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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부정을 한다. 기존의 코드를 해체하는가 하면, 익숙한 세계를 깨고 전혀 생경한 세계를 보여준다. 사진은 백남준 作 ‘108번뇌’. |
가을이 자못 가까이 왔다. 한가위까지도 무더워 올해는 안 오시는가 했더니, 시베리아 기단이 내려오던 날 갑자기 어깨를 툭 치고는 홀연히 내빼버렸다. 마음은 덥석 안아주고프지만 속내를 감추고 있었더니, 그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눈을 감은 새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시나브로 다가온 모양이다. 어느덧 하늘은 투명하게 푸르고 들판은 금빛으로 출렁이고 산록엔 쑥부쟁이와 벌개미취가 눈부시다. 지리산 자락 삼정산 산꼭대기엔 여름 내내 동색이던 초록이 쑥스러운 듯 발그레 물들기 시작한다. 이런 날이면 우리는 누구인가 끝간데없이 그리워 편지를 쓴다.
하지만, 그 편지에 “당신이 없는 세상은 천왕봉이 없는 지리산이요, 들국화가 없는 가을날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면, 가을날의 로망은 한순간에 쪽박을 찬다. 물론 맥락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의 경우 그런 편지를 읽으며 손을 부들부들 떨며 감동을 하여 달려갈 사람은 없다. 상투적이기 때문이다.
연애도 낯설게하기 적용 돼
반면에 “가을이 불쑥 등덜미를 치고 가던 날/혹시 닿을까, 빈 하늘로 손을 뻗어 봅니다./바람이 홀연히 눈시울 스치고 간 그때/행여 다다를까, 고르고 고른 낙엽을 부칩니다./봉선화가 언뜻 옛일 떠오르게 하던 찰나/혹여 이루어질까, 곱다랗게 손톱을 물들입니다.//소쩍새 소리는 점점 가득한데/능선 너머 별은 더욱 아득하요이다.” 정도의 편지는 어떨까? 편지를 받자마자 달려가거나 답장을 쓰지 않을까? 그러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가슴에 무언가 밀물지듯 밀려오는 것에 함빡 젖어 있으리라.
예술은 상투성에 반역을 일으켜 낯익은 것을 낯설게 하는 것(estrangement, de-familiarization)이다. 매일 보는 낯익은 골목길에서 우리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날 보도블럭 사이로 쑥부쟁이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지른다. 이 탄성이 터져 나온 것은 골목길과 내가 새롭게 만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출퇴근을 하면서 골목길을 지나칠 뿐이지 무엇을 느끼지 않는다. 이것은 골목길과 내가 그냥 따로따로 있었을 뿐이지 서로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엷은 자주빛의 꽃을 발견한 날은 다르다. 우리는 탄성을 지르고는 그 꽃을 향해 걷는다. 이렇게 쑥부쟁이와 내가 만날 때 거기에는 소위 관심과 의미라는 것이 따른다. 그 꽃을 보는 내 머리와 심장이 텅 빈 것은 아니다. 나는 돌 틈 사이로 핀 꽃을 보면서 ‘아! 어느덧 가을이 왔구나!’라고 느끼기도 하고, 더 나아가 그 꽃이 흐드러지던 고향 언덕을, 어린 잎을 따서 무쳐주시던 어머니를, 그 꽃을 보며 미래를 약속하였던 순이를 떠올리기도 한다. 그럴 때, 쑥부쟁이는 나와 만나는 것이며, 그 꽃 그대로의 쑥부쟁이가 아니라 가을로, 고향언덕으로, 어머니와 옛사랑으로 의미를 확대하는 것이다.
꼭 쑥부쟁이가 피지 않아도 좋다. 매일 보는 골목길, 전혀 어제와 다르지 않은 그 길에서 어느 날 문득 ‘산업사회의 모순과 샐러리맨의 소외과 고독’을 생각할 수도 있고, ‘도시화 속에서도 잔존해 있는 공동체의 유대감’을 느낄 수도 있으며, ‘현대인의 실존’을 떠올릴 수도 있다. 다방에서 매일 보던 낯익은 금붕어에서, 갇혀 있으면서도 적당한 온도와 먹이에 만족하여 살다 죽는 품이 바로 현대인의 자화상임을 인식하는 것처럼, 낯익은 것이 갑자기 낯설어지고 자연스럽던 것에서 홀연히 새로운 세계를 바라볼 때, 바로 그 순간 예술은 싹을 틔운다.
예술은 부정의 형식이다. 낯익은 대지를 깨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이는 것, 낯익은 경험을 낯설게 하는 것, 기존의 낡은 관념의 틀을 깨고 전혀 새로운 세계를 창출해내는 것, ‘기대의 지평’을 깨고 새로운 미의 세계에 노니는 황홀감에 떨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의 본령이다.
예술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부정을 한다. 기존의 코드를 해체하는가 하면, 익숙한 세계를 깨고 전혀 생경한 세계를 보여준다. 의미를 앞세워 현실을 비판하는가 하면, 아무 말 없이 새로운 형식을 내놓는다. 그러기에 ‘낯설게하기’는 사물을 인식하기 위한 수단으로 봉사하는 대신에 사물의 비전을 창출한다.
리얼리스트들은 내용을 통해 현실을 부정한다. 그들은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판하거나 그 속에서의 인간 삶의 고단함과 꿈을 노래한다. 현실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자 하고 현상 너머의 실체를 통찰하고자 한다. 이것에 어떤 의미를 씌워 독자에게 메시지를 던지고자 한다. 모더니스트들은 상투적인 모든 틀들을 부정한다. 낯익은 형식과 감수성을 해체하고 새로운 감수성으로 새로운 형식을 느끼게 한다. 독자들에게 난해하고 생소한 코드를 해독하고 느끼는 즐거움과 낯선 세계에 들어서는 경이를 맛보도록 한다.
상투적 부정은 낯선 세계의 경이
낯설게하기는 파사(破邪)와 유사하면서도 다르다. 낯익은 세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세계로 간다는 점에서 유사하고, 그 세계조차 상투적이라며 끊임없이 깨버린다는 점에서 다르다. 앞의 연재에서 말한 대로 무지개의 빨강 색과 주황 색 사이에도 무한대의 색이 존재한다. 범주를 세분하여 주황을 ‘진한 주황, 아주 진한 주황, 극도로 진한 주황’ 등으로 만 가지, 억 가지로 나눈다 해도 그것은 실제의 색에 이를 수 없다. 인간의 인식과 언어로는 참에 다다를 수 없다.
생명체의 DNA 지도를 완성하면 인간은 생명체의 신비를 벗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완성하고 나서 과학자들은 더 큰 수수께끼에 봉착하였다. 만들고 보니 고등생물인 인간과 쥐 사이에 DNA의 수에서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 인간이 쥐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같은 DNA라 하더라도 인간의 것은 쥐보다 훨씬 많은 기능을 하였던 것이다. 기존의 생명과학이 상(相)의 DNA학이라면 이제부터 새로이 열릴 생명과학은 용(用)의 DNA학이 된 것이다. 신의 입자라 할 힉스입자를 규명한다 하더라도, 아니 인류 문명이 5만 년 이상 지속되고 과학이 계속 진보한다 하더라도 물질과 우주의 궁극 원리는 미제로 남을 것이다.
궁극적인 진리, 즉 참은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드러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인간의 잘못된 마음으로 구분을 하고 범주를 만들고 경계를 짓기에 차별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마음이 삿되고 망령된 생각, 언어기호로 이루어진 틀을 떠난다면 참을 구분하는 모든 허상들이 사라진다. 참은 언어기호와 말, 그리고 글, 언어기호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이성과 의식을 떠나 존재한다. 참이란 평등하여 변이가 없고 어떤 기호나 생각으로도 파괴할 수 없다. 오로지 말과 의식을 떠나 참 마음으로 즉할 수 있는 것이기에 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듯 언어기호로도, 의식으로도 다다를 수 없는 것이기에 참이라 한다. 참과 일체 법은 말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에 진여라고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언어로, 말로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참이 아니다. 그러니 선은 불립문자(不立文字)와 언어도단(言語道斷)을 선언한다.
그래서 혜능은 “모든 것에 참은 없으니 참을 찾으려 하지 마라. 만약 참이란 것을 알아본다면 그것은 모두 참이 아니다. 만약 능히 스스로 참을 가졌다고 한다면 그것은 가짜를 여의어야만 그 마음이 참이라 할 것이다. 스스로 마음이 가짜를 떠나지 않고서는 참은 없는데 어디에 참이 있겠는가?”『육조단경(六祖壇經)』)라 말한 것이다.
“교(敎)가 부처님 말씀이라면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다. 그러기에 교는 언어적 구성물로 이루어져 있고 선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을 선언하고 이를 초월한 체험으로 부처의 마음에 이르고자 한다. 교가 이것과 저것, 알고 모름의 분별을 따져 이치를 헤아린다면, 선은 분별하는 마음을 떠나 곧바로 마음 자체를 가리킨다. 교가 경전을 읽고 설법을 하여 부처의 뜻을 헤아리고자 한다면, 선은 마음과 마음을 통해 깨달아 곧 바로 부처가 되고자 한다. 이렇듯 선은 가르침이 아니라 내 마음 속의 부처를 드러내는 일이요, 구속이 아니라 자유이다. 때문에 이론으로 따져들거나 논리로 입증하거나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답을 제시하는 스승이 있다면 그대의 적”이라고 하는 것이 선이다.”(졸고, 「시가 선이 되고 선이 시가 되다」)
선이 예술이고 예술이 곧 선
위의 글에서 교를 상투적 예술로 선을 좋은 예술로 대체해서 읽어보자. 선처럼, 좋은 예술은 예술가의 말씀이 아니라 마음 세계를 열어 보이고자 한다. 상투적 예술이 세계와 자아, 서사와 주체를 따져 주제를 드러내려 한다면, 좋은 예술은 이런 분별을 떠나 마음 자체를 가리킨다. 상투적 예술이 글을 읽고 담긴 의미를 새겨 작가의 뜻을 헤아리고자 한다면, 좋은 예술은 마음과 마음을 통해 깨달아 곧 바로 예술의 세계에 들어선다. 이렇듯 좋은 예술은 가르침이 아니라 예술가의 마음 세계를 드러내는 일이요, 구속이 아니라 자유이다. 때문에 이론으로 따져들거나 논리로 입증하거나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답을 제시하는 예술가가 있다면 그대의 적”이라고 하는 것이 예술이다.
이렇듯 일심(一心)의 바다로 들어가면 선이 예술이고 예술이 선이다. 예술을 만들고 읽는 마음이 바로 선이요, 선을 행하는 마음이 바로 시심(詩心)이다. 낡은 틀을 산산이 해체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 때 예술이 되고, 집착을 깨고 깨달음을 얻을 때 선이 된다. 예술은 예술가가 새로이 보고 느낀 세계를 기호나 그림을 빌려 드러내고, 선은 선사가 깨달은 바를 공안으로 함축한다. 예술 텍스트를 통하여 낡은 코드를 깨고 새로운 메시지를 드러내지만 텍스트의 진리는 영원히 알 수 없다는 면에서 예술은 공안이며, 의어(義語)를 빌어 부처의 마음을 드러내지만 영원히 다다를 수 없다는 면에서 공안이 곧 예술이다. 좋은 예술이라 할지라도 곧 상투적인 예술이 되고 의어가 문어(文語)로 변하듯, 깨달음이 곧 집착이 된다. 끊임없이 상투성에 반역을 일으킬 때 예술이 생산되고, 집착을 계속 무너뜨릴 때 선이 행해진다.(졸고, 「시가 선이 되고 선이 시가 되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출처 법보신문 970호 [2008년 10월 15일 1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