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지금까지 논의한 이론의 응용과 실제로, 다음 두 미술작품을 눈부처의 미학으로 읽어보자. 불교나 기독교의 고정관념이나 편견에서 벗어나 양자를 관용과 차이로 읽는 것은 1차적 차이일 것이다. 하지만, 눈부처의 읽기는 이성과 의식을 넘어 감성으로 타자의 얼굴에서 신이나 부처를 발견하는 경지다.
예수 속 투영된 고해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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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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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그림은 독일의 궁정화가, 마티에스 그뤼네발트(Mattias Gru¨ newald: 1460?/1475?-1528)가 그린 ‘이젠하임(Isenheim) 제단화’이다. 이것은 독일 알자스 남부 이젠하임에 있는 성 안토니우스 교단 수도원의 예배실에 놓여있던 제단화이다. 필자가 사진으로라도 대한 작품 가운데 예수의 수난을 가장 고통스럽게 표현한 작품이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가시관을 쓰고 피를 흘리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도 처절하다. 얼굴엔 피가 흘러 말라붙었고, 너무도 고통스러워 눈은 아예 감아버렸고 입은 벌어져 있다. 얼굴부터 발끝까지 부스럼이 났고, 몸은 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한 형상이다. 못에 박힌 손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손가락 하나, 하나가 이 방향 저 방향으로 뒤틀려있다. 다리도 괴로움에 반쯤 비틀어져 있고 흘러내리다 마른 피가 십자가 하단부에서 땅까지 이어져있다. 흰 옷을 입으신 성모 마리아는 기도하다가 실신하여 쓰러지시고 이를 요한이 부축하고 있다. 주황색 옷을 입은 막달라 마리아는 오열하면서 기도하는 손을 더욱 꽉 쥐고 있다. 맞은 편의 세례자 요한은 그가 바로 구세주로서 이 땅에 오신 분임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께서는 영광과 부귀, 환희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다. 그 분께서는 굴욕과 가난, 비통의 종으로 오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인도하기 위해 깨우침을 주셨으며, 병들고 배고프고 소외된 자들을 찾아 먹을 것을 주시고 따스한 사랑의 말씀으로 위로하시고 치유하셨다. 이사야의 증언대로 예수님은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 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그러고도 인류의 죄악을 다 씻을 수 없어 저리도 고통스러운 죽음을 택하셨고 이 자기희생과 대속의 죽음을 통해 인류는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저 그림을 보며 지극한 고통 속에서 해방의 빛을 발견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예수님의 지극히 고통스러운 모습에서 부처님을 본다. 우리가 사는 세상 자체가 불난 집이요, 우리의 세상살이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이다. 십자가의 저 고통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지만, 우리가 나날이 겪는 고통이 어찌 저것만 못하겠는가. 살아 있자니 쉬고 싶어도 나가서 일을 해야 먹고 입을 수 있고 남들로부터 비난과 조롱과 음해와 매도를 당해도 참고 견뎌야 하고, 잘 살며 세상의 온갖 환락을 누린다 해도 육신은 시나브로 늙어 가고, 어쩌다 병이 들면 몸이 아픈 것도 고통이지만 그로 인해 할 일을 못하고 남을 불편하게 하는 것도 크나큰 고통이다. 사랑하는 이가 죽는다는 것, 아울러 내가 사랑하는 이를 놔둔 채 생을 마감한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이다. 생노병사만이 아니라 내가 싫어하는 사람, 좋아하지 않는 사물과 어쩔 수 없이 부대끼며 지내야 하는 고통[怨憎會苦], 사랑하는 이들과 늘 같이 있지 못하고 떨어져 있는 고통[愛別離苦]. 인간 어느 누구도 자신이 욕망하고 소망하는 것을 다 이루지 못하는 고통[求不得苦] 등 생노병사와 증회, 애리, 구불득의 7고가 날마다 오온(五蘊)을 공격해오기에 인간의 몸과 마음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석존은 이런 고통 속에 있는 중생을 구제하고자 내려오셨다.
석존은 우리의 고통을 멸하고자 스스로 고통을 택하셨다. 그분께서는 태자가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와 권력을 버리고 하루에 쌀 한 알과, 깨 한 톨만 먹으면서 고행을 하셨다. 6년간의 고행 끝에 부다가야의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후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다섯 비구를 상대로 법을 설하셨고, 45년 동안 인도 전역을 다니면서 중생들을 구제하다가 마침내 쿠시나가라의 숲의 두 사라수 사이에서 입멸하여 다시 부처가 되셨다. 석존은 탄생하시자마자 동서남북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는 두 손으로 하늘과 땅을 가리키면서 사자후를 외치셨다. “하늘 위 하늘 아래 오로지 나만이 존귀하다. 삼계의 고통 받는 중생들을 내 마땅히 편안케 하리라.(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석존은 태어나시는 그 순간부터 중생의 고통을 없애려는 것이 이 땅에 오신 뜻임을 명확히 천명하신 것이다.
석존은 고통의 원인이 집착과 무명(無明)에 있으니 이를 버리고 수행 정진하면 고통을 멸하고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셨다. 석존은 단 한 명의 남은 중생마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당신께서는 고통이 전혀 없는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으면서도 남김 없는 열반(無餘涅槃)에 들지 않으시고 다시 고통 속으로 뛰어드셨다. 필자가 ‘이젠하임(Isenheim) 제단화’를 보고 있는 지금, 석존께서는 십자가에 못이 박히시어 피를 흘리고 살이 찢기는 고통을 감내하고 계시다. 그와 같은 고통 속에 있는 우리 중생들을 고통이 없는 경지로 이끌고자 부처됨을 미루시고 예수의 형상을 하고서 저리 피를 흘리고 계시다.
극한의 고통 극복한 자유의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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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달타의 고행상, 파키스탄 라호르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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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사진은 파키스탄 라호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AD 2세기경에 제작한 ‘싯달타의 고행상’이다. 그 어떤 고행상이 이보다 처절하게 사실적일까. 말 그대로 뱃가죽은 등에 붙어버렸고, 갈비뼈가 앙상하다. 몸에 있는 살이란 살은 다 말라붙어 핏줄이 선명하다. 반쯤 감은 눈에서 새나오는 생기가 아니라면 죽은 지 수백 년이 지난 미라라고 여길 것이다. 인간이 인내할 수 있는 경지를 넘어선 극단의 배고픔과 갈증, 말라붙어 생명을 상실해가는 살들이 내는 통증, 폐와 간과 심장과 창자들이 죽어가면서 배출하는 단말마적 질통 등이 합해진 고통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가히 고통의 깊이를 헤아리기 어렵다. 부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소식(小食) 때문에 나의 엉덩이는 낙타의 발처럼 되었다. 소식으로 인하여 내 척추는 방추가 이어진 것처럼 요철이 생기었다. 소식으로 인하여 마치 낡고 오래된 집이 서까래가 삭아서 무너지듯 나의 갈빗대는 삭아서 내려앉을 정도였다. 소식 때문에 마치 깊은 우물에 고인 물빛이 검은 색을 띠듯 나의 눈도 눈동자가 움푹 파여 검게 보였다. 소식으로 인하여 표주박이 바람이나 열로 인해 쭈글쭈글해지고 줄어들듯이 나의 머리도 쭈글쭈글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내가 뱃가죽을 만지려고 하니 척추가 만져졌고 척추를 만지려고 하니 뱃가죽이 만져졌다. 소식으로 인하여 나의 뱃가죽은 척추에 붙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맛지마 니까야』)
육체적으로 고통스럽지만, 몸의 살에서 모든 수분이 빠져나가듯 살에 뿌리를 둔 모든 환락과 욕망을 멸한 경지가 바로 이 순간일 것이다. 이 정도 상황이면 정신은 혼미해지고 몸은 죽음 직전의 상태이다. 악마 나무치도 이를 보고 “그대가 죽지 않고 살아남을 가능성은 천에 하나다.”라며 살아서 착한 일을 하라고 유혹하였다. 하지만, 부처님의 자세는 더없이 꼿꼿하고, 입은 굳게 닫혀있고, 선정인을 한 팔뚝엔 힘줄이 팽팽하고, 반쯤 감은 눈에선 사람들이 눈을 떴다거나 광채가 번득인다고 착각할 정도로 생기가 돈다. 지극한 고통 속에서 이를 극복하고 정신의 무한한 자유를 누린 자만이 낼 수 있는 경지다. 그러기에 석가는 악마 나무치의 유혹을 물리치고, 고행만이 능사가 아니라 열락 사이에서 중도를 취하여야 함을 깨닫고 보리수 아래서 마왕의 유혹을 물리치고 위없는 깨달음에 이르러 온 중생을 구제하는 길을 여셨다.
이 모습 속에서 예수님을 만난다. 십자가에 못 박혀 피가 흐르고 못에 몸의 무게가 걸려 살이 터지고 찢기는 그것만 고통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나중에 만인의 왕이 된 분께서 모든 이들로부터 조롱을 받고 자신을 따르던 사도들, 그 사도들 가운데서도 베드로마저 배신하였을 때 그 고통은 얼마나 지극하셨을까. 석존께서 보리수 밑에서 마왕을 굴복시키고 정각에 이르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고 깨달음에 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가는 것을 미루시고 그 고통의 십자가를 인류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온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여셨다.
자력과 타력이 하나를 이룰 때 깨달음이 절로 오듯, 기독교의 구원 또한 안과 밖이 하나다. 예수님의 대속 덕분에 구원은 밖으로부터, 무한한 초월자로부터, 그분께서 죄 많고 한계가 많은 우리 인간에게 은혜로 다가올 때 이루어진다. 하지만, 고승과 대화가 통하는 사람은 그만한 근기가 있어야 하는 법, 무한한 초월자가 제한된 인간 안에 들어올 수 있으려면 인간이야말로 애당초 무한한 초월자와 교감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여야 한다.
가장 낮은 곳에서 깨달음은 시작
그렇다면 “인간의 구원은 비구원적 상황 ‘밖’이 아니라 ‘안’에서, 더 ‘깊고 깊은 안’에서 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이찬수, 「구원, 오늘 우리의」) “인간은 이미 존재론적으로 하느님과 관계 맺어져 있고 선험적으로 고양되어 있는 까닭에 구체적인 존재자로서의 인간이 실존적으로 하느님을 알고 신앙할 수 있게 된다.”(김세윤, 『구원이란 무엇인가』) 타자와의 깊은 관계를 통찰하여 나의 욕망을 줄이는 것이 연기적 깨달음의 출발이듯, 가장 높은 자인 예수님께서 가장 낮고 미천한 마구간에 태어나는 자기비하의 비움에서 구원의 깨달음은 시작된다. 가장 높은 자인 석존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매일 탁발을 하셨다.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자들에게 때로는 홀대를 받고 때로는 욕을 먹고 뺨을 맞아가면서 매일 매일 자기를 버려야 아만과 집착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음을 몸으로 알려 주셨다. 필자가 싯달타의 고행상을 보고 있는 지금, 예수께서 부처 형상을 하시고 고행을 하고 계시다. 자기를 비하할 수 있는 극단까지 떨어트려 타자들에게서 신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을 진정으로 사귀고 섬기고 나눌 때 내가 진정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음을 말씀해주시고자 저리도 크나큰 고통을 감내하고 계신 것이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출처 법보신문 961호 [2008-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