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태어나는 자리](22)
동경-나는 꿈꾼다 미지의 세계를 고로 나는 존재한다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는 조각구름 몰아가는 바람결에 이끌려 방랑하고픈 생각이 끊이지 않아 1689년 봄부터 가을까지 다섯달 남짓 도보로 여행했다. 몇 년 뒤 그는 여행지 오사카에서 죽으면서 아래 시(하이쿠)를 남겼다.
여행길에 병드니 / 황량한 들녘 저편을 / 꿈은 헤매는도다.
- 김정례 옮김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는 마사이족 언어로 ‘신의 집’이라는 뜻이다. 이 산의 서쪽 봉우리 아래에는 말라죽은 표범의 시체가 놓여 있다. 표범이 무엇을 찾으러 그 높은 곳에 이르러 죽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헤밍웨이(1899~1961)의 ‘킬리만자로의 눈’은 표범의 시체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설가 해리는 아프리카 여행 도중 다리에 생긴 괴저로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사이사이 의식이 없을 때는 환각적인 회고에 젖었는데, 그건 바로 자신이 미처 소설로 쓰지 못한 이야기들이다. 들판 너머에서 어슬렁거리던 하이에나가 갑자기 사람 우는 소리를 냈다. 해리는 썩어 문드러진 다리를 침대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죽어 있었다. 그 순간 해리는 꿈을 꾸고 있었다. 친구가 몰고 온 비행기 안에서 해리는 거대하고 높은 킬리만자로가 햇빛에 반짝이는 모습을 보았으며, 자기가 그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표범은 무엇을 찾으러 그 높은 곳을 배회하다 죽은 것일까?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무엇을 추구하다가 죽음에 이르는 것일까? 표범은 무언가 숭고한 것을 찾았지만 말라빠진 시체로 남았고, 해리의 몸은 끔찍한 상처를 내놓고 죽었지만 그 순간 그는 ‘신의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마쓰오 바쇼는 죽어가면서도 황량한 들녘 저편을 꿈꾸었고, 해리 또한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소설 쓰기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으며 신의 집을 찾아들었다. 두 예는 숨이 멎을 때까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꿈을 접지 않는 인간의 본성을 잘 보여준다.
10여년 전 재일동포 작가 유미리는 ‘작가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아루(ある, 있다)’를 중시한다. 내겐 ‘나이(ない, 없다)’가 중요하다. 한국인도 못 되고 일본인도 못 되는 ‘나이’의 처지를 작품 속에서 살려가고 싶다.” 그녀에게는 국가도, 학력도, 평범한 가족도 없었다. 바로 그 ‘없음’에서 자신의 문학이 태어난다는 것이다. 유미리의 말을 들으면, “천하만물은 유(有)에서 생기는데, 이 유(有)는 무(無)에서 나온다”(天下萬物, 生於有, 有生於無)는 노자의 말이 쉽게 풀린다. 모든 존재는 부재에서 나오는 법이다.
동경은 지금 여기 내게 없는 것, 미지의 세계를 향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부재와 결핍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욕망이고, 공간과 시간과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이다. 세상 노래와 이야기들 대부분은 그러한 마음의 작용으로 빚어진 것들이다. 고인 물은 시내를, 온실 속 화초는 거친 산야를, 나무는 구름을, 지상의 짐승은 천상세계를 꿈꾼다.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된다. 지금 여기의 이야기는 현실이고, 지금 여기로부터 멀어질수록 낭만이 되고 환상이 되고 공상이 된다. 문학의 성격은 아주 간단하게 결정되는 것이다.
미시시피강 유역의 어느 마을. 톰은 틀에 박힌 공부와 생활을 견디지 못한다. 방랑아 허클베리 핀은 술주정뱅이의 아들이다. 마을 아주머니들은 모두 그를 송충이 보듯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오히려 그의 환경을 동경하고, 그와 같이 되기를 바라기까지 한다. 어느 날 톰과 허클베리 핀, 그리고 엄마에게서 매를 맞고 나온 조 하퍼는 작당하여 해적이 되기로 하고 섬으로 간다. 섬에서 이들은 담배 피우기 등 어른의 행동을 흉내내며 온갖 모험을 감행한다. 마크 트웨인(1835~1910)의 ‘톰 소여의 모험’은 어른과 모험을 동경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다.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세계 여러 나라의 산적 이야기들에는 발전된 사회에서는 잃어버린 순수와 모험에 대한 동경이 있다고 했다(밴디트).
반대로 타락한 세상을 견디지 못하는 어른들은 아이들의 마음에나 있을 법한 순수한 세계를 꿈꾸기도 한다. 윤동주는 어머니를 부르며, 별 하나에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이국 소녀들의 이름, 그리고 비둘기와 토끼, 릴케 등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하지만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 별이 아슬히 멀듯이.”(‘별 헤는 밤’, 1941) 그는 함께 있고 싶은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했지만, 그들은 하늘의 별처럼 너무 멀리 있었다.
박목월의 1940년대 시에는 ‘청운사(靑雲寺)’ ‘구강산(九江山)’ ‘자하산(紫霞山)’ 같은 낯선 지명들이 나온다. 그는 불안한 시대에 푸근하게 은신할 수 있는 ‘어수룩한 천지’를 그리워했지만, 일본 치하에서는 은신할 수 있는 한 치의 땅도 없었다. 박목월은 마음의 지도를 그렸다. 주산은 태모산(太母山)이고, 그 줄기를 따라 태웅산(太雄山), 구강산, 자하산이 있다. 자하산 골짜리를 흘러내려와 잔잔한 호수를 이룬 것이 낙산호(洛山湖)와 영랑호(永郞湖)이다. 영랑호 맑은 물에 그림자를 드리운 봉우리가 방초봉(芳草峰)이며, 방초봉에서 아득히 바라보이는 자하산의 보랏빛 아지랑이 속에 아른거리는 낡은 기와집이 청운사이다. 그 사이 어딘가에는 푸른 노루가 풀을 뜯고 있다. 이 지도 한 장을 그려 걸어두고 싶다.
탄지신공(彈指神功)은 손가락으로 작은 돌을 튀겨 어마어마한 위력을 내는 신공으로 동사(東邪) 황약사의 절기다. 타구봉법(打狗棒法)은 거지들이 개를 물리치다가 터득한 봉술로 북개(北) 홍칠공의 비술이다. 곽정과 장무기는 불의의 사고로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세상을 떠돈다. 재주가 무디기 짝이 없는 이들은 좌절하고 번민하고 조롱받는다. 하지만 끈기와 겸손으로 여러 스승을 차례로 섬기고, 그 과정에서 숨은 잠재력을 발휘하여 극강의 고수가 된다. 무협지 ‘영웅문’의 이야기다. 무협의 세계는 왜소하고 무력하고 소심하고 상처받은 인간들의 동경이 투사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나의 꿈은 아직도 종종 강호를 횡행한다.
사람들의 모든 동경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아무래도 ‘방랑의 꿈’일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모든 일상을 뒤로 하고 훌쩍 떠나 나그네가 되는 것, 부서의 장에게 사표를 제출하고 동료들을 뒤로 한 채 표표히 직장을 떠나는 것, 그것은 나를 가두고 있는 일체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실제 훌쩍 떠남을 감행하든 아니든, 그렇게 해서 얻은 자유가 다시 삶을 구속하든 아니든, 떠난 뒤 떠나온 곳을 그리워하든 아니든, 사람들은 누구나 ‘방랑하는 나그네’를 동경한다.
헤르만 헤세(1877~1962)는 이러한 방랑의 정신을 실천하고 문학으로 구현한 대표적인 문사이다. 그의 삶은 방랑의 연속이고 방랑 그 자체였다. 그는 방랑을 통해 성숙했고, 작가가 되었으며, 수많은 이야기들을 빚어냈다. 헤세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방랑을 통해 내면의 안주를 얻는다. 그의 시에서는 바람과 구름 등이 방랑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한다. 그는 읊조렸다. “산 너머 저 어디엔가 / 나의 먼 고향 있으리.” 방랑을 거쳐 닿는 곳은 고향이며 만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도달한 목표는 더 이상 목표가 아니며, 방랑자의 사랑은 소유하지 않는다.
집에서는 방랑을 꿈꾸고, 방랑이 지치면 다시 집을 그리워하는 것이 나그네의 삶인데, 그 과정에서 나그네들은 자기도 모르게 글을 잉태하고 낳는다. 김시습은 떠돎에 지쳐 “알겠네 나그네의 즐거움이란 / 가난해도 집에 삶만 같지 못함을”(始知爲客樂, 不及在居貧)이라고 읊었다. 집이 없어 가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막상 돌아와 보면 집안에는 먼지만 자욱하여 정이 붙지를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조각구름 한 마리 새가 되어 만 골짝 천 봉우리 밖을 떠돌았다. “올해는 이 절에서 묵지만 / 내년엔 어느 산으로 갈거나.”(此年居是寺, 來歲向何山) 그의 시들은 대부분 그치지 않는 동경 속에서 방랑의 마음을 찍어낸 것들이다.
리처드 F 버턴(1821~1890)은 ‘아라비안나이트’를 영역할 때의 기쁨을 두고, “마신(魔神)은 따분하고 고상한 환경으로부터 순식간에 자신을 동경의 나라 아라비아로 데리고 간다”고 했다. 이야기를 옮기고 있노라면 초저녁의 사막은 금성의 빛으로 물들고, 저 멀리서 와다이족의 천막과 모닥불이 나타나고, 초원의 무덤과도 같은 옷자락을 펼치고 허연 수염을 기른 노인들이 화톳불 주위에 앉아 이야기를 듣는다. 샤리야르 왕과 화톳불 주위 아라비아의 노인들과 버턴이 겪었던 것처럼, 우리 앞에는 어느새 거대한 마신이 서있거나 낙타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 국토를 걸어 여행하는 10여년 묵은 꿈이 있다. 그 첫 단계로 올 여름에는 김해에서 경주와 포항과 영덕과 울진과 강릉을 거쳐 고성에 이르는 동해안 길을 걸어보고 싶다. 진(晉)나라 죽림칠현(竹林七賢) 중의 하나인 완적(阮籍)은 가다가 길이 막히면 통곡하며 돌아왔다는데, 나는 길이 막히는 지점에서 밤새도록 통천과 원산을 지나 철령을 넘고, 함흥과 북청을 지나 또 마천령을 넘어 경성을 거쳐 나진에 이르는 길을 갈 것이다. 날이 밝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오갈 것이다.
<이승수 경희대 연구교수>
출처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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