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평화의 길을 묻다-도법 스님 즉문즉설 (1)
참선 10년 잘 안돼 뛰쳐 나와…선방 모순 많아
전생·내생 없어…‘지금 여기서 어떻게’가 중요
지난 4일 서울 정동 프란체스코수도회 강당에서 생명평화결사가 탁발순례를 마치면서 마련한 ‘생명평화의 길을 묻다’란 주제의 여섯번째 즉문즉설에 탁발순례단장인 도법 스님이 나섰다. 비구는 걸사, 걸인이란 뜻이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출가 이후 48년간 탁발승으로 살았다. 지난 5년 동안 지리산을 출발해 전국을 도보로 순례하며 먹을 곳과 잠잘 곳뿐만 아니라 생명평화의 마음을 탁발한 탁발순례단장 도법 스님은 출발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로 청중들과 세 시간 동안 함께 호흡했다. 그는 또 자신이 제주 4·3사태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유복자임을 고백했다. 그리고 동성애자 등 성소수자에 대해서 그 개성과 존재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해야한다고 주장해 큰 박수를 받았다.
탁 내려놓고 순례자처럼 사는 것이 삶의 만병통치약
- 얼굴이 편안해 보이는데 그 비법은. 예전엔 스님도 고통스런 표정이었나.
= 난 교육을 제대로 받지도, 공부를 체계적으로 하지도 못했다. 돈도 없다. 내놓을 것 하나 없다. 그러나 내 인생에 고민이 사무치게 많았던 사람이다. 어떤 계기로 죽음의 문제를 사무치게 인식하게 됐고, 삶의 허무함 때문에 모든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산 적이 있었다. 한참 때는 친구들이 ‘너를 쳐다만 봐도 심각해진다’고 했다. 또 ‘너는 가까이 가면 얼음 같은 차가운 기운에 몸이 떨린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변화한 것은 비록 논리적이긴 하지만 존재에 대한 근원적 회의에 대한 해답을 정리하고, 많은 것을 체념하고 포기하고 버리고 달관한 것이다. 이것이 삶을 홀가분하게 했다. 특히 순례 5년 세월 동안 더 홀가분해지고 편해졌다. 누구나 이것이 가능하다. 침묵 속에 걸음을 생활화하는 순례를 떠나는 것이 비법이다. 순례 중 무수한 사람을 만났는데, 누구도 괜찮은 사람이 없더라. 다 죽겠고, 못 살겠다고 했다. 괜찮은 사람은 나밖에 없더라. 탁 내려놓고 순례자처럼 사는 것이 삶의 만병통치약이다.
- 참선이나 순례를 하면서 그런 생각이 깊어졌던 체험의 순간이 있었다면.
= 죽음 앞에선 일생을 통해 쌓아온 모든 것이 상실된다. 좋아하는 사람과 이별도 해야 된다. 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뼈에 사무쳤고, 고통스러웠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어떤 것도 무의미했다. 결국은 참선해서 도통해야 한다고 해서 선방에서 한 10년 참선해보니 들었던 것처럼 잘 안되더라. 옆 사람들을 봐도 그렇고. 선원은 선원대로 자기모순들이 많았다. 그래서 뛰쳐나와 다시 내 방식대로 경전도 보고, 어록도 보고 정리했다. 특별한 체험은 별로 없다. 끊임없이 내 이성적 사고를 갖고 천착했다. 나름대로 정리해왔고, 그런 과정을 거쳐 쓸데없는 환상으로부터 깨어났다. 부질없는 것들을 걷어내고 포기하기도 했다. 어떤 부분은 사실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라크전쟁으로 한반도 전쟁위기, 구도행위로 막고 싶어 순례
순례는 85~86년 무렵에 개인적으로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순례하는 삶에 충실했다. 출가수행자들에게는 순례에 대한 동경이 있다. 올바른 수행자가 되기 위해선 순례가 있어야 한다. 보살행이기도 하고, 만행이기도 하다. 어떤 이유 때문에 86년에 3년 정도 계획하고 그런 순례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부득이한 사정이 생기면서 그 꿈을 접었다. 그것이 지리산에 살면서 지리산운동을 하게 된 계기다. 당시 이라크전쟁이 발발하면서 한반도도 전쟁위기에 싸였다. 한반도의 존폐가 걸린 문제였다. 국가와 정부는 약해 국민 스스로라도 대책이 있어야 하는데 반미와 친미로 반목하고 소모했다. 이런 고민과 걱정을 하고 있는데, 비폭력 평화운동을 하는 분들이 소수이긴 하지만,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우리가 원하는 평화의 길을 열어가려면 한 가지 길밖에 없다고 했다.
전쟁이 기정사실화해 피난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전쟁을 막고 평화의 길을 갈 사람 10만명만 함께 한다면 전쟁을 막고 평화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설득력이 있고, 실현성이 있다고 보았다. 우리의 운명이 걸린 문제에 대해 새로운 문명사를 쓸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그 일을 해보자고 생각해 결정적으로 순례를 하게 됐다. 개인적으로는 구도행위로서 그런 실천을 하고자 했던 갈망이 있었다. 내가 희망하는 평화의 땅이 될 수 있도록 한반도의 주인들이 주체적으로 행동하는게 맞겠다고 여겼다. 그런 풍토와 흐름을 형성해보자는 것이었다. 순례하면서 얻어진 것은 어쨌든 순례하면 단순해지고, 많은 것을 내려놓게 된다는 것이었다. 삶이 훨씬 홀가분해지고 자유로워진다. 순례하면서 간화선 수행을 해서 걸을 때는 화두를 들고, 시작하기 전 아침과 오후에 끝날 때는 생명평화 100배 절을 하고, 저녁에는 순례지의 마을 사람들과 대화하고. 그런 과정에서 스스로가 단순해지고 홀가분해지고 자유스러워졌다.
겨울엔 추위와 함께, 여름엔 더위와 함께 사는 게 가장 잘 사는 것
- 겨울인데 추워졌다.
= 얻어먹고 다니기도 힘들다.
- 지구 온난화가 심각해져 예전엔 겨울에도 보일러를 켜지 않고 침낭을 썼지만 지금은 보일러를 켠다. 내가 잘못 사는 건가. 잘 살고 있는 건가. 아무런 생각 없이 살고 있는 건가.
= 함께 하면 된다. 세상은 함께 하게 돼있다. 겨울이면 추위와 함께해야 한다. 여름이 되면 여름 더위와 함께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겨울에 되면 추위와 싸우며 따뜻해지려고 하고, 여름이 되면 더위와 죽어라고 싸워 시원해지려고 한다. 그러면 이 세상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없고, 우리 삶도 안전할 수 없다. 그런 삶이 평화롭고 행복할 수 없다. 겨울엔 추위와 함께, 여름엔 더위와 함께 사는 게 가장 잘 사는 것이다. 그런 인식과 확신이 있으면 잘 처리해 가리라고 생각한다.
어느 한 시대에도 경제 타령을 하지 아니한 때가 없는 것 같다. 문제가 뭔가. 경제는 계속 성장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경제 타령이 커지고 높아지고만 있다. 경제만이 희망이라고 진보도 보수도 자본가도 노동가도 도시도 농촌도 한목소리다. 경제타령 안하면 이 사회에서 쫓겨날 것처럼 그런다. 경쟁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경제가 성장한 만큼 잦아들었다고 한다면 그 논리가 맞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가 성장하면 할수록 경제 타령이 커지고 있다면 경제 타령으로 해답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삶은 아무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아주 냉정하다. 살아줄래야 살아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말은 살아준다고 한다. 국가가 나서서, 정치인들이 나서서 말은 살아준다고 한다. 표를 얻기 위해서다. 그러나 실제는 어떤가. 말은 넘쳐나는데 삶은 없다. 아무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주체적으로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이런 기조 위에서, 현실적인 문제로 약자와 가난한 자는 도움이 필요하다. 전제되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 그런 엄연한 사실에 대한 기본적 인식과 태도를 전제하지 않고는 올바른 처방이 될 수는 없다. 내 삶을 주체적으로 다뤄가야 하겠다.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법과 방식이 있어야 마땅하다.
산삼 캐기 위한 모든 것 준비해도 산삼 모르면 산삼 캘 수 있나
- 국가, 사회가 더 중요하지 않은가.
= 국가를 보고, 사회를 보고 거시적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을 가지고 얘기해야 한다. 조선시대 500년간 현장 민중들의 삶은 고달팠다. 그래서 무수한 민란이 일어났다. 이제 국가 사회는 성장했다고 하는데, 현장의 삶은 죽을 지경이다. 현장의 삶을 바라보고 문제를 다루는 게 필요하다. 물론 사회 개혁도 필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삶을 개혁시키는 것이다. 삶이 병들고 왜곡되면 문제가 되는 삶을 살게 되고, 문제가 되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내 자신이 갖고 있는 이런 문제는 정직하고 투철하게 다루지 않으면서 대상만 갖고 하는 것은 본말을 바꾼 것이다.
관점과 태도를 정확히 가져갔으면 좋겠다. 현실을 보자. 누구나 자유 평화 정의와 같은 보편적 가치와 이상을 추구한다. 어떤 전쟁을 일으킬 때도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외친다. 그러나 현실은 내편이 아닌 상대편을 짓밟고 파괴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얘기하는 평화에 불교인들이 포함되는가. 상대를 포용한다면 극단적인 동족상잔의 비극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끊임없이 패거리 싸움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무엇이든 진보가 얘기하면 보수가 동의 안하고, 불교가 얘기하면 기독교가 동의 안한다. 진실은 하나일 텐데도 말이다. 가령 ‘목마를 때는 물 마신다’고 할 때 그것은 진보냐 보수냐, 기독교 논리냐 불교 논리냐. 어떤 논리도 아니며, 누구나 다 동의하는 것이다. 구체적 사실과 진실로 확인될 수 있는 얘기며 너무나 쉽다. 우리 삶을 그렇게 다뤘으면 좋겠다. 지금 여기에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다면 무엇인가.
지금 여기에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고 묻는다면 즉답 나와야
즉각적인 답이 나와야 한다. 그렇게 우물쭈물하며 답을 못하니, 삶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두번째나 세번째로 중요한 것 말고, 가장 중요한 것. 누구나 동의하고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천착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지금 여기 내 생명이다. 이 한목숨 평안하고 건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어떤 것보다 우선한 게 내 생명이다. 내 생명이 살아있지 않고는 추구하고 모색하는 게 불가능하다. 사실을 확인해보면 명확해진다.
내 생명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생명, 평화 얘기 무수히 하는데 개념과 논리로만 다룬다. 도둑놈을 잡는데 다른 것은 다 준비했는데 얼굴은 모른다면 잡을 수 있는가. 산삼 캐기 위한 모든 것을 준비했는데 산삼을 모르면 산삼 캘 수 있는가. 내 생명을 모르는데, 어떻게 생명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가.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의 로고는 생명을 시각화한 것이다. 해와 달. 식물과 동물. 우주 생명을 단순화시켜 표현했다. 태양이 없는 내가 존재할 수 있는가. 누구도 존재할 수 없다. 현상으로 보면 남남이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하나로 연결돼 있다. 지금 여기 나는 온우주가 다 참여하고 관계해서 참여하고 있다. 그물의 그물은 전부 연결돼 있지 않은가. 모두가 그물코인데 나만 사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런 내 생명의 정체성, 내 생명의 실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다. 그래서 너 없이 나만 살 수 있다고 한다. 자기중심적이다. 이기적으로 하면 화목과 평화가 있을 수 있는가. 그렇게는 평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 그 생명이 갖고 있는 법칙과 질서에 맞게 살아가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업은 생태순환 질서,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실천행위
- 불교의 업과 윤회는 어떤 것인가.
= 자연의 법칙이 있고, 다른 하나는 업의 법칙이 있다. 많은 인간들은 자연법칙에 무지한 채 업의 법칙대로만 산다. 이 두 가지는 분리할 수 없다. 인간의 행위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업력이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며 자작자수(自作自收)다. 내가 행위하는대로 내 삶이 이루어진다. 행위는 세 가지로 표현된다. 몸으로 하는 행위, 말로 하는 행위. 생각으로 하는 행위다.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다. 내 삶은 내 행위에 의해 이루어진다. 업을 얘기하면 전생 얘기를 많이 한다. 운명론적으로 얘기하곤 한다. 그러나 업은 매우 주체적이고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실천행위를 의미한다.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실천행위를 업이라고 표현한다. 예를 들면 조상 대대로 도둑질만 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도둑질하지 않으면 도둑놈이 안된다. 지금 여기서 도둑질하지 않는 한 나는 도둑놈이 아닌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전생에 계속 도둑질하고 살아왔다고 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여기서 도둑질하지 않는한 도둑놈이 안된다. 지금 여기서 어떻게 하느냐가 내 인생을 좌우한다. 말하는 초점은 지금 여기 현실이다. 그런데 왜 전생 내생 얘기하느냐. 지금 여기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인식을 위해 설명하는 것이다. 말하는 핵심은 전생도 내생도 없다.
업은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고 직접적이고 주체적이고 창조적이고 역동적이다. 업은 생태순환 질서라고 해도 무방하다. 생명의 순환질서 현상을 종교적으로 시각화시켜 문학적으로 설명하고 묘사하고 있다.
포스코청암상이라는 세속상 받은 건 돈이 궁해서
- 지리산 반야봉에 있다는(실은 중봉) 묘향대를 찾아가려다 실패한 적이 있다. 남한에서 가장 깊다는 곳인데 한번도 알려진 적이 없다(실은 한겨레 휴심정 연재와 책 <하늘이 감춘땅>에서 자세히 다룸). 그 묘향대가 언제 누구에 의해 창건됐는지 아는가.
=내가 박식하지를 못해 잘 모른다.
- 지난해 포스코청암상 받는 것을 보았다. 왜 세속상을 받았는가. 스님들이 오래 사는 건 산삼이라도 먹기 때문인가. 스님은 출가할 때 가족들의 반대가 없었는가.
= 상은 돈이 궁해서 받았다. 너무 오래 살아서 미안하다. 그러나 더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다. 나는 늘 하루살이다. 오늘을 잘 살자. 그게 기본적인 태도다.
나는 유복자인데도 출가할 때 별로 반대가 없었다. 집에서 별로 쓸모가 없었던 모양이다. 중 되고 싶은 것도 아닌데, 집안 분위기가 은근하게 ‘스님이 됐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개인적으로도는 불교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이광수의 <원효대사>를 보고 ‘중도 괜찮겠다’ 싶어 인연따라 스님 됐다. 내 개인적으론 세속에 대한 정이 없다. 남들이 보면 몰인정하다 싶을 정도로 그런 정이 없다. 그것도 업인지, 인연인지 그렇다. 스님들이 장수한다는데 스님들이 장수하냐. 장수하는 사람 그렇게 많은 것 같지는 않다. 스님들이 특별한 삶을 사니 눈에 띄어서 그렇지 장수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
한국 불교 문제의 뿌리는 자기 사상 정체성 확립 부족
- 선방에서 간화선 수행하다 왜 뛰쳐나갔는가. 이거다 싶은 것이 있었는가.
= 뛰쳐나왔지만 간화선 수행은 계속 한다. 간화선을 좌복에 앉아서만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선방에서 나온 이유는 책에서, 경전에서 봤던 것, 또 선사들의 저술에서 보았던 것, 들었던 것과 선방의 실제 내용이 일치되지 않았다. 정반대의 경우들이 많았다. 너무나 모순들이 많아 내 스스로가 거기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선방을 뛰쳐나왔던 것이다. 부처님이 새로운 불교 역사를 열었다. 위대한 탄생이다. 대승불교 탄생도 그 못지않은 위대한 탄생이다. 대승불교 문화권에 있는 한국불교가 자기모순들이 많다보니 많은 비판을 받게 돼 대승불교가 몹쓸 것처럼 비판받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위대한 탄생이라면 대승불교의 탄생도 그 못지않게 위대하다. 대승불교의 핵심은 모두가 본래 부처라는 것이다. 실천은 하나는 선수행이고, 하나는 보살행이다.
- 한국불교에 대해 비판할 게 많다고 본다. 무엇이 문제인가.
= 대승불교의 가치에 대해서 맹목적이라면 그 자체가 대승불교적이지 못한 것이다. 대승불교는 모순이 있으니까 초기 불교만이 진짜고, 대승불교는 변질된 것이고 시원찮은 것이라고 하는 것도 불교를 잘 모르는 것이다. 어떻든 한국 불교의 문제는 이런저런 문제는 많지만 본질적으로는 불교 사상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잘못된 이해가 가장 원천적인 문제다. 이런 부분에 대해선 심각한 성찰과 새로운 자기 정립이 있어야 한다. 곳곳에서 간헐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사상적으로 자기 정체성이 확립돼 있지 않다보니, 사찰과 종단의 운영방식에서도 불교적이지 못하고, 수행 전통에 어긋난 문제가 야기된다. 이것 저것 얘기하자면 많다. 핵심만을 보면 자기 사상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취약하고 빈약하다. 그게 근본원인이 돼 다음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동성애, 좋다 나쁘다를 떠나 개성과 존재가치 존중해야
- 불교계는 황우석 교수를 왜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가.
= 나한테 물을 일이 아니고 조계종단에서 물어야 한다. 사람들이 인정사정이 없구만. 그 기사를 조현기자가 써서 조계종에서 내가 몰매를 맞았다. 나는 줄기세포도, 생명공학도 잘 몰랐다. 그러나 생명을 인위적으로 손질하는 것 아닌가. 불교 사상과 정신으로 생명공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이런 걸 정리하지 않고, 모든 것을 건너뛰어서 황우석씨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고 불교신자이니 더 잘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보호하고 어려움에 처하면 지켜야 한다는 처신은 문제가 많다. 해야될 일을 먼저하고. 그것이 불교 세계관과 맞는지에 대한 선행작업 없이 그냥 그이가 세계적인 과학자이고 불자여서 돕자고 한다면 말이 안된다. 황우석문제가 아니라 생명을 먼저 정리해야 한다. 불교계가 황우석에 대해 열렬하게 나서서 지지하는 데는 한국불교가 가진 아픔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조선 500년간 정치적으로 박해받았던 멍에가 한국불교를 짓누르고 있다. 국가 사회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일제 36년과 해방 이후 서구문물이 몰려오고 개신교가 급성장하면서 더 큰 피해의식을 겪게 됐다. 이런 피해의식이 있는데,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데, 타종교에서 황우석씨가 불교신자이기 때문에 죽인다는 음모적인 얘기가 돌았다. 그러니 불교계도 거기에 맞먹는 행동과 반응을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는 바는 그 정도다. 한국 불교의 아픔에 대해 비판을 하더라도 애정을 갖고 봐 달라. 한국불교엔 역사의 멍에가 무겁게 짓누르며, 장애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 도법 스님은 연애를 해봤는가. 이상형이 있다면 어떤 형인가. 혹 여자를 좋아하지 않고 성적 취향이 틀린다면, 성적소수자에 속한다면 어떤 남자분들을 좋아하는가. 그리고 동성애자 등 성적 소수자에 대한 의견은 어떤가.
= 연애를 했다고 하면 좋겠는가. 안했다고 하면 좋겠는가. 사실 연애는 한 적이 없다. 연애 감정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매력이 없다고 타박을 한다. 그래도 여자는 무조건 좋다. 경전에도 남자에게 향기로운 존재는 여자다고 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여자에게 향기로운 존재는 남자다. 대단한 사실인식이다. 연애 감정이 별로 없어서 이상형은 생각 안 해봤다.
성적 소수자는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현실로서 존재한다면 그 존재의 개성과 존재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출처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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