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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의 공안 ‘차 한잔 들게나’를 풀이하기 시작하면 끝이 보이지 않지만 이 역시 언어의 테두리 안에 있을 뿐이다. 사진은 조주 선사가 머물렀던 중국 백림선사. 법보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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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제시한 하이데거의 인용문에서 ‘세계’를 ‘돈(頓)’으로, ‘대지’를 ‘점(漸)’으로 대체하여 읽어보자.
“돈(頓)의 세움과 점(漸)의 펼침은 예술작품 존재에서 두 가지 본질적 성격이다. 돈과 점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지만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돈은 점 위에 근거하고 있고 점은 돈을 관통하고 있다. 돈은 점 위에 근거하고 있으면서도 점을 넘어서고자 한다. 돈은 스스로 열어 보이는 것으로서 어떠한 닫힘도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점은 숨고 은폐하는 것으로서 항상 돈을 자신에게 끌어들여 그곳에 머물게 한다.”
선에서 하이데거 바라보기
주지하듯, 선은 가르침을 떠나 따로 전하는 것으로[敎外別傳], 언어를 떠나[不立文字],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直指人心], 본성을 보아 깨달아 부처를 이루는 것[見性成佛]이다. 불립문자라 하지만, 선을 체험하여 깨달으려 하는 주체 또한 분별심에서 비롯된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삶을 영위할 수 없으며 언어 없이 사고 또한 없다. 때문에 언어를 방편으로 사용하되 언어와 언어로 구성된 모든 삿됨과 집착에서 떠나[因言遣言] 마음으로 진여에 이르고자 한다.
예술작품을 감상하다가 퍼뜩 별안간 작품에 담긴 진리를 깨달을 수도 있고, 기존의 미학이론이나 비평이론을 통해 숨겨진 진리를 이해할 수도 있다. 피카소와 같은 대가들이 언급한 것처럼, 촌로나 학교의 문턱에도 가지 않은 대중들, 혹은 어린아이가 난해한 예술작품을 올바로 감상하고 제대로 해석한 예는 많다. 돈(頓)의 감상과 해석이 가능한 것은 대중의 마음에 예술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능력이 잠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생의 마음이 본래 청정하여 불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마음으로 자성(自性)을 보아 단번에 깨닫는다.[돈오견성(頓悟見性)].
점(漸)의 감상과 해석은 작가와 작품에 관련된 지식을 접하고 미학이론이나 비평이론을 터득하여 작품을 이해하는 능력을 기르고, 꾸준히 작품을 감상하여 감수성을 키우고 안목을 길러 작품을 감상하는 방식이다. 중생의 마음이 본래 청정하지만, 망상과 무명, 집착 등에 사로잡히기에, 깨달은 자라 하더라도 그 경지나 마음을 유지하기 어려우므로 반드시 수행을 통해야만 불성에 이를 수 있다.[돈오점수(頓悟漸修)]
돈(頓)과 점(漸)의 감상방식은 예술작품에서 진리를 드러내는 두 방편이다. 두 방식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지만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작가와 작품에 관련된 지식과 그동안 길러온 비평력과 감수성을 바탕으로 예술작품을 아름답다 느끼고 이해하며, 또 한편으로는 우리 안에 잠재한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고 그를 이해하는 감수성과 이해력을 통해 작품을 감상하면서 곧바로 작품에 숨어있는 진리를 찾아낸다.
점의 감상은 논리와 분석을 통하여 돈의 감상이 삿된 생각에 가로막혀 잘못 이해하는 것을 바로잡는 대신 편견을 만들어 자유로이 작품의 진리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한다. 돈의 감상은 점의 감상이 은폐한 진리를 직관으로 찾아내는 대신 삿된 생각에 가로막혀 진리가 아닌 의미에 집착할 수 있다. 그러기에 양자의 융합을 통해 찾아낸 진리 또한 깨달음이 곧 집착이라는 자세로 곧 바로 해체해야 작품이 품고 있는 진정한 진리에 다가간다. 그것이 파사현정의 미학이다.
불성있기에 중생도 예술 이해
이런 논리로 유명한 공안(公案)인 조주(趙州)의 ‘끽다거(喫茶去)’를 해석해보자. 철저히 문자를 버리고 논리와 분석을 떠나 오로지 직관의 깨달음으로만 법칙을 삼는 것이 공안이지만[以悟爲則], 문자로, 논리를 통해 분석해보자.
조주가 두 사람의 새로 온 스님에게 물었다. “그대는 전에 여기에 온 적이 있는가?” “와본 적이 없습니다.” “차 한 잔 들게나.” 다른 스님에게 물었다. “그대는 전에 여기에 와 본 적이 있는가?” “왔었습니다.” “차 한 잔 들게나.” 그 때 절의 원주(院主)가 말했다. “스님께서 와 보지 않은 사람에게 차를 마시라고 하신 것은 그만 두더라도 무엇 때문에 왔던 사람들도 차를 마시고 가라고 하십니까?” 하니 조주는 “원주야!” 하고 불러 말하였다. “차 한 잔 들게나.”(趙州 從?, 『趙州錄』)
이 공안이 어렵게 들리는 것은 각자 다른 세 상황에 대하여 조주의 대답은 한결같이 “차 한 잔 들게나.”라고 말한 점이다. 이를 화두로 삼아 먼저 차의 은유에 대해 생각해보자. 봄 햇살을 함뿍 안고 이제 막 생명의 싹을 틔운 찻잎은 맑고 그를 우려내는 물 또한 맑으며 우러난 찻물이 맑음은 물론 그 차를 마시는 사람 또한 맑다. 차의 체(體)를 ‘맑음’이라고 보는 이들은 차에서 ‘깨달음’이나 ‘청정한 세계, 해탈’ 등의 의미를 떠올린다. 조주의 게송인 �십이시가(十二詩歌)� 가운데 ‘진시(辰時)’에도 나타나지만, 차가 곧 깨달음이다. 다선일미(茶禪一味)도 같은 은유다.
이를 화두에 대입하면, “차를 마시게”는 “깨달음에 이르시게”가 된다. 그럼 왜 각자 다른 맥락에 있는 사람에게 같은 말을 하였는가? ‘여기에’는 구체적으로 조주가 말년에 주지살이를 한 조주성(趙州城) 동쪽 관음원(觀音院)을 뜻한다. 절에 온 적이 없는 사람은 조주의 가르침을 받지 못했던 자이다. 그러니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정진을 하라는 뜻으로 차를 마시라고 한 것이다. 절에 온 적이 있다는 사람은 이미 조주의 가르침을 받아본 사람이다. 그러니 나와 함께 깨달음을 나누자는 뜻으로 차를 마시라고 한 것이다. 원주는 두 사람을 분별하였다. 선은 분별심을 타파한다. 육근(六根)으로 보면 세상은 온통 차별상이지만, 선(禪)의 법안(法眼)을 통해서 보면 삼라만상이 모두 하나이다. 진정으로 차를 마시고 깨달아야 할 사람은 원주이다. 그러니 그에게 차를 마시라고 한 것이다.
공안도 끝없이 분석 가능
차의 환유를 보면, 이는 당시의 맥락에선 ‘관음원과 관련이 있는 초경사(招慶寺) 등의 절, 『다경(茶經)』을 낸 육우(陸羽), 그를 위하여 삼계정(三癸亭)을 지어 준 안진경(顔眞卿), 『벽암록』 48칙의 �왕태부전다(王太傅煎茶)� 등이 떠오르리라. “차 한 잔 들게나.”란 말은 차와 관련된 선사와 선사들의 화두를 떠올리라는 권유이기도 하다. 차를 마시라고 하여 조주가 머문 이곳과 이로 연상된 지명과 선사, 그들의 공안과 지금의 공안이 하나로 연결된다. 표현은 다르지만, 선의 진리는 한 맛[一味]으로 흘러감을 뜻하는 것이리라.
차의 용(用)은 몸을 따스하게 하고 마시는 이들을 서로 친밀하게 엮어주는 것이다. 이런 차의 짓은 ‘따스한 인간미, 정, 마음 속 부처’ 등의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 온 적이 있는 이건, 그렇지 않은 이건, 먼 길을 온 사람들이다. 원주 또한 시중을 드느라 많은 기력을 소진한 사람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다. 따스한 차 한 잔을 나누며 그 속에서 부처를 만나는 것이다. 맑고 그윽한 차를 나누면 저절로 마음의 문이 열려 자신을 내보이고 상대방을 자신 안에 받아들인다. 두 스님과 조주, 원주 모두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모두 차를 마시며 아상(我相)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뜻에서 세 사람 모두에게 차를 마시자고 권한 것이다.
조주가 『벽암록(碧巖錄)』의 제2칙에서 말한 대로 지극한 도(道)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높고 높은 관념세계가 아니다. 그리 서로 따스한 인간미를 나누면서 마음 속 부처를 발견하는 그것이 바로 도(道)이다. 이렇게 읽으면 이 화두의 의미는 “지극한 도는 어려운 곳에, 관념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지위, 어느 상황에서든 차를 나누면서 아상을 버릴 때 서로 마음 속 부처를 드러내는 데 있다.”이리라.
더러운 것과 세균을 걸러내고 향이 그윽하여 속세를 잊게 하는 것 또한 차의 용(用)이다. 이때 차의 의미는 ‘도솔천, 선가, 열반’ 등이다. 차는 무명(無明)을 걷어내고 내 몸 안에 있는 본래 청정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차를 마시라는 것은 절에 온 적이 있건 없건, 주지건 원주건 모두 일체 번뇌와 무명을 없애고 단박에 생사를 뛰어넘어 다향 가득한 세계에 드시라는 것이다. 절에 온 적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깨달음의 차이이고 주지와 원주는 신분의 차이이니, 그런 모두에게 차를 마시라고 한 것은 깨달음의 깊고 얕음,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 누구나 열반에 이르고 부처가 되라는 것이다. 그러니 화두의 의미는 절에 온 스님, 그렇지 못한 스님, 원주 모두 무명을 걸러내고 차를 마심을 방편으로 삼아 청정한 세계에 이르라는 말이다. 이렇게 읽고 보면 이 화두의 의미는 진속불이(眞俗不二)이다.
차를 다시 부분과 전체의 환유로 읽으면, 차를 마시는 것은 일상의 한 행위이므로 차를 마시는 것은 ‘일상’을 의미한다. 이를 화두에 대입하면 화두의 의미는 절에 온 적이 있는 사람이건, 온 적이 없는 사람이건, 원주건 차를 마시는 일상 속에서 도를 찾으라는 것이다. 도는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차를 마시는 평상에 있다.[平常是道]. 아무 것도 버리거나 선택하지 않고[無取捨], 아무 것도 꾸미지 않으며[無造作], 변하는 것도 영원한 것도 없고[無斷常], 거룩한 것도 속된 것도 없으며[無聖凡], 옳은 것도 옳지 않은 것도 없이[無是非], 자유로이, 밥 먹을 땐 밥을 먹고 일할 땐 일하고 차를 마실 땐 차를 마시는 것이 바로 도(道)이다. 이렇게 하면 남천선사(南泉禪師)의 말대로 허공같이 툭 트여서 넓은 것이다. 그러니 화두의 의미는, “여기 절엔 온 적이 있는 이건 없는 이건 달리 다른 곳에서 도를 구하지 말라. 차를 마시는 평상심이 바로 부처의 마음, 도이며 평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부처가 되는 길이다.”이다.
모든 풀이 버릴 때 드러나는 의미
이처럼 위 공안의 의미는 끝이 없다. 하지만, 이 모든 의미는 의식과 언어의 테두리 안에서 찾아본 것들이다. 대지요, 점(漸)이다. 대혜(大慧) 선사가 이 글을 읽었다면 총림(叢林)을 망하게 할 사량분별이라고 일침을 놓았으리라. 진정한 의미는 위의 풀이가 모두 껍데기라며 버릴 때 드러난다. 언어기호나 문자를 초탈하고 논리나 분석을 떠나 일체의 번뇌는 물론 이성적인 생각이나 이치를 끊고 직관으로 득달같이 생사를 뛰어넘는 깨달음에 이르러야 하리라. 다만 묵조선의 폐해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이렇게 사량분별로 분석할 수 있을 때까지 분석한 것을 알려준 다음 이 모두는 “이 공안의 참된 의미가 아니다!”라면서 모두를 버리고 진정한 의심상태에 이르러 참구하라고 하면 간화선이 좀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출처 법보신문 971호 [2008년 10월 28일 1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