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건너 세상은 뜨고 지고…강 따라 사람도 살고 지고
내가 강을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다. 이번 봄에는 강으로 소풍을 가기로 했다고 담임선생님이 말했을 때 교실 안은 온통 환성과 박수로 법석이 벌어졌다. 우리 마을에서 강까지는 이십여 리 떨어져 있어 그때까지 강을 구경한 아이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소풍날이 되어 한나절 걸어가 고개에 올라서니 새파란 강물이 발 아래로 내려다 보였다. 강 언덕에는 희뿌연 살구꽃이 줄지어 만발해 있고, 나룻배가 꽃그늘 속을 미끄러지듯 가고 있었다. 강 건너로는 양철 지붕의 이층집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지금의 목계다. 나는 지금도 강 하면 새파란 물줄기와 함께 살구꽃이 만발한 언덕이 떠오르고 나룻배와 양철지붕의 이층집들이 생각난다. 이후 강가의 이층집들이 즐비한 마을에 가 사는 것이 내 꿈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강과 가까워진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서부터다. 나는 시골집을 떠나 읍내의 고모댁에 기숙을 했는데 넉넉지 못한 고모를 위해서 주말마다 한 말씩의 쌀과 몇 가지 찬을 가져다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토요일 집에 왔다가 일요일날 쌀 한 말과 찬을 지고 돌아가는 것이 주말의 행사가 되었다. 나루를 건너고 강을 따라 가는 오십 리 길이었다. 일요일 읍내에 도착하면 점심때가 훨씬 지나 있는 가깝지 않은 거리였지만, 조금도 고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강을 끼고 걷는 길이 많았던 까닭이 아니었나 싶다.
우선 나루가 좋았다. 우리가 건너야 할 강물은 탄금대 합수머리를 형성하는 달래강 줄기로 넓지 않았지만, 배는 군용 트럭이며 지프도 실어 나르는 큰 배였다. 사공은 늙은 사공과 젊은 사공 둘로서, 젊은 사공이 늙은 사공의 조수였다. 늙은 사공은 늘 취해 있었고 너무 취해 삿대를 강물에 빠트리는 일조차 있었지만, 절대로 젊은 사공 혼자서 배를 부리게 두지는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한 배 차기를 기다려 건너편 주막에서 술을 마시며 앉아 있곤 했는데, 소리도 잘하고 얘기도 잘하는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을 위해서 배를 이용하는 인근 주민들은 집집이 가을이면 쌀 한 말, 여름이면 보리 한 말씩을 갹출했다.
가장 장관은 뗏목이었다. 이른 여름 또는 늦가을의 농한기가 뗏목이 내려가는 철이었는데, 한 대가 내려가는가 싶으면 두 대 세 대가 그 뒤를 따랐다. 다섯 대 여섯 대 혹은 열 대 스무 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려가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사공은 보통 앞뒤로 하나씩 둘이었는데, 그들이 가고 있다는 것을 동네방네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큰 소리로 노래들을 주고받았다. 앞사공이 부르면 뒷사공이 받고, 앞배에서 부르면 뒷배에서 이어 부르는 식이었다. 그들이 부르던 노래가 정선 아리랑이었다는 사실은 그 뒤에 알았지만, 꾀꼬리 뻐꾸기가 간간이 장단으로 끼어드는 그 노래가 너무 좋아, 우리는 갈길을 잊고 한참씩 멍하니 강 언덕에 서 있고는 했다. 뗏목 바람에 길이 늦어 집에 밤늦게 도착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다.
강가에는 탑, 마애불, 비석 같은 것도 많았다. 중앙탑(탑평리 7층 석탑)은 이미 그때도 널리 알려져 있어, 강이 내려다보이는 그곳은 우리들이 가다오다 으레 한 번 쉬는 곳이었다. 도시락도 거기서 먹고 고구마 따위 군것질도 거기서 했다. 늘 함께 다니던 상급생 족형 중에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그럴싸하게 꾸며대던 탑에 얽힌 전설은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옛날에 두 나그네 중이 그곳에서 만났다. 인사를 하고 얘기를 하다 보니 한 날 한 시에 하나는 의주에서 출발을 했고 하나는 동래에서 출발을 했다. 아, 여기가 우리나라 한복판이로구나, 그래서 탑을 세웠으니 그것이 바로 중앙탑이라는 것이었다. 국사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족형은 강 주위에 있는 성터에 대해서도 특유한 상상력을 발휘했는데, 말하자면 중앙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강을 향하고 앉은 장미성과 보련성은 각각 독립된 국가였을 것이라는 따위다. 서로 싸워 마침내 장미성이 이김으로써 보련성은 더 흔적만 남게 되고, 또 장미성은 뒤에 삼국 중 어느 한 나라로 통합되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는 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이 강을 차지하기 위해서 피터지게 싸웠을 것이라는 얘기도 했는데, 물론 이 얘기는 그의 상상의 소산만은 아니었지만, 아주 실감나게 싸움의 현장을 재구성함으로써 길을 걷는 고됨을 덜어 주었다.
중원 고구려비로 알려져 있는 비석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이다. 늦은 아침을 먹고 출발해서 점심 전에 도착하는 강에 이르기 직전의 마을에 빨래터가 있었다. 빨래군이 없으면 잠시 냇가에 앉아 쉬곤 했는데, 족형이 눈여겨보는 돌이 하나 있었다. 저거 보라구, 무슨 글씨 같은 것이 안 보여. 그러나 그의 관심은 관심으로 끝났고 십 수 년 뒤에 그 돌이 남한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의 비석으로 밝혀졌다. 초등학교 교사로 있던 그의 형은 그의 이런 쓸데없는 관심이 미워 그를 굳이 법과로 진학시켰고 그의 상상력은 여기서 더 성장하기를 그쳤다.
중학교 시절 강촌에 가서 일주일을 보낸 일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한때 나는 하숙을 했는데 동숙생이 강마을 아이였다. 강마을이 너무 가고 싶던 터라 여름 방학이 되자 그 아이를 따라갔다. 제일 즐거웠던 일은 저녁에 얕은 여울에 어항을 놓았다가 새벽에 나가 어항에 가득 든 버들치, 모래무지, 메기 등을 한 망태 건져 오는 일이었다. 때로는 그애네 쪽배를 타고 강 건너까지 가서 어항을 놓는 것이었는데, 그 동네에 사는 다른 아이들이 어디에 놓으면 고기가 많이 든다고 알려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저 아이는 고모의 조카, 저 아이는 집안 형수의 동생, 이런 식으로 양쪽은 너무도 가까이 지내고 있었다.
한 번 새벽에 어항을 건지러 쪽배를 타고 간 일이 있었다. 물풀 사이로 오리들이 도망치는가 싶더니 이윽고 자욱한 강안개 속에서 배 한 척이 나타났다. 그물을 치러 나가는 배였다. 내 친구가 인사를 하자 상대가 큰 소리로 외쳤다. 늬 엄마 한 번 다녀가라고 하거라. 그 친구의 외가가 건너 마을로서, 강은 마을과 마을을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이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강으로부터 세상을 배우고 강으로부터 문학을 공부했다. 강을 통해서 세상에 나가고 강을 통해서 사람을 만났다. 강이 내게는 길이요, 학교였던 것이다. 남한강은 물론 북한강, 낙동강, 영산강, 금강 그리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내가 열심히 강을 찾아다닌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강은 사람과 마을을 막거나 가르지 않고 이어주고 안아준다는 사실도 강을 보고 다니면서 알았다.
마을과 사람들이 강을 닮고 강 또한 마을과 사람들을 좇아 산다는 것도 알았다. 사람들이 자기들 욕심 때문에 그 흐름을 억지로 막거나 돌리면 강은 더없이 가난하고 초라해지며, 마을과 사람들도 더없이 가난하고 초라해진다는 현실도 보았다. 강은 강일 뿐 아니라 문화이기도 하고 역사이기도 했다.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대운하에 대한 논란이 영 수그러들지를 않는다. 그것이 대선 공약이었다는 명분을 버리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물류와 관광이 가져다주는 막대한 경제적 효과가 운위되지만, 더 많은 전문가들이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건설 경기를 크게 부양하고 대량으로 고용을 창출하는 반짝 효과는 있을 터이다. 그러나 강과 강을 무리하게 잇다 보면 강이 망가지고 국토가 파헤쳐지면서 문화와 역사도 파괴된다. 한 시대의 경제적 유혹 때문에 몇 백 년 몇 천 년을 이 땅에서 살 후손들에게서 문화와 역사까지를 배앗는 결과가 된다. 덮었던 것을 벗김으로써 죽었던 것을 되살린 청계천 복원과는 질에 있어서도, 수준에 있어서도 다르다.
우리의 강과 땅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만의 강과 땅이 아니고 천 년 전부터 살아온 우리 조상들의 강이고 땅이며, 그들이 일궈 온 문화며 역사요, 우리 뒤로 수 천 년을 살 자손들의 강과 땅이라는 점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신경림 | 시인 >
출처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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