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뢰야식의 대상은 알기가 어려운 집수(執受), 처(處), 요별(了別)이며 / 항상 접촉, 작의(作意), 감정, 생각, 갈망의 마음현상과 상응한다 / 그러나 이들에 대해서 아뢰야식은 가치중립적 태도에 취한다. (不可知執受 處了常與觸 作意受想思 相應唯捨受)
이것은 세 번째 게송이다. 여기서는 마음작동의 3가지 층위 가운데 아뢰야식을 설명한다. 첫 번째 구절의 집수(執受), 처(處), 요별(了別)은 아뢰야식의 인식대상이다. 이것들이 알기가 어렵다고 한 것은 표층적 수준이 아니라 광대한 심층적 수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집수(執受, upadi)는 말 그대로 가져[執] 지녀서[受] ‘보존하다’ 혹은 ‘유지하다’는 의미이다. 아뢰야식이 가져지니는 대상은 ‘종자’와 ‘신체’, 2가지가 있다. 종자는 과거의 반복된 경험내용으로 『성유식론』에서는 ‘표상’, ‘개념’, ‘분별’과 같은 언어적 습기라고 말한다. 여기서 신체는 특히 감각기관을 말한다. 감각기관은 표층적 수준이지만, 신체를 유지하는 의식은 심층적인 수준이다. 만약 죽은 시체는 감각기관은 존재하지만, 그곳에 의식이 존재하지 못하면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다. 종자는 마음을 말하고 신체는 몸을 말한다. 몸과 마음의 생명현상을 보존하고, 양자의 긴밀한 상호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아뢰야식이라는 말이다.
처(處)는 아뢰야식이 대상을 인식하는 활동공간을 말한다. 이를 기세간(器世間), 혹은 의보(依報)라고 한다. 기세간이란 산하대지, 넓게는 우주를 말한다. 의보(依報)란 의지하여 나타난 결과로서, 아뢰야식의 전변에 따르면, 세계는 아뢰야식에 의해서 구성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원인이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장소란 아뢰야식이 전변하는 생활공간을 의미한다.
요별(了別)은 대상을 인식하는 아뢰야식의 활동을 가리킨다. 아뢰야식은 대상을 지각하고 분별하는 것으로서 그 활동의 방식으로 삼는다. 이런 활동의 결과로서 자아와 세계의 표상이 형성되고 전개된다.
두 번째 구절은 아뢰야식과 항상 상응하는 보편적 마음현상[遍行心所]을 설명하고 있다. 아뢰야식은 직접 관찰할 수가 없지만, 이에 상응하는 접촉(觸), 작의(作意), 감정(受), 생각(想), 갈망(思) 등을 탐색함으로써 인식할 수가 있다. 접촉[觸, sparsa]이란 감각기관[根], 대상[境], 의식[識] 등이 화합(和合)하는 것을 말한다. 작의(作意, manaskara)는 접촉으로 말미암아 발생되는, 마음의 기울어짐이다. 『성유식론』에서는 대상에 대한 경각심(警覺心)이라고 정의한다. 경각이란 놀라서 느끼는 마음으로, 마음이 대상을 향하는 것을 뜻한다. 느낌[受, vedana]은 순(順)경계에 대해서는 즐거움을 느끼고, 역(逆)경계에 대해서는 불편이나 싫음의 느낌을 받는다. 불편한 느낌은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기고, 즐거운 느낌에 대해서는 집착하게 된다. 생각[想, samjna]이란 대상에 대한 표상, 이미지 등을 취하여, 그곳에다가 이름을 붙이는 것을 말한다. 대상을 한정시키고 구별하여, ‘이것은 무엇이다’고 규정하는 역할을 한다. 갈망[思, cetana]은 바로 무엇을 하고자하는 바램이나 욕구를 의미한다. 대상에 대해서 선과 악을 판단하고 가치를 부여하여, 그것을 조작하고 자기 방식으로 통제하고자 하는 의지를 말한다.
이들은 아뢰야식의 전변으로서, 모든 마음이 존재할 때[時]는 반드시 함께 존재하며, 어떤 마음이 일어나면 이들 역시 함께 일어나며[俱], 선악(善惡)의 모든 가치판단에 관련되어 있으며[性], 이들은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의 이선(二禪)까지 함께 작용(地)한다. 하지만 제8식 그 자체는 선악에 물들지 않고 가치중립적인 태도를 취한다. 물들어진 행위종자를 찾아 해방시키는 작업은 바로 이들을 중심으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964호 [2008-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