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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나를 알아주는 사람 말없이 통하는 사람 그대는 ‘벗’이다

slowdream 2008. 6. 10. 18:38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21)


우정-나를 알아주는 사람 말없이 통하는 사람 그대는 ‘벗’이다



성운(1497~1579)은 속리산 품에서, 조식(1501~1572)은 지리산 자락에 살았다. 하루는 속리산에서 지리산 자락의 조식을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성운의 편지를 가져온 것이다. 조식은 그를 기다리게 해놓고 답장을 썼다.


이제 이중선(李仲宣)이 공을 대하던 눈으로 다시 나를 보는 것이, 마치 선가(禪家)에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불법을 전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말없는 가운데서도 공의 모습과 일상의 생활을 알 수 있으니, 우리 둘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 자리에서 등불 아래 손님을 앞에 놓고 편지를 쓰는데, 쌓였던 정이 막혀 글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다시 붓을 잡았는데 할 말을 잊고 말았습니다.


편지를 가져온 사람의 눈에 벗의 모습이 보인다. 마음이 지척이면 천 리도 지척이라고 했다. 사람이 곧 떠나야 하니 답장을 써야 하는데, 가득 쌓인 회포가 쉽게 나오지를 못한다. 말은 작은 그릇인지라 큰 그리움을 담아낼 재간이 없다. 조식은 안타까운 마음만을 겨우 적었다. 붓을 잡고 종이를 내려보다가, 붓을 놓고 천장을 바라보기를 반복하는 조식의 모습이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1751년 경기도 광주 텃골 안정복(1712~1791)의 집에 안산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이익(1681~1763)의 편지를 가져온 것이다. 안정복은 편지를 어루만지며 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스승의 손길이 만져지는 듯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필획이 예전 같지가 않다. 기력이 크게 쇠하신 건 아닐까! 그는 애잔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답장을 썼다.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엎드려 살펴보매 자획이 떨리고 매끄럽게 글씨가 되지 않는 모양이 있으니, 혹 병환이 중하신 게 아닌지 억측을 해봅니다.


안정복은 편지에서 글자가 아니라 스승을 읽은 것이다. 1746년 이후 18년 동안 겨우 세 번에 걸쳐 나흘을 만났으며, 마지막 12년 동안은 아예 서로 얼굴도 보지 못했다. 그래도 편지를 통해 대화는 면면히 이어졌고, 서로에 대한 신뢰는 산악처럼 무거웠다. ‘동사강목’에는 스승의 가르침이 배어 있고, ‘성호사설’에는 제자의 손길이 묻어 있다. 스승과 벗은 하나라고 했으니(이지) 두 사람은 사제이자 붕우이고, 이들 사이에 오고간 편지는 만고에 썩지 않을 문학이다.


제(齊)나라의 권력을 다투는 두 왕자의 대결에서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은 다른 쪽에 섰다. 결과는 포숙이 가담한 왕자의 승리였다. 그가 뒷날의 환공(桓公)이다. 관중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포숙은 관중을 적극 천거했고, 환공은 관중을 등용했다. 사람들은 관중의 변절을 비난했지만, 포숙은 끝까지 관중을 두둔해 주었다. 관중은 주군 환공을 천하의 패자로 만들었다. 뒷날 관중은 포숙을 두고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이라는 말을 남겼다. 사마천은 관중의 일생을 입전하면서 이 일화 하나만을 소개했고, 그 뒤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천하 사람들은 관중의 현명함을 칭송하지 않고, 포숙의 사람 알아보는 능력을 대단하게 여겼다.” 관중의 성공 요인은 단 하나,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고 지켜주고 사준 벗의 힘이었다는 것이다. 목걸이를 살리기 위해 여타의 액세서리를 다 포기하듯, 사마천은 이 주제를 살리기 위해 다른 일화는 모두 버렸다. ‘관포지교’가 이토록 유명해진 것은, 두 사람의 우정이 대단해서라기보다는 사마천의 문장 덕분인 셈이다.


1766년 홍대용(1731~1783)은 북경의 유리창 거리를 거닐다가 엄성(嚴誠), 반정균(潘廷均), 육비(陸飛) 세 수재를 만났다. 홍대용은 넓은 땅에서 제대로 된 선비를 만나고 싶었고, 세 수재 또한 진정한 지기(知己)를 만나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홍대용이 북경에 머무는 두 달 동안 이들은 수시로 편지와 필담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이들은 뒷날을 기약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조선에 돌아온 홍대용은 왕복 편지와 필담을 묶어 ‘회우록(會友錄)’이라 했다. 글로써 벗을 모은다는 ‘以文會友’(논어)에서 가져온 말이다.


이 ‘회우록’은 당시 조선 청년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이덕무는 이 ‘회우록’의 마디마디마다 자신의 논평을 첨부하여 엮고는 ‘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라고 했다. 당나라 왕발(王勃)의 시구, “세상에 알아주는 벗이 있다면, 하늘 끝에 있어도 이웃과 같네(海內存知己, 天涯若比隣)”에서 가져온 말이다. 세 사람 중 동갑인 엄성과의 우정이 특별했다. 엄성은 홍대용이 선물한 조선산 먹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떠났다. 엄성의 아들 앙(昻)은 홍대용을 백부라고 일컬으며 아버지의 유고를 부쳤는데, 이 책은 세상을 돌고 돌아 9년 만에야 도착했다. 그 안에는 엄성이 손수 그린 홍대용의 영정이 들어있었다. 박지원은 이 사연을 중심으로 홍대용의 묘지명을 지었는데, 이 글이 또한 절세의 명문이 되었다.


차가운 겨울 풍경의 그림 한 폭이 있다. 허름하고 단조로운 집에 소나무 네 그루만 서있다. 첫 느낌은 그저 휑할 뿐이다. 김정희(1786~1856)의 ‘세한도(歲寒圖)’이다. 싱겁기까지 한 이 그림이 뭐가 대단해서 국보나 될까? 그 답은 옆에 적혀있는 제발(題跋)에 있다. 잘 나가던 김정희의 처지는 1840년 제주에 유배되면서 일순 적막해졌다. 그런데 중인 제자 이상적(1804~1865)만은 달랐다. 그는 역관으로 북경을 드나들면서 구입한 귀한 신간 서적을 해마다 스승에게 보내주었던 것이다. 학자에게 책은 생명 같은 것 아닌가!


감동한 김정희는 이 단출한 그림을 그렸고, 그 사연을 글로 지었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송백이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는 말을 들며, 공자가 특히 이 말을 한 것은 ‘날씨가 추운 때에 마음에서 느껴 일어난 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한(歲寒) 시절 겪는 고통과 은혜에 대한 절절한 고마움을 모두 공자를 내세워 말하게 하고 있다. 마지막은 “한 사람은 살고 한 사람은 죽었을 때, 한 사람은 부귀하고 한 사람은 빈천할 때 사귀는 정을 알 수 있다”고 한 사마천의 말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문득 그림은 김정희와 이상적의 사연은 물론 고금의 현인 지사들이 겪는 시련과 고통, 그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지절과 우정으로 가득해진다.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라는 시조 구절처럼, 휑한 화폭은 온갖 사연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이 해 겨울 이상적은 북경에 가면서 이 그림을 품에 넣고 갔다. 이듬해 정월 옛 친구의 연회에 초대된 그가 살짝 그림을 내어놓자, 그 자리에 있던 열여섯 문사들이 감탄하며 다투어 시문을 지었다.


거문고 줄 꽂아놓고 홀연히 잠에 든 제 / 시문견폐성(柴門犬吠聲)에 반가운 벗 오는고야 / 아희야 점심도 하려니와 탁주 먼저 내어라(김창업, 1658~1721)


스르렁 스르렁 줄을 골라보고, 솔바람에 신곡을 타보다가 결국은 마른걸레로 잘 닦아 한 구석에 세워두고 잠이 든다. 왜 잠이 들었을까? 연주를 들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을 알아줄 이가 없음이다. 그때 문득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옳거니, 거문고 연주를 들어줄 벗이 사립문을 들어서고 있지 않은가! 마땅히 술이 먼저고 밥은 나중이다. 찾는 이 없는 초야의 적막한 집은 손이 찾아오면서 아연 활기를 띤다. 우리 삶은 한 사람의 지기를 얻는 순간 생동하기 시작한다. 이 짧은 시조는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이규보(1168~1241)는 눈보라 속에 말을 타고 벗을 찾았는데 마침 벗은 집에 없었다. 그는 채찍을 들어 문 앞에 크게 자기 이름을 쓰고는 이렇게 읊조렸다. “바람아 부디 쓸지를 말고,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려다오.(莫敎風掃地, 好待主人至.)” 보응(普應, 1541~1609) 스님은 황해도 바닷가 산중에 사는 벗이 그리웠다. 그래서 짧은 시를 지어 보냈다. 그대는 푸르고 너른 바다를 보았으리라. 하지만 “그대 향한 그리움을 견주어보면, 바닷물도 이보단 적을 것이네.(若比戀君情, 滄溟水更少.)” 그대로 흉내내어 발길이 어긋나거나 멀리 있는 벗에게 문자라도 넣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가!


말과 글마저 빼앗긴 어둠의 시대, 1942년 봄 경주에서 박목월(1916~1978)과 조지훈(1920~1968)은 처음 만났다. 지훈이 목월을 찾아간 것이다. 지훈은 경주에서 보름을 머물렀다. 그 사이 두 사람은 ‘완화삼’과 ‘나그네’를 주고받았다. ‘완화삼’의 화자는 ‘구름 흘러가는 물길 칠백 리를 달빛 아래 흔들리며 가는 나그네’이고, ‘나그네’의 화자는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를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이다. 모두 가슴이 허허로운 외로운 나그네였다. 빼앗긴 겨울 들, 둘은 나그네로 만났고, 어설프게 주인인양 하지 않았다. 천지간을 홀로 걷는 두 나그네의 대화는 곧 현대시사의 한 면이 되었다.


먼 벗에 대한 그리움, 의기투합의 환희, 위로와 격려, 죽은 벗에게 보내는 인사, 그리고 우도의 타락에 대한 개탄, 모두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이거나 그 자체가 문학이다. 우정은 때로 생사, 시대, 언어와 같은 넓은 간극을 넘나든다. 1614년 춘천, 유배 온 신흠(1566~1628)은 청평사에서 이자현과 김시습의 옛 자취를 떠올리며 “그 뒤로 두 사람을 이은 이 없다 마오, 나도 거기 참여하여 삼현(三賢)이 되어보리”라고 읊조렸다. 빗속에 소쩍새가 우는 밤 나는, 앞서 간 나그네들과 삼우(三友)가 되어 술 익는 마을에서 함께 취하는 꿈을 꾸어본다.


<이승수 경희대 연구교수>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