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종교는 대중적 기반을 상실해서는 안된다. 대중적 지지도를 상실한 종교는 철학일지언정 종교로서 생명을 잃는다. 유교가 결코 종교일 수 없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한국의 선사들과 불교학자들은 대체로 불교가 타력종교가 아니고, 자력수행이라고 너무 강조한다. 그런 경우에 불교의 대중적 지지도가 내려간다. 기독교에 비해 한국불교의 취약점이 여기에 있다. 모든 종교적 믿음은 타력에서 출발한다. 종교적 믿음의 동기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이 숨 막히는 질곡과 같다고 여겨 거기서 탈출하고픈 욕망에서 비롯한다. 누구나 인간은 한계상황의 포로로서 그 상황의 틀에 갇혀 사는 신세를 면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종교는 바로 그 틀을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요구의 응답과 같다. 이것이 해탈 또는 초월로서 다가온다.
기독교가 불교에 비하여 철학적으로 저차원이지만, 예수님은 부처님의 깨달은 바를 성공적으로 대중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대중화의 길은 쉽게 대중들이 의지하고 한계상황의 질곡을 벗어나게 하는 길을 말한다. 고통 속에서 죽음을 대면한 환자는 선가에서 말하는 고요한 마음의 평안을 스스로 발견하기 어렵다. 그래서 전지전능한 님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한다. 이때에 누가 님인가? 부처님과 예수님이겠다. 진리가 인격적 님으로 화현한다. 초기 불교에서 부처님의 형상보다 다만 법륜의 상징만이 있었다. 그러나 세상살이의 고통과 죽음, 그리고 인간사에서 생기는 갈등의 투쟁과 업력에 따른 과오를 운명으로 체험한 중생들은 부처가 되신 석가모니를 구원의 님으로 모시지 않을 수 없었다. 부처에는 두 가지의 개념이 혼재되어 있다. 첫째로 부처는 우주적 사실을 법으로 인식한 지혜 자체이시고, 또 다른 하나는 중생을 한없이 긍휼히 여기시는 자비 자체이시다.
한계상황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에게 쉽게 와 닿는 부처님은 법을 증득한 지혜가 아니라, 자비로서 보살펴주시는 님이다. 법으로서의 부처는 우주의 궁극적 사실로서 삼인칭 단수 중성대명사 ‘그것’이지만, 님으로서의 부처는 이인칭 인격대명사인 절대적 ‘그대’로서 나에게 다가온다. 나는 절대적 ‘그대’인 부처님의 인격에 기도한다. 여기서 불교나 기독교나 다 인격적 타력 신앙으로 유사해진다. 종교로서의 대중성은 필연적으로 타력에의 귀의로 나타난다. 기도가 무엇인가? 기도는 나의 비원을 들어주시기를 간절히 원하는 님에게 바치는 마음의 호소다. 그래서 기도의 대상은 응답하는 인격적 님이라고 생각한다. 법륜의 법이 님의 부처로 탈바꿈된다.
그런데 기도가 지극하고 순수할수록, 기도는 님에게 무엇을 청구하는 것이 아니라, 님과 한 몸이 되기를 갈구하는 마음임을 느낀다. 님에게 무엇을 객관적으로 청구하는 기도는 아직도 사량분별하는 마음의 이기심이 작용함을 말한다. 자식의 출세나 자신의 생명연장이나 영생을 요구하는 것은 소유욕의 발동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아직도 무엇을 소유하겠다는 무의식의 표상이다. 가장 절실하고 진정한 기도는 님에게 무엇을 소유하려는 청구가 아니라, 님과 일체가 되기를 갈망하는 것이겠다. 무엇을 청구하게끔 분별할만큼 여유가 없다. 오로지 천 길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지 않으려는 마음처럼 님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하나가 되려는 마음이 기도의 본질인 것으로 드러난다. 기도는 부처님에게 청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과 하나가 되려는 간절한 마음의 요구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기독교적 신앙과 불교적 신앙인 신뢰와의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나타난다.
기도는 한계상황 속에 있는 인간이 종교적 믿음을 갖게 하는 가장 쉬운 방편이다. 그 기도가 님을 부르게 한다. 간절히 님을 찾는 인간은 중생(불교)이고 죄인(기독교)이다. 한국 선불교에서 중생이 곧 부처라는 것을 너무 쉽게 설파한다. 중생이 곧 부처라는 것은 본질적인 차원의 이야기지, 실존적 차원의 말은 아니다. 우리는 보통 실존적 중생의 수준에서 종교를 믿는다.
박세일 교수는 불교가 중생수준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옳은 말이겠다. 그의 주장은 한국불교가 공급자 중심의 과거식 불교가 아니라, 소비자 중심의 미래적 대중불교로 체질개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에 나는 이 칼럼을 통하여 한국불교가 너무 선근본주의(선원리주의)에 젖어 일시에 확철대오하려는 일에 매달려 어려운 득도의 그날을 겨냥하다가 한계상황의 구체적 제도(濟度)를 외면하여 대중들을 뜬 구름 속에 헤매게 하는 공허함에 빠지게 한다고 비판한 적이 있었다. 이것은 선의 수행법을 결코 등한히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가 곧 선이라는 청화(淸華) 큰 스님의 가르침을 상기하자.
기도는 필연적으로 무한한 힘인 인격적 님을 그리워한다. 그 님이 두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도덕적 복종을 요구하는 님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론적 합일을 요구하는 님이다. 전자는 님과 자아와의 사이에 주종의 엄격한 위계질서를 전제하고, 후자는 존재의 융합을 가리킨다. 전자가 기독교적 기도의 구조고, 후자가 불교적이다. 철학적으로 기독교는 어떤 경우에도 도덕적 종교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한다. 기독교는 각각 개별적인 존재자로서 주재자인 하나님과 나 사이에 늘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한다. 내가 종속인으로서 하나님에게 도덕적인 절대복종을 바치는 대가로서 나는 나의 결핍된 욕망을 보상받는다고 여긴다. 기독교는 타력종교로서 오로지 소유론적 욕망의 형태를 떠나지 못한다. 소유론적 욕망은 꼭 물질적인 것만 가리키지 않는다. 정신적인 욕망도 소유론적이다. 영생이 복종의 대가로 주어진다는 사고방식도 영생을 내가 목적(목적어)으로서 소유하겠다는 것이다. 기독교적 기도는 신인(神人)합일을 철저히 배척한다.
불교적 기도의 극치는 소유론적 욕망의 결핍이 채워지기를 바라는데 있지 않다. 소유론적 욕망은 일단 충족되더라도 또 다시 새로운 갈증을 낳는다. 돈과 명예도 끝없는 욕망의 대상이 되고,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남녀의 정신적인 사랑도 새로운 욕망으로 이전하든지, 아니면 사랑의 새 요구를 까다롭게 내놓는다. 두 연인간의 사랑도 낭만주의자들의 공상과는 달리 영원히 합일되지 못한다. 소유론적 욕망은 늘 더 큰 욕망을 낳는다. 불교는 소유론적 욕망이 나를 자유롭게 하는 길이 아니고, 내가 오직 부처님과 일체가 되는 불인합일의 존재론적 욕망만이 진정한 기도의 방향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존재론적 욕망은 내가 내면적으로 부처님과 합일되는 간절한 발심을 말한다. 거기에서 일인칭 나는 사라지고, 나는 부처님처럼 이인칭이 된다. 도덕종교에 불과한 기독교는 ‘내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라’고 일어섰다. 그러나 존재론적 종교로서의 불교는 자기가 이인칭 ‘그대’가 되면, 내 이웃만이 ‘그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 일체 존재가 다 ‘그대’로서 하나의 공통적 존재방식으로 묶여져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존재자적으로 하나님/인간/동물/식물/자연물 등이 개별적으로 나누어지지만, 불교에서 삼라만상이 다 ‘그대’로 여겨진다. 우주에서 일체가 일체에 대하여 ‘그대’로 보는 우주심은 우주법으로서의 삼인칭 단수 중성대명사 ‘그것’과 다르지 않다.
기독교는 세상사를 인격중심으로 생각하니, 자연재해마저 신의 인격적 분노로 여긴다. 왜 신이 자기에게 절대복종하는 자기 신도와 교회를 지진으로 일시에 떼죽음과 폐허로 만들어 버리는가? 오늘날 서구에 기독교 교회가 텅텅 비고 신자가 사라진 까닭은 저런 유치한 사고방식으로 세상사를 주재한다는 소위 하나님이 현대인에게 너무 우습고 황당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염불 기도하는 것은 절대 인격체에 비는 것이 아니다. 중생이 처음으로 부처님을 찾는 까닭은 부처님을 의지해서 괴로움의 위안을 얻고자 함이다. 이 점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신앙동기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점차로 불교는 부처님과 하나님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부처님은 절대적인 인격자가 아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영생하는 실체로서 최고통치자인 아버지와 같은 정신적 존재자(spritual entity)를 숭앙하나, 부처님은 전지전능한 아버지와 같은 인격자가 아니다. 부처님은 우주허공처럼 무한히 광대원만하고, 무한히 자유스럽고, 모든 중생들을 차별 없이 평등하게 수용하는 무한 자비와 무한지혜의 사고방식(mentality)을 말한다. 불교는 다만 염불기도하면서 부처님의 사고방식을 닮으라고 말한다.
부처님이 우주심과 같은 사고방식이라면, 그런 사고방식에 왜 인격적인 존칭인 님을 붙이는가? 한국어에서 우리가 마음을 바치고 싶은 일체에 대하여 다 ‘님’을 덧붙인다. 불심(佛心)이 우주심이라면, 일체의 생명과 흙·물·불·바람 등 무생명도 마음일까? 모든 생명은 다 마음이다. 생명은 다 살려고 하는 의지의 욕망을 띠고 있는 한에서 다 마음이다. 그런 점에서 일체의 생명은 다 불심의 한 조각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면 위의 사대(四大=地水火風)도 마음인가? 동식물의 마음이 사대의 영향을 안 받는 것이 없다. 부처님은 이 우주일체가 다 마음의 자연스런 상호의존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바로 보고, 바로 사유한 마음이다.
우주심은 우주만물처럼 음양법의 생리현상이고, 생멸법의 왕복현상이고,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인과법의 진실무망한(誠) 현상이고, 고갈됨이 없지만 결코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기(宇宙氣)의 텅 빈 존재양식에 다름 아니다. 중생심으로서의 내 마음이 우주심을 닮아갈수록 이인칭 ‘그대’로서의 부처님의 님은 실로 시작이 없는 시초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변함없이 그와 같이 오고 가고 한 우주법의 삼인칭 ‘그것’에 다름 아님을 알게 된다. 우주심이 우주법이다. 내 마음이 우주심과 합일되기를 발원하기에 나는 존재론적으로 중생의 고통을 멀리 떠나 부처님의 복락에 동참한다.
그러면 우주심의 주체(인격체)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쉽게 생각하리라. 그러나 불교는 이 우주에 독립적 주체가 없고 오직 행위만 있을 뿐이라고 가르친다. 기독교는 먼저 주체가 있고, 그 존재자에서 행위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불교는 번개의 주체는 없고 그 행위만 있고, 이슬의 주체는 없고 그 행위만 있다고 말한다. 우주적 존재는 다만 사건으로서 존재하지, 존재자가 선결적으로 있고 거기서 행위가 흘러나온다고 보지 않는다. 예컨대 내가 짐승의 사고방식을 닮으면, 나는 짐승이 되고, 부처의 사고방식을 띠면 나는 부처가 된다. 나는 주체가 아니고, 마음이다. 마음이 사건이고 행위다. 우리는 재래의 잘못된 철학에서 벗어나야 한다. 불교는 황당하게 울고불고 하면서 이상한 아버지 인격체에 매달리는 신앙이 아니라, 부처님인 우주심의 사고방식을 희구하면, 거기에 합당한 복락과 지혜가 내게 일어난다고 신뢰하는 종교다.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