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800만 시대]‘다수의 약자’ 세력화… 진보정당의 역할 중요 | ||||||||
입력: 2008년 08월 20일 18:16:18 | ||||||||
ㆍ4부 - (1) 정치적으로 조직돼야 지난 5월 초부터 촛불집회에 꼬박꼬박 참여했던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 양승준씨(36)는 어느 날 혼란에 빠졌다. 구사대로 파업의 폭력적 진압에 참여했던 회사 인사가 촛불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양씨는 “내가 왜 그 사람과 같은 자리에 있게 됐는지…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웠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저녁 서울구로디지털단지 내 기륭전자 앞.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를 촉구하는 촛불문화제가 끝난 뒤 김성환 삼성일반노조위원장은 이런 말을 했다. “기륭 노조원들이 광화문 촛불집회 때 ‘비정규직 철폐’ 구호를 외치려고 하는데 못하게 막더랍니다. 그것도 노동운동하는 사람들이….”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는 한국 민주주의의 빛나는 성취로 평가된다. “옛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가 되살아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표현이 단적인 예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촛불대열에서도 ‘소수’요 ‘타인’이었다. “비정규직은 촛불시위에 나올 여유도 없다”거나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은 시위에 참여하기도 힘들다”는 탄식은 비정규직의 단면을 아프게 드러낸다. 촛불시위에 참여한 장기투쟁 사업장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문제를 말하는 것이 촛불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것은 아닌지” 눈치를 살펴야 했다. 박노자 오슬로국립대학 교수는 “촛불집회를 주도하는 실질적인 힘은 중산층에 있다”며 “촛불 안에도 두 개의 사회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지난 3월 현재 국내 비정규직은 858만명이다. 공직선거 유권자의 3분의 1을 조금 밑돈다. 가족과 친·인척을 포괄하는 ‘비정규직 영향권’은 더 크고 넓다. 우리 사회의 가장 거대한 유권자군이다. 그러나 이들은 정치적으로 소수다. 비정규직의 노동권과 생존권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는 세력은 소수다. ‘진보개혁 진영’ 내부를 봐도 그렇다. ‘세계화 흐름 속에서 비정규직 확산은 불가피하다’는 논리가 정치·경제·사회의 전 영역을 지배하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가 우리 사회 최대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언론·지식사회 모두 공적 의제로 제시하고 토론하고 해법을 찾는 데 소홀한 모습”(김호기 연세대교수)을 보이는 이유다. 비정규직 문제를 기준으로 좌우를 가르면 국회 의석분포는 294대 5다. 비정규직 정책에서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별 차이가 없다. 노동부 고위관계자는 “노동유연화를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는 김대중 정부 때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됐다”며 “비정규직 문제에 관한 한 현 정부와 이전 정부의 정책 차이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시민운동 진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심상정 진보신당 공동대표는 “2006년 국회에서 비정규직 법안을 다룰 때 유력한 시민사회 단체들은 정부의 비정규직보호법이 차선이라면서 지지선언을 했다”며 “노무현 정부 때 시민사회가 신자유주의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전제를 취함으로써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이데올로기에 사실상 힘을 실어줬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노동자 편에 선 ‘전통적’ 진보진영도 그리 신통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민주노총은 ‘당위’와 정규직 중심의 조직구성이라는 ‘현실’ 사이에서 종종 머뭇거렸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개별 사업장의 투쟁을 지원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열심히 싸우기는 했지만 다수의 비정규직 노동자와 소통하는 데 실패했다”는 평가다. 신자유주의 담론의 압도적 우세 속에 진보진영은 ‘브레이크’ 역할도 제대로 못하는 형세다. 비정규직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김호기 교수는 “사람들은 세계화나 정보화, 노동의 유연화를 거의 숙명론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그들이 성장에 의한 일자리 창출에 기대를 갖게 되는 이유”라고 말했다. ‘예비 비정규직’인 대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는 “어느 설문조사 결과 대학생들은 한국 자본주의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인 인식을 보였지만 철저히 개인적인 해법을 추구했다. 사회를 바꾸기보다 혼자라도 살아야 한다는 태도”라고 말했다. 요컨대 “우리가 나선다고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되겠느냐는 패배주의, 냉소주의가 만연한 가운데 사람들은 연대감을 잃고 홀로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대안은 없다”는 비관론의 결과는 민주주의의 위기로 나타난다. 비정규직 문제는 한국사회의 위기를 보여주는 징표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경제논리는 사회의 하위체계에 불과한데 이것이 사회 전체의 운영원리가 됐을 때 현대사회는 비극적인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며 “경제논리가 과도하게 사회를 압도하고 민주주의를 압도하면 사회·경제적 권리가 축소되고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게 된다”고 지적했다. 심상정 대표는 “10대와 여성이 촛불시위에 다수 참여했다는 것은 10년을 질주한 신자유주의가 일상적인 삶 전반에 내상을 입히고 있다는 것이고 미래 세대에도 위협이 되고 있다는 것”이라며 “신자유주의를 태풍에 비유하면 여성과 10대는 태풍의 눈 주변에 있고 20대 남성 비정규직은 태풍의 눈에 이미 들어가 있다”고 말했다. 박노자 교수는 “비정규직이 현재 규모 이상으로 늘어나면 한국사회의 빈민율은 러시아 등 준 독재형 개발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30%에 도달할 것이고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반은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주체적이고 집단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정상적 작동을 위한 첩경일 테지만 현실은 “비정규직 노조원에게 촛불집회에 나가자고 하면 힘들다며 관심 없어 한다. 정규직들이 오히려 여유가 있어 관심을 보인다”(김경욱 이랜드일반노조위원장)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기 쉽다. “어느 사회나 개별화돼 있는 층이 가장 보수적인데, 비정규직은 일터에서 흩어져 있고 광장에는 나오기 힘든 처지”라는 설명이다. 게다가 집단적 정체성을 갖기도 쉽지 않다. “비정규직은 일종의 사회적 낙인이기 때문에 자신이 비정규직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비정규직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있어 비정규직 ‘외부’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누군가 나서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묶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는 현실적으로 진보정당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을 찾는 논의가 진보정당의 활동 평가로 귀결되곤 하는 것은 이런 이유다.
시민·소비자 운동 결합 사회적 파급력 키워야 심상정 대표는 “진보진영은 비정규직 문제를 노동문제의 틀에서만 바라봤다. 정치의 복판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담론이나 프레임은 개발하지 못했다”며 “사회연대전략을 구체화함으로써 비정규직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확산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또 “비정규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비전과 프로그램을 가지고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치적으로 결집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비정규직의 문제는 중소기업의 문제와 중첩되고 중소기업 다수는 존립이 힘든 처지에 있다”며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등 기업이 존립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호기 교수는 “네덜란드나 덴마크의 경우처럼 유연안전성 전략을 통해 양질의 일자리를 늘리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선 “유럽과 달리 노동의 정치적 힘이 절대적으로 취약한 상황에서 시도되는 노사대타협은 자본의 의도가 일방적으로 관철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반론이 맞서 있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은 “기업이 비정규직을 늘리는 이유는 단기수익 극대화를 위한 것”이라며 “기업 입장에서 단기수익 극대화는 ‘수인의 딜레마’다. 남들은 하는데 나만 안 하면 손해가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모두 하지 못하도록 사회적으로 규제를 하는 수밖에 없다. 사회적 규제가 필요하다는 점을 제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문제를 의제화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선도집단의 일방적 계몽활동에서 탈피해 노동자·서민의 다양한 참여가 가능한 형태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정당·시민단체·소비자·노동자를 엮을 수 있는 지역 활동 모델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랜드일반노조의 파업을 예로 들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지역의 시민단체와 정치운동단체, 소비자운동이 자연스럽게 결합되면서 사회적 파급력을 키웠다는 분석이다. 이병훈 교수는 시민사회 영역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소비자운동과 결부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고용 및 처우 등을 반영해 기업을 평가하고 이를 공개함으로써 기업 투자는 물론 제품 소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발상이다. 현재 참여연대는 기업의 사회적 활동지표를 개발하고 있다. 8월 중 지표를 공개하고 하반기부터 기업 평가를 본격화한다는 구상이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지난 6월 경향신문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촛불집회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시민들이 실생활과 직결된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정책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라며 “제도권 정치와 정당이 무력화되었을 때 시민사회의 의사를 결집하고 항의를 조직함으로써 권위주의적 권력행사와 정책결정에 결정적 제약을 가했다는 점에서 한국민주주의 발전에 확실하게 기여했다”고 말한 바 있다. 비정규직 문제가 가장 심각한 ‘시민들의 실생활과 직결된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정책 문제’라는 데는 이론이 없어 보인다. 오건호 공공노조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위원은 “이번 촛불의 힘이 비정규직 문제를 여론화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촛불시위 참여를 계기로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는 시민들도 있다. 지난달 22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주도한 촛불집회에 참가한 주부 조모씨(32)는 “비정규직 문제는 삶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이지만 쇠고기 문제와 달리 처한 환경에 따라 서로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면서도 모두에게 쉽게 와닿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기륭 여러분과 다른 사람들의 생생한 발언을 들으니 오늘은 피부로 와닿는다. 쇠고기 문제는 작은 문제일 뿐이며 이제 시민들의 관심이 전방위적으로 확산된 만큼 비정규직 문제가 관심사에서 벗어나지 않게 꾸준히 노력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비정규직 문제는 미국산 쇠고기 위생조건과는 여러모로 성격이 다르다. ‘쇠고기’ 문제가 계층과 세대를 넘나드는 대형 이슈였다면 비정규직 문제는 계급적·이념적 성격이 짙다. 그만큼 관심층이 좁다. 여론의 시선을 단번에 잡아끌 수 있는 특별한 계기를 찾기도 어렵다. 또 쇠고기 문제가 현 정권에 대한 반감을 바탕에 깔고 있다면 비정규직 문제는 민주정부 이래 지속돼온 신자유주의 정책기조 자체를 문제삼는다. 국익과 민족담론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같은 반(反)신자유주의 이슈인 한·미 FTA와도 성격이 다르다. 이 때문에 촛불이 보여준 벼락 같은 자생적 폭발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진보정치 세력이 노력한 눈금만큼 정직하게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이슈라는 것이다. 조만간 비정규직법 재개정 논의가 본격화될 전망이다. 정부는 기간연장(3년)·파견범위 확대 방향으로 개정안을 마련 중이다. 적게는 858만 비정규직, 많게는 그들의 친·인척을 포괄하는 비정규직 권역이 개정안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박상훈 대표는 “비정규직이 850만명을 넘어서는 일이 허용됐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을 대표하는 제대로 된 정당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만큼 한국 민주주의가 갖는 위기의 핵심을 말해주는 것도 없다”고 규정했다. 박 대표는 “노동을 폭넓게 대표하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종류의 정당’이 출현하지 않는 한 한국 정치의 자기 파괴적 상황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두 진보정당의 ‘비정규직 행보’가 주목되는 이유다. 그러나 역시 중요한 것은 비정규직 노동자 스스로의 정치적 자각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주체적 노력이 뒷받침돼야 ‘외부’의 지원과 연대도 힘을 얻을 수 있다. 김성희 소장은 “악성 차별구조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지만 이를 막기 위한 제도는 턱없이 부실하다. 누가 대신 싸워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지루하고 힘든 싸움이 될지언정 비정규직 스스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정제혁기자> <특별취재팀> 정제혁 장은교 송윤경(사회부) 이호준(정치부) 배명재 김한태 윤희일 최인진 최승현기자(전국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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