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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철학의 거장 마르틴 하이데거. |
예술에서 작품이 진리를 드러내는 것과 파사현정의 관계에 대해 논해보자.
낯설게하기는 낡은 형식의 해체와 새로운 형식과 만남으로부터 비롯되는 미적 감동을 안겨주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좋은 예술작품으로부터 많은 의미를 떠올리며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그 속에서 진리를 체득하였듯, 그것의 궁극적 본령은 예술작품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여 그 속에 감추어진 진리를 드러내려는 데 있다.
선(禪)의 목적 또한 파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삿된 것을 부수고 그 안의 감추어진 진리를 드러내려는 데[顯正]있다. 있다면, 시간의 선후나 방향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중론(中論)이 모든 희론을 적멸하는 파사(破邪)를 통하여 현정(顯正)에 이르려 한다면, 선(禪)은 현정을 바로 성취하여 그 순간에 동시에 파사를 이루고자 한다.
예술을 진리와 연관시킨 하이데거
낯설게하기가 형식의 장에서만 작동하지 않고 내용의 장, 해석과 감상의 장에서도 진동할 때 형식주의에서 출발한 낯설게하기의 미학은 하이데거의 미학과 소통을 시작한다. 다시 말해, ‘낯설게하기’와 ‘진리의 탈은폐’, 혹은 ‘세계의 찢어버림’은 사물의 숨겨진 진리를 드러낸다는 면에서 상통한다. 이어서 하이데거의 중개를 통해 낯설게하기는 선의 파사현정과도 대화를 한다. 먼저 하이데거의 미학에서 선을 바라보고, 다음 주에는 거꾸로 선에서 하이데거를 바라보자.
하이데거는 형식주의자처럼 예술을 미나 미적인 기술 등과 관련시키던 입장에 반발하면서 이를 진리와 연관시킨다. “예술의 본질은 작품 안에서 존재자의 진리가 스스로를 정립하는 것이다.”(Martin Heidegger: The Origin of the Work of Art) “작품 가운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때때로 존재하는 개별적 존재자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에 내재한 보편적 본질을 재현하는 것이다.”(같은 책) 예술작품은 숨어있던 사물의 본질을 탈은폐(Entbergen)시켜 그 안에 담긴 진리를 밝은 이해와 실존의 세계로 나오도록 스스로를 정립하는 것이다.
“세계(die Welt)의 세움(aufstellen)과 대지(die Erde)의 펼침(herstellen)은 작품 존재에서 두 본질적 성격이다. …… 세계와 대지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지만,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세계는 대지 위에 근거하고 대지는 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 세계는 대지 위에 근거하면서도 대지를 극복하고자 한다. 세계는 스스로 개시(開示)하는 것으로서 어떠한 폐쇄도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지는 숨고 은폐하는 것으로서 항상 세계를 자신에게 끌어들여 그곳에 머물게 한다.”(같은 책)
헤겔에게 세계란 있는 그 자체이기에 해석의 대상이었다면, 하이데거에게 세계란 “세계 그 자체를 세계화하는 존재와 진실 사이의 필연적 연관”이기에 존재가 새로이 세계를 해석하고 이를 역사적으로 표명함에 따라 열려진 대상이다. 세계는 존재자의 총체성, 존재자의 다양성을 포괄하는 영역, 현존재가 그 안에서 실제적으로 생활하고 있는 바로 그것, 세계성(worldness)의 개념을 의미한다.(Martin Heidegger: Being and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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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시인 김수영. |
대지는 작품이 스스로 되돌아가는 곳, 이 되돌아감 속에서 작품을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대지는 발현하고 있는 모든 것들의 발현 행위가 그 자체로 되돌아가서 숨는 은신처다. 발현하는 것들 가운데서 대지는 은신자로 현존한다.(Martin Heidegger: The Origin of the Work of Art) 작품은 대지 자체를 세계의 개시 가운데로 밀어 넣으며, 또한 그곳에서 대지를 보존한다. 존재의 진실을 드러내 세계를 세계화하는 것과 세계를 끌어들여 은폐하려는 것은 예술 작품의 본질적 특성이다. 양자는 서로 다르지만 분리될 수 없어서, 세계는 대지를 바탕으로 하되 이를 극복하여 사물의 본질이나 존재의 진실을 드러내고, 대지는 세계를 자신에게로 끌어들여 그곳에 머물며 사물의 본질이나 존재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을 숨기게 한다. 세계는 존재를 개시하려 하여 어떤 폐쇄나 닫힘도 용납하지 않지만, 대지는 은폐하고 머물려 한다.
김수영 ‘풀’도 ‘원융’ 해석 가능
조금은 난해하고 추상적인 하이데거의 미학을 김수영의 ‘풀’을 예로 들어 이해해 보자.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드디어 울었다./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풀이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이 시를 읽으며 우리는 이 시의 핵심 시어인 ‘풀’이 사전적 의미의 풀이 아님을 눈치 챈다. 시 텍스트만 놓고 보면, ‘풀’의 의미는 연상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수많은 의미를 드러낸다. ‘풀’은 상투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세계의 숨겨진 본질을 드러내기 위하여 몸부림을 친다. 하지만 ‘풀’에 담겨진 진리가 무한히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지 - 여기서는 문맥(의 구조)와 시의 텍스트외적 맥락 - 에 근거한다.
『시여 침을 뱉어라』 등에 나타난 김수영의 참여 시론과 저항적 태도, 60년대의 한국 상황이라는 사회적 맥락과 대비하여 역사주의적으로 해독하는 이들은 풀을 ‘민중’으로 해석한다. 이 시의 바탕은유가 ‘풀-민중’이라면 다른 시어들은 시 텍스트의 구조, 낱말과 낱말의 관계를 통해 이에 종속된 의미를 갖는다. 시 텍스트의 구조상, ‘풀’이 ‘민중’이라면, ‘바람’은 ‘지배층’을, 자연히 ‘눕는 것’은 ‘시련을 받고 억압당하는 것’을, ‘일어나는 것’은 ‘이 시련과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실천’을 하는 것으로, ‘우는 것’은 ‘불행’을, ‘웃는 것’은 ‘이를 극복한 것’으로 의미를 전이한다. “날이 흐리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민중에게 어려운 상황임”을 가리킨다.
반면에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해독하면 ‘풀’은 ‘제국주의 세력에게 수탈과 억압을 당하고 있는 제3세계(민중)’, ‘비’는 ‘제3세계에 가해지는 제국주의의 수탈과 억압’이며, 페미니스트의 입장에서 해독하면 ‘풀’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 남근에게 갖은 시련을 당하고 있는 여성’, ‘비’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남성, 또는 남근의 폭력과 야만’이다.
시인이 60년대를 대표하는 모더니스트임을 상기하며 모더니즘에서 해독하면, ‘풀’은 ‘여러 시련과 장애를 만나 흔들리고 방황하는 인간존재이거나 작가 자신’이다. 자연히 ‘비’는 ‘인간존재에게 고통을 주는 외적 조건이나 고통, 죽음, 불안’ 등이다. ‘바람’은 이를 야기하는 ‘세계(의 부조리나 횡포)’이다. 그렇다면 이 시는 풀과 같이 나약하면서도 실존을 향하여 지난한 몸부림을 치는 인간 존재를 풀을 통하여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눕고 우는 것은 존재의 숙명론적 불안이나 고통이다. 이 속에서도 인간 존재는 강인한 의지를 갖고 실존을 모색한다.(졸저,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하지만 이들 모두는 대지의 해석일 뿐이다. 이 시를 이항대립의 패러다임이 형성하는 대지를 찢어버리고 해석하면, 새로운 세계가 보인다. 곧, 이 시를 ‘능동 대 수동’, ‘울음 대 웃음’, ‘누움 대 일어남’의 대립을 ‘더 큰 누움’으로 아우르는 것으로 해석한다. 첫 연이 바람에 휘둘리는 수동적 존재로서 풀을 말하고 있다면, 둘째 연에서는 바람보다 더 능동적인 존재로서 풀을 노래하고 있다. 능동과 수동, 강함과 약함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면, 마지막 구에선 아예 풀뿌리까지 눕고 있다. 이 누움은 큰 누움이며, 큰 누움으로 인하여 모든 대립은 해소되고 조화를 이루게 된다. 세계는 원래 대립이 없는데 속인이 무명에 휩싸여 대립을 설정하여 누움과 일어남을 분별하고 이것을 울음과 웃음에도 관련시킨다. 그러나 일심(一心)의 경지에서 보면 차별은 본시 없는 것이니, 대립을 해소하고 하나로 돌아간다. 세계에 상존하는 모든 대립을 넘어서서 원융의 세계를 지향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완성이란 ‘이미 있는 것’ 뿐.
이처럼 우리는 김수영의 시 ‘풀’에서 풀의 숨겨진 본질과 대면하게 된다. 그리하여 민중이나 여성의 고통과 한숨 소리를 듣는가 하면, 세계의 부조리와 횡포에 맞서서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실존을 향한 지난한 몸짓을 하는 인간 존재와 마주친다. 더불어 모든 차별과 대립을 넘어선 원융의 세계에 몰입하여 참나[眞我]와 만나기도 한다.
완성이란 어떤 것을 본질의 충만함으로 전개하고 이끄는 것, 곧 산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진실로 완성될 수 있는 것은 ‘이미 있는 것’일 뿐이다.(Martin Heidegger: Letter on Humanism.) 풀이란 사물에, 혹은 시를 대하는 감상자 안에 이미, 민중이나 여성의 고통과 한숨 소리, 실존의 몸짓, 원융의 세계 속의 참나는 있었다. 존재는 사유를 통하여 이런 본질을 표명하는 언어에 다가가고, 이 언어의 도상에서 본질의 충만함에 이른다. 비 내리는 날 초원에서 우리는 세계의 부조리 앞에 놓인 존재의 고통을 응시하는 동시에 실존의 환한 빛을 본다.
이처럼 상투성에 대한 반역, 낯설게하기는 시와 예술의 본령이다. 낡은 대지를 깨고 은폐된 진리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예술행위의 본질이다. ‘풀’의 의미를 ‘인간 존재, 화엄’ 등으로 열린 해석을 하게 하는 것은 <풀>이란 시의 세계적 측면이다. 이 시 텍스트에 문맥과 사회문화적 맥락을 설정하여 해석에 구체성을 부여하는 대신 진리를 은폐하려는 것은 이 시의 대지적 측면이다. 시는 문맥과 맥락을 넘어서서 열린 해석을 지향하지만, 그것은 맥락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시 텍스트가 존재를 개시한다면, 맥락은 은폐를 한다. 시 텍스트가 진리를 지향한다면, 맥락은 그것에 구체성을 부여한다. 시 텍스트가 맥락을 넘어서서 숨겨진 진리를 열고 밝히려 한다면, 맥락은 이를 붙들어 울타리를 치고 진리를 닫고 숨긴다. 그러기에 하이데거는 “작품의 작품 존재는 세계와 대지 사이의 투쟁을 선동하는 데 있다.”(The Origin of the Work of Art)라고 말한다. 맥락을 떠나서 이 시에 대해 아무리 창조적인 해석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 시가 가지고 있는 본질의 한 자락에 지나지 않는다. 깨달음이 곧 집착이고 진리가 곧 비-진리이듯, 존재의 개시가 곧 은폐인 것이다.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출처 법보신문 970호 [2008년 10월 21일 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