드러난 현전텍스트는 위 하이쿠이지만, 뒤로 숨은 부재텍스트는 문어와 관련된 경험과 와까[和歌], 하이쿠[俳句] 등 관련 텍스트들이다. 그리하여 현전텍스트의 의미와 가치는 부재텍스트와 관련에 따라 천차만별로 차이를 가진다. 각각의 텍스트는 동시돈기(同時頓起)한다.


독자가 이 하이쿠에서 더 깊은 의미를 찾고자 할 때, 독자는 문어의 의미를 환유에서 은유로 바꾸어 읽는다. ‘대머리, 괴물’처럼 문어의 생김[相]에서 연상되는 것을 넘어서서 체(體)의 은유를 살피면, 문어가 ‘굴을 좋아하고 들어가 안주하는 속성’은 ‘모태귀환, 귀소본능’의 의미를 갖는다. 선비들은 머리가 좋고 둥근 형상을 한 것을 문어의 본질로 파악하여 ‘둥그런 진리, 도(道), 깨달음’ 등의 의미를, ‘문어가 머리를 숙이고 몸을 낮추며 이동하는 속성’을 지닌 것을 보고 ‘겸양, 안분(安分)’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밖에 인간의 입장에서 문어의 용(用)을 보면, ‘단지에 들어가면 나오지 못한다’는 문어의 행위는 ‘구속, 함정, 수감’, 먹물을 뿌리는 행위는 ‘자기 보호, 방어’, 보호색을 띄는 것은 ‘위장, 변신’, 문어가 먹을 것이 없을 때 제 다리를 뜯어 먹는 행위는 ‘제살파먹기’ 등의 의미를 형성한다. 은유든 환유든 각각의 의미는 세계를 형성하며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다. 동시돈기한다.

 

여름 밤 바다에 선 시인

 

문어의 다채로운 의미에 울타리를 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텍스트 바깥의 맥락, 곧 초여름 밤의 아카시 인근의 바다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이쿠 내에서 다른 낱말들과 갖는 관계이다. 문어는 문어인데 단지 안에 들어간 문어이다. 여기서 단지와 문어는 이항대립관계를 형성한다. 서로 대립적인 문어와 단지가 합쳐져 하나가 되는 것은 문어가 단지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의 매개를 통하기 때문이다.

 

문어가 자유로이 헤엄을 치고 먹이를 잡고 바다 속 생활을 즐기는 주체라면, 단지는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된 구속이다. 문어가 짝을 만나 알을 낳고 잘 길러 자손을 번창하게 하는 꿈을 꾸는 존재라면, 단지는 그 꿈이 정지된 가혹한 현실이다. 문어가 노동을 하고 생활하는 것이라면, 단지는 휴식과 종언을 의미한다. 문어가 이곳과 저곳을 자유로이 떠돌고 헤엄치는 존재라면, 단지는 한 곳에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문어는 일본의 곳곳을 방랑하는 바쇼 자신이 되고, 단지는 이를 구속하는 세속의 굴레가 된다. 문어가 한 생각으로 꿈을 꾸는 바다의 생활이 상(常)이라면, 단지 안에 들어가 사람의 먹이가 되는 것은 무상(無常)이다.

 

그처럼 바쇼가 일심으로 선을 행하고 하이쿠를 쓰는 것은 상(常)이고, 세속의 굴레에 갇혀 속세의 환락에 묻혀 살다 생을 마감하는 것은 무상이다. 문어가 이리저리 자유로이 바다의 한 부분이 되어 생활하는 것은 무위의 삶이지만, 인간이 만든 단지에 갇히는 것은 인위의 삶이다. 바쇼가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자유로이 방랑하며 자연의 사물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이를 시로 표현하는 것은 무위의 삶이지만, 단지와 같은 집이나 세속의 굴레에 갇혀 속세의 생활을 하는 것은 인위이다. 이렇게 자연에서 깨달음을 얻는 방랑의 삶이 도를 행하는 것이라면, 단지는 그를 얽어매는 사유의 틀이다. 결국 문어는 삶이고 단지는 죽음이다. 이렇든 각각의 의미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서로를 관통하고 서로를 이끌어 들이고 있다. 세계는 동시호입(同時互入)한다.

 

바쇼는 초여름날 밤 바닷가에서 문어단지를 보면서 거기에 방랑하는 자신을 투영시켜 이런 하이쿠로 형상화한 것이다. 지금 바쇼 자신은 문어처럼 자유로이 방랑을 하며 자연과 하나가 되는 가운데 깨달음을 얻고 이를 시로 표현하고 있지만, 언제인가 몸이 지쳐 한 곳에 머무는 삶은 단지 안에 갇힌 문어처럼 자유를 구속당하고 도를 행하지 못하고 결국 죽음에 이를 것임을, 그래서 인생이란 자체가 덧없는 꿈이고 무상한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어쩌면 이 하이쿠는 바쇼 스스로 자신의 방랑생활과 그 의미를 한 마디로 함축한 시라 할 수 있다. 이 순간 바쇼가 문어이고 문어가 바쇼이다. 이렇듯, 모든 의미들과 그 의미로 형성된 세계는 서로 의존할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존재하게 하고 포섭한다. 세계는 동시호섭(同時互攝)한다.

 

위와 같은 생각을 하며 밤바다를 바라보았는데 그런 것에 아랑곳없이 바다는 잔잔하고 그믐달빛이 교교히 비추고 있다. 이로 인해 문어가 사는 바다 아래와 달빛이 비추는 바다 위는 내적으로 이항대립구조를 형성한다. 바다 아래에선 단지에 갇힌 문어가 삶과 죽음 사이에서 갈등을 하고 있는데, 바다 위는 이에 아무런 상관을 하지 않는다는 듯 태평하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서 만물을 (제사 때 사용하고는 버리는 하찮은) 짚강아지처럼 여긴다.(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라고 한 말처럼, 자연(自然)은 만물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인위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

 

바다 아래엔 욕망이 들끓고 있는데, 바다 위는 그런 욕망이 모두 사라지고 해탈과 적멸을 이룬 세계다. 바다 아래가 삼라만상이 나고 사라지는 생멸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세계라면, 바다 위는 모든 생멸이 끊기고 적멸의 고요만 있는 여여(如如)한 세계다. 바다 아래가 형이하이고 바다 위가 형이상의 세계요, 바다 아래는 일상의 장이요 바다 위는 깨달음의 장이다. 결국 바다 아래가 속제라면, 바다 위는 진제의 세계다. 바쇼는 문어와 단지에서 무상을 읽지만, 그 부분들에 내재하는 전체, 곧 영원한 진리는 “삶은 덧없는 꿈이지만 그를 초탈한 삶은 달빛이 비추는 바다처럼 모든 것이 나고 죽음을 멈춘 적멸의 세계이자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청정하고 고요한 적정의 세계다.”라는 것이다.

 

別 떠난 總은 없다

 

이 하이쿠에서 반영상은 “문어단지여, 그리 덧없는 꿈을”이며, 굴절상은 “여름의 달밤”이다. 현상계는 초여름날 밤에 문어단지를 던져 문어를 잡는 어부의 삶과 단지에 갇혀 죽게 된 문어의 상황, 바쇼가 이 모든 것을 바라보며 그에 자신을 투영하는 현실이다. 원리계는 그 현상계에서 단지에 갇힌 문어를 통해 삶의 무상을 느끼는 그 순간이며, 진자계는 문어가 단지에 갇힌 것과 상관이 없이 잔잔한 바다를 고요하게 비추는 달빛을 보며 바다 아래와 바다 위, 갈등과 조화, 욕망과 적멸, 무상과 상, 형이하와 형이상, 일상과 깨달음, 속제와 진제 사이를 오고 가는 경계이자 문어가 바쇼이고 바쇼가 문어인 세계다. 승화계는 ‘달’를 매개로 이 온갖 경계를 초탈하여 모든 것이 나고 죽음을 멈춘 적멸의 세계이자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청정하고 고요한 적정의 세계다.

 

자연 전체가 총상(總相)이라면, 문어, 단지, 달과 시적 화자와 독자는 별상(別相)이다. 문어, 단지, 달과 인간이 어우러져 자연을 이루고 자연이 있어서 문어와 단지와 달과 인간은 서로 깊은 연관을 형성하며 의미를 갖는다. 별(別)을 떠나서 총(總)이 없고 총(總)을 떠나서 별(別)이 없다.(總卽別 別卽總 總中別 別中總)


문어가 자유, 단지가 구속, 달이 적멸의 의미를 드러내기에, 자연은 어질지 않으면서 무위(無爲)한 본성을 드러낸다. 자연은 부분들에 관여와 간섭을 하지 않고, 각각은 그 속에서 서로 어울리고 조건이 되면서, 문어는 바다를 자유로이 주유하며 꿈을 꾸고 단지는 냉혹한 현실을 알리고 달은 모든 것을 교교히 비추며 하나로 아우른다. 이처럼 각각이 모여 자연의 본성(同相)을 이루고, 각각이 자유, 구체성, 원융 등의 성질을 드러내며 이상(異相)을 유지한다.(同卽異 異卽同 同中異 異中同).

 

단지는 문어를 가두는 기능을 수행하고, 사람은 단지를 놓아 문어를 잡으며, 문어는 사람의 먹이가 되며, 달은 환하게 비춰 이 모든 것의 경계를 없앤다. 이렇게 하여 자연은 서로 연기되면서 성상(成相)을 만들고, 이 성상을 유지할 때 문어와 단지와 인간, 달 각각은 괴상을 발휘한다.(成卽壞 壞卽成 成中壞 壞中成) 이렇게 육상(六相)은 하나로 원융(圓融)한다. 이것이 바로 이 하이쿠가 펼쳐주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화엄세계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출처 법보신문 968호 [2008년 10월 07일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