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착한 글들

자판기 커피

slowdream 2008. 6. 30. 15:48
 

<살며생각하며> 자판기 커피



무슨 커피를 잘 마시느냐는 물음에 나도 모르게 자판기 커피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다들 와르르 웃어서 좀 민망해진 적도 있었지만, 나는 자판기 커피를 곧잘 마신다. 위생이 엉망이라 불결하다느니, 너무 독하다느니….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계속 자판기 커피를 자주 마신다. 어떤 이는 영부인이 되고 싶어 영부인 커피를 마시는 거라는 농담도 듣지만, 농담이라도 그건 악담이다.


이유는 아주 유치하다. 자판기 커피는 우선 내 노동을 최저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내 손으로 타서 마시기 싫은 때는 성당으로 간다. 비 오는 때는 우산을 쓰고 간다. 내 기호에 맞게 내 손으로 타서 마셔야 제 맛을 즐길 수 있다는 논리가 왜 옳지 않겠는가마는, 부끄럽게도 나는 커피맛을 즐기는 멋과는 반대로 필요에 의해 커피를 마셔온 적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내 손이 닿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 일상에서, 한가롭게 원두커피를 뽑아 멋진 곳에 앉아서 품위와 멋을 누리며 천천히 음미하는 호사와는 거리가 멀게 마셔 왔다는 점이 커피에게도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나를 귀찮게 하는 건 무엇이나 싫은 게으른 이기주의자다. 언제부턴지 내 손을 요구하는, 일답지도 못한 일은 무엇이나 내게는 노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커피를 마시러 성당으로 간다. 물론 거리의 모퉁이나 상가 앞에도 자판기들이 있긴 있다. 그러나 가는 김에 걷고, 걸으면서 생각하는 등 겸사겸사로, 운동화만 신으면 되는 자판기 커피를 마시러 간다.


자판기 4대가 놓인 넓고 시원하고, 더구나 1층에 있어 좋은, 만남의 방에서, 150원에 한 잔을 뽑아 푹신한 의자에서, 또는 탁자 앞까지 의자를 바짝 끌어당겨 앉아서 창 밖의 푸른 산줄기, 또는 비 오는 날은 빗발을, 가을에는 흩날리는 낙엽을, 겨울에는 흩어지는 눈발을 내다보며 천천히 마신다. 그런 때마다 마치 묵상 기도를 하는 기분도 들곤 한다. 더 마시고 싶으면 여러 잔을 뽑아 마셔도, 3000원짜리 한 잔을 좁고 답답한 찻집에서 마시는 것보다 더 멋지기 때문이다. 또 새로 생긴 동네 경양식 집에서는 5000원이나 주어야 하고, 게다가 좁은 홀 귀퉁이에 혼자 앉아, 웨이터와 손님들의 시선도 의식해야만 되니, 약속이 아니면 자주 가지질 않고, 무난한 약속은 성당에서 만나 함께 자판기 커피나 다른 차를 뽑아 마시며 편안하게 걷곤 한다.


가끔은 두세 잔을 뽑아 섞어서 들고 성당 뒷산을 오르기도 한다. 동산 같은 산이지만 사계절의 자연을 누릴 수 있어 무척이나 호강스럽다. 이른 봄날에는 커피잔을 들고 산을 오르며 보니, 새싹들이 신의 호명(呼名)에 졸음 덜깬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듯이 움이 돋아나고 있었다. 요즘은 시원한 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 정신을 놓아버리면, 바로 등 뒤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조차 안 들리기도 한다. 이런 곳에서는 아는 사람들끼리도 모르는 채 지나가 주는 게 예의인 줄을 다들 알고 있어 좋다.


커피 기운에 정신이 더 맑아진 나머지, 여기저기 걷기도 하고, 내려가서 성당 안에 들어가 묵상도 하고 나면, 뭔가 모를 충만감으로 몸과 마음이 개운해져서 좋다.


다음의 소품 ‘운동화, 두 귀에 신겼다’는 이런 과정에서 태어난 것이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해주시지 않으니

더 이상 기도하고 싶지 않다고 불평을 하자

그럴 리가 없다는 수녀님은

기도할 때 귀에 운동화를 신겨보라고 했다



새 운동화를 신고 신이 난 두 귀가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

금방 하늘나라 문 앞에까지 왔는데

걱정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글라라의 전화는 늘 통화중이라

도무지 통화를 할 수가 없단 말이야

게다가 가슴에는 빈틈이라고는 한치도 없어서

응답을 보내도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번번이 돌아와 버리니, 정말 큰일이야

저 잡념자루를 어쩐다?”



안 보이는 분의 안 들리는 음성을 들은 것도 같다. 그래 나는 잡념자루다. 잡념이 상념으로 자라고 다시 신념으로 자라게 될까 겁나면서도, 내 머리는 늘 너무너무 복잡하다. 늘 무슨 생각으로 빌 순간이 없는 것 같다. 아무리 정신을 놓아보려 노력해도, 머리는 비워지지 않고 다시 다른 생각이 끼어들거나 엉뚱한 생각으로 바뀌어버리곤 한다. 묵상이나 명상을 하려고 해도 상상, 공상, 망상으로 변질되어 버리곤 한다. 가슴에도 뭔가가 너무너무 꽉 차서 한 치는커녕 반 치의 틈새도 없는 듯 가슴이 답답하다. 명치 끝에 주먹만한 쇠뭉치가 매달린 듯이 무겁고 답답해서 힘이 든다.


이래서 과학시대일수록 종교가 필요하리라. 어디에나 계시는 신(神)이지만 교회나 절간이 따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도 알 만하다. 나는 매사에 엉터리이고 종교에서는 더욱 엉터리지만, 종교적 공간은 늘 좋다. 시내에 나가서 다음 약속 사이에 시간이 좀 남으면 찻집 아닌 조계사에 들르곤 한다. 성당이나 교회이건 사찰이건 대형화하는 게 불만이긴 하지만, 자그마하고 아늑한 종교의 공간에 들어서면 한없이 작아지면서 크고 드높은 절대자의 옷깃에 닿아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 좋다. 신의 음성은 150원짜리 커피 한잔을 즐기면서도 덤처럼 들을 수도 있었으면 하고.


[[유안진 / 시인, 서울대 명예교수]]


출처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