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태어나는 자리](25)
비애-결핍에서 출발 허무로 귀착하는 비극뿐인 자괴감
김수영은 말했다. 시인은 모든 면에서 백치가 될 수 있지만, 단 하나 시인을 발견하는 일에서만은 백치가 아니라고. 윤대녕의 소설 ‘천지간’은 죽음만이 죽음을 알아보는 세상 이치를 잘 보여준다. 병자의 눈에는 병자가 띄며,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슬픈 사연은, 마음에 슬픔을 간직한 사람만이 보는 법이다. 1939년 망명지 북유럽에서 브레히트(1898~1956)는 노래했다.
해협의 산뜻한 보우트와 즐거운 돛단배들이 /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무엇보다도 / 어부들의 찢어진 어망이 눈에 띌 뿐이다. / 왜 나는 자꾸 / 40대의 소작인 처가 허리를 꼬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김광규 옮김)
브레히트는 평생 해맑은 세상을 그린 서정시를 쓰지 않았다. 이는 그가 세상의 슬픈 사연을 인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남의 수모를 자기 수모로 받아들이고, 또 사람들의 슬픔을 자기 슬픔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똑같은 바다이건만 어부와 유람객의 세계가 명암으로 나뉜다. 그는 가난한 어부의 찢어진 그물이 눈에 밟혀, 돛단배 위의 아름답고 축복받은 세계를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의 슬픔과 세상의 슬픔이 교호하는 가운데 문학은 태어난다.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 문사들의 비애는 우선 생활고에서 발생한다. 자고로 문인 학사의 생활고란 경제적인 궁핍은 물론이요, 자신의 능력이 대접받지 못한다는 심리적인 수모감 때문에 가중되는 법이다. 1786년 정월 박제가는 조선 사회를 뒤흔들 만한 장문의 개혁책을 정조에게 올리면서, 끝에 “특별히 하루 휴가에 말을 받아 쓸 사람 10명을 보내주면 폐부에 담긴 생각을 모두 쏟아낼 것”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임금에게 사자관(寫字官) 10명을 보내달라고 요구할 만큼 36살 박제가의 흉중에는 조선의 100년 대계가 꽉 차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미동도 없었고, 박제가는 그 이전이나 뒤나 규장각의 비정규직 말단 서기에 지나지 않았다. 서른 살 즈음에는 읊조렸다. “앉아서 왕도 패도 손에 놓고 논하여도 / 당장에 소금과 쌀 갖추기도 어렵구나”(坐談王覇易, 立辦鹽米難)라고. 이상과 현실, 경륜과 처지 사이의 거리가 까마득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패기가 넘쳤다. 하지만 마흔 살 즈음이 되자 세상 이치가 눈에 보였고, 패기를 자극했던 그 거리는 비애감을 증폭시킬 뿐이었다.
지사는 쓸쓸하게 늙어감을 슬퍼하고 / 초인(楚人)은 영락하여 꽃향기 탄식하네.(志士凄凉悲老大, 楚人搖落歎芳香.)
그토록 형형했지만 어느덧 체념이 감도는 지사의 눈동자가 눈에 잡힌다. 미국 망명 시절 브레히트도 글을 팔아 극심한 생활고의 일부를 해결하려고 했는데, 그 심정을 이렇게 노래했다. “아침마다 밥벌이를 위하여 / 거짓을 사주는 장터로 간다.”(‘헐리우드’, 1942) 끊임없이 문학으로 세상을 변혁시키고자 했던 브레히트도 굶주림 앞에서는 글을 써 들고 시장에서 값을 흥정해야만 했다.
1735년 1월 조선 왕실에 뒷날의 사도세자가 태어났다. 태어난 지 100일 만에 어미 곁을 떠나 내시와 나인들 손에서 자랐다. 자라면서 부왕 영조로부터 극심한 불신과 가혹한 꾸중을 들었다. 그의 마음에는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이는 난폭함과 광증(狂症)으로 표출되었다. 뒷날 난폭한 살생에 대해 묻는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마마께서 사랑해 주지 아니 하시기에 서글프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 화(火)가 되기에 그러합니다”라고 대답했다. 혜경궁 홍씨도 남편 사도세자의 문제점이 모두 어려서 자애를 받지 못한 때문이라고 여겼다. 부자 사이의 어긋난 인연은 끝내 1762년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이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한중록’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부자 사이의 대화 불통과 애정 결핍이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문제가 놓여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는, 200여년의 시대와 대해를 건너뛰어 카프카(1883~1924)의 사연을 떠올리게 한다. 자수성가한 상인으로 기골이 크고 독선적이었던 아버지는, 병약하고 소심한 아들 카프카를 이렇게 몰아붙였다. “난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만큼 해냈는데, 부족한 게 없는 너는 왜 그렇게 밖에 못하느냐?” 카프카는 수모감에 사로잡혔다. 합리적이고 도덕적 외양을 띤 모욕은,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저항하지 못하고 내면화하게 한다.
뒷날 카프카는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에게는 세 개의 세계가 있었다고 고백했다. 하나는 노예인 자신이 사는 곳, 다른 하나는 거부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인 아버지가 사는 곳, 세 번째는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남들의 세계이다. 자기 글쓰기의 주제는 모두 아버지라고 털어놓았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벌레가 되고(‘변신’), 영문도 모른 채 체포되어 심판을 받고(‘심판’), 목적지인 성에 끝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에서 배회하는(‘성’) 인물들은 모두 카프카의 분신들이다. 카프카의 모든 소설에는 유년기부터 축적된, 수치심에서 비롯된 비애감이 운무처럼 끼어있다.
18세기 후반 이웃 청나라에서는 ‘홍루몽’이 탄생했다. ‘홍루몽’은 청나라 전성기 금릉(金陵, 지금의 난징)의 최고 가문인 영국부(榮國府)의 몰락 과정을 여성 인물들의 생활상을 중심으로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인물은 임대옥(林黛玉)이다. 대옥은 여섯 살 때 엄마를 여의고 외가인 영국부로 보내졌다. 원체 병약했던 대옥은 번화한 집안의 한 구석에서 차츰 소외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녀는 외사촌 오빠 가보옥(賈寶玉)과 애틋한 사랑에 빠지지만, 그 사랑은 금기시된다. 소심한 대옥은 더욱 상심하여 고개를 숙인 채 시름에 잠겨있거나, 까닭 없이 눈물을 흘리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늦봄 망종(芒種) 무렵, 집안 여인들은 모두 꽃의 신을 전송하는 화신제(花神祭)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대관원(大觀園)의 꽃나무들은 화려하게 장식되고 분위기는 들썩거렸다. 그 시간 대옥은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떨어진 꽃잎들을 모아 비단주머니에 담아 장례식을 치러주다가, 거기서 자신의 운명을 느끼고 슬픈 노래를 부른다. 뒷날 사랑을 빼앗긴 임대옥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삶의 허무를 자각한 가보옥은 출가한다. 이보다 앞서 태허환경(太虛幻境)의 경환선녀(警幻仙女)는 두 사람의 운명을 “깨우친 이는 불문에 몸을 숨기고 / 어리석은 자는 헛되이 목숨 버리리”(看破的遁入空門, 痴迷的枉送了性命)라고 예언했는데, 이것이 곧 ‘홍루몽’의 주제이다. ‘홍루몽’ 비애의 근원은 허무이다.
프란츠 파농(1925~1961)은 “식민지 사회는 본질적으로 병적이고 신경증 사회이며, 이는 개인에게 그대로 전이된다”고 했다. ‘예기(禮記)’는 “망한 나라의 음악은 슬프면서 옛일을 떠올리니, 그 백성들이 괴롭기 때문”(亡國之音, 哀以思, 其民困)이라고 말한다. 이들 말대로라면, 식민지 현실을 회피하지 않은 우리 문학은 본질적으로 병적이며 슬플 수밖에 없다. 망국의 망명자 신채호(1880~1936)는 백두산을 찾아가는 길에 이렇게 읊조렸다.
인생살이 마흔이 너무나도 지루해라 / 가난과 병 이어져 잠시 아니 떨어지네 / 그중 가장 한스러운 건 물과 산 다한 곳에서도 / 목 놓아 통곡하고 노래하지 못함일세.(人生四十太支離, 貧病相隨暫不移. 最恨水窮山盡處, 任情歌哭亦難爲.)
조국의 땅이 다한 곳에 이르러서도 망국의 지식인은 마음껏 노래하지도 목 놓아 통곡할 수도 없었다. 신채호는 터져 나오는 비탄도 흘러내리는 피눈물도 도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일제말 이태준(1904~?)의 문장은 정지용의 시와 쌍벽을 이뤘다. 그의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함축이 풍부하고, 예스러운 격조를 지키면서도 현실을 응시하는 시선이 살아 번뜩인다. 그러나 이태준의 문학에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건, 그가 식민지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잠시도 외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의 단편에는 식민지 치하에서 전락에 전락을 거듭하는 농민·노동자·작부·어린이·지식인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남산에서 딸에게 주기 위해 무심코 벚꽃 가지를 꺾었다가 느닷없이 따귀를 맞는 도시 노동자(‘봄’, 1932)나, 조선 백성과 서양인에게서 차례로 모욕을 당하고 파고다공원에서 잠을 자다가 갑자기 순사에게서 목덜미를 얻어맞고 달아나는 고아 소년(‘點景’, 1934)은 영락없는 식민지 조선인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브레히트가 찢어진 어망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것처럼, 이태준은 식민지 조선인들의 슬픈 삶을 외면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웃의 슬픔을 보지 못한다면 도대체 그 문학을 어디에 쓸까?
세상에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참 많다. 그중에서도 근래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그 말에 담긴 끔찍한 비극을 뻔히 알면서도 오로지 자기 권력과 이익을 위해 좌익이니 빨갱이니 하는 말들을 교묘하게 내뱉는 사람들이다. 이보다 더 나를 슬프게 하는 건, 그런 사정도 모르면서 앵무새처럼 그 말들을 되풀이하는 사람들의 천진함이다.
세상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하지만 세상의 슬픈 사연은 슬픔을 간직한 사람만이 볼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의 슬픔과 세상의 슬픔이 교호하는 순간 문학은 깨어난다. 이웃의 슬픔을 보지 못한다면 공동체도 문학도 없다
<이승수 경희대 연구교수>
출처 경향신문
'***풍경소리 > 착한 글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인 절반 이렇게 산다]“사회 전체가 비정규직 바다” (0) | 2008.07.16 |
---|---|
세미나 : 진언(Mantra)과 불교수행 (0) | 2008.07.07 |
한적(閑寂) - 세상 모든 움직임 그곳 고요함에서 비롯되었어라 (0) | 2008.06.30 |
자판기 커피 (0) | 2008.06.30 |
신념-깨어있는 양심 혼탁한 세상 속갈 길을 밝히다 (0) | 2008.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