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간 지속된 무신정권은 고려 왕 의종 때 시작되었다. 왕은 절에서 놀기를 좋아했다. 문신의 권세는 왕권이 주눅들 정도였다. 연회장에 무신들이 들이닥쳐 문신과 환관들을 차례로 척살했다. 피가 용포에 튀겼다. 개경에서도 문관(文冠)을 쓴 자들은 죽임을 당했다. 칼을 든 자들은 부패한 왕실의 배후로 사찰을 지목했다. 교(敎)를 앞세운 승려들은 반발했고, 그때마다 시체가 산을 이뤘다. 남은 승려들은 새 권력에 엎드렸다. 사찰들은 새로운 왕실과 귀족들의 의례를 치르며 부를 축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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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품은 자들은 무기를 벼리며 개경을 노려봤다.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까마귀떼가 하늘을 덮었다. 하지만 사찰에서는 음식이 넘쳤다. 몸과 마음에 살이 오른 승려들은 뒤뚱거렸다. 사찰에 술 냄새가 진동했고 시정보다 시끄러웠다. 권력은 승려를, 승려는 백성을 부렸다.
- 권력의 손길에 휘둘린 스님들 -
어느 날 스님 한 분이 사찰을 꾸짖었다. 지눌(1158~1210)이었다. 왕실과 귀족들이 놀랐다. 더욱 놀란 것은 승려들이었다. 지눌은 귀족불교에서 서민불교로, 명리에서 정혜로, 기복에서 수행으로 옮겨가자고 외쳤다.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만들어 동지를 구했다. “남은 세월이 한줌 햇살인데 탐욕, 분노, 질투, 교만, 방일로 세월을 허비하고 부질없는 말로 세상을 흔들 셈인가. 덕도 없으면서 신도들 보시를 받고, 공양을 받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그 허물을 두고 어찌 슬퍼만 할 것인가. 선(禪)과 교(敎), 유가와 도가를 막론하고 뜻이 높은 사람은 일어나라.” 지눌의 결사문은 거대한 죽비였다. 세상과 타협한 승려은 질린 얼굴로 모여서 수군거렸다. “지눌이 불법으로 우리를 찌르는구나.” 지눌은 개경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도 권력을 무수히 찔렀다. 고려불교는 그렇게 변방에서 일어섰다. 조계종은 그를 중흥 교조로 받들었다.
1980년 10월27일 신군부의 무인들이 군홧발로 법당을 짓밟았다. 명분은 불교계 정화였다. 부처님이 수색을 당했다. 승복 대신 군복을 입고, 스님더러는 바지를 내리고 성기를 내보이게 했다. 노승들은 수치심에 눈물을 흘렸다. 불교가 능멸을 당한 것은 10·27법란 때만은 아니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부터 문민정부라며 군사정권과 선을 그었던 1992년까지-역사는 이 31년 동안을 무인정권으로 기록할 것이지만-한국불교는 권력의 손을 탔다. 종교가 타락하면 맨 먼저 권력이 얕잡아본다. 천주교와 개신교가 민주화를 외치며 민중의 고통에 동참할 때 불교는 보이지 않았다. 스님들의 추문만 돌아다녔다. 그랬으니 권력이 우습게 본 것이다.
‘촛불 시위’ 수배자들이 조계사에 찾아들어간 것에서 불교의 희망을 본다. 불교가 백성의 고통 속으로 내려왔음이다. 종말을 걱정하는 세상에서 생명사상을 일깨우는 상서로운 기운들이 감지되고, 그 앞에 불교가 있음 또한 희망이다. 작금의 종교 편향에 불심이 노했다. 그러자 불교 관련 예산과 지원을 확대하고 추석 선물도 특별한 것으로 준비 중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이는 아직도 불교를 우습게 보고 있음이다. 불교를 관리대상으로 여김이다. 권력이 본질은 놔둔 채 아직도 빵덩어리를 던져 환심을 사려함이니 한국불교는 아직도, 얼마나 비루한가. 불교집회가 ‘규모의 힘 자랑’에 그쳐서는 초라한 일이다. 왜 모였느냐는 물음이 중요하다. 그것은 종교 편향이란 결과보다는 종교 편향을 불러온 원인을 살피는 성찰이어야 한다.
- 수경스님의 ‘오체투지’ 참회 수행 -
수경스님(화계사 주지)은 “불자들만이라도, 아니 스님들만이라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았더라면 세상은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일갈했다. 그리고 문규현 신부와 더불어 오는 4일부터 오체투지(五體投地)에 나서겠다고 했다. 땅에 몸을 부리는, 가장 자신을 낮춰 속죄하는 오체투지. 종교가 서로를 보듬고 지리산에서 묘향산까지 갈 것이다. 목숨을 길 위에 내려놓는다. 뜻있는 이들이 땅을 치며 흘린 눈물은 왜 답이 되지 못하고, 저분들은 다시 떠나가는지. 지렁이가 되어 온몸으로 이 땅의 미움을 지우려는 수경스님의 참회 수행, 멀리 있지만 참으로 아프다.
<김택근|논설위원>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