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와 세계는 갖가지의 양상으로 전개되지만 /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설로서 의식에 의한 전변의 결과이다 / 이런 변화를 주도하는 의식에는 단 세 종류가 있다(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 彼依識所變 此能變唯三)
위는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의 첫 번째 게송이다. 이것의 요점은 ‘오직 유식(唯識, Vijnapti-matra)만이 존재하고, 자아와 법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다만 의식에 의한 전변(轉變, Parinama)에서일 뿐이다.’는 것이다.
첫 번째 게송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식(識), 의식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의식으로 번역되는 용어는 Vijnana와 Vijnapti가 있다. 이 두 용어는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학자들은 이들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구별하여 사용한다. Vijnana는 인식의 주체, 혹은 인식작용 자체를, Vijnapti는 인식 작용에 의한 결과로서 표상이란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유식(唯識, Vijnapti-matra)이란 용어의 정확한 번역은 ‘자아와 세계는 오직 의식의 표상으로서 존재할 뿐이다’가 된다.
유부(有部)학파의 주장처럼, 우리의 상식은 자아와 세계[法]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반대로 중관(中觀)학파는 자아와 세계는 실제로 실체가 없는 공(空)이라고 주장을 한다. 자아와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은 중관학파의 주장에 당혹스럽고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비록 자아나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고, 서로 의존되어 있어서 그 자체로는 존재성이 결여돼 있다는 점을 이해할지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살아갈 때 또 다시 유부학파의 관점으로 되돌아가 대상에 집착되어 버린다. 왜 그럴까? 이것을 설명해주는 개념이 바로 유식(唯識, Vijnapti-matra)이다. 자아와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의식의 지평에서 나타난 ‘표상’일 뿐이다. 여기서 자아와 세계는 다만 마음에 의해서 구성된 영상, 개념으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로 설명되어야 할 중요한 개념이 식전변(識轉變, Vijnana-Parinama)이란 용어이다. 식전변이란 ‘식에 의한 변화’란 의미로서, 의식이 상호 인과의 관계를 가지면서 상속, 지속될 때를 가리키는 말이다. 식전변에는 표층과 심층의 2가지 의미가 있다. 표층적인 수준에서 보면, 인식하는 주체로서 표상되는 자아[我]와 인식의 대상으로서 표상되는 세계[法]가 모두 의식의 전변에서(Pariname, 처격으로 사용됨) 발생된다는 점이다. 게송에서 자아와 세계란 일종의 가설(假設, upacara)인데, 가설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대상을 임시 존재로 설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임시로 설정하여 개념화되었음을 표시하는 용어가 전변이다.
이것은 심리학적인 용어로 설명하면 투사나 동일시의 현상과 유사하다. 투사란 내적 심리적 사실을 외적인 존재로 귀인 시키는 현상이고, 동일시는 내적 경험을 자아라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인식의 대상을 세계라고 보는 것은 투사이고, 인식하는 심리적 경험을 자아로 집착하는 것은 동일시의 현상이다. 이것들은 사실 의식의 전변에서 나타난 표상으로서의 가설인데도 우리는 그것들이 실제로 외계의 존재라고 투사하고 그것을 자아라고 집착하여 동일시한다. 그럼으로써 마침내 자아와 세계의 표상은 역사적인 시간을 따라 실제로 존재하는 존재자가 된다.
식전변의 두 번째 의미로서 심층적인 의미는 아뢰야식과 관련된다. 이것은 표층의 수준에서 경험정보가 심층에 저장되고, 저장된 정보는 점차 축적되고 잠재적인 힘을 얻게 되어서, 마침내 구체적인 현실로 표출되는 전체의 과정을 말한다. 이것은 세친이 말하는 식전변의 실질적인 의미이다. 이것을 기능에 따라서 세친은 3가지로 구별한다. 바로 정보를 저장하는 아뢰야식(阿賴耶 8식), 자아의식을 만들어내는 말나식(末那, 7식), 외계의 대상으로 표상하는 요별식(了別, 6식), 이들이 바로 그것이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962호 [2008-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