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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경 스님의 유식삼십송 강설]22. 유식삼성의 관계

slowdream 2009. 1. 13. 17:51

[인경 스님의 유식삼십송 강설]22. 유식삼성의 관계
부처와 중생은 한 마음에서 나와
그 원리 이해하고 깨닫는 게 불교
기사등록일 [2009년 01월 12일 13:54 월요일]
 

그런 까닭에 원성실성과 의타기성은 서로 다른 것도 같은 것도 아니다.
마치 항상함이 없는 법의 성품처럼, 원성실성을 보지 못하면 의타기성도 볼 수가 없다.
(故此與依他 非異非不異 如無常等性 非不見此彼)

 

이것은 제22송이다. 앞의 21송에서 원성실성, 의타기성, 변계소집성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말한 바가 있다. 현실에 물들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면 그것은 원성실성이 된다. 하지만 반대로 인식의 주객이 물들어서 대상을 보고 집착하면 변계소집이 된다.

그래서 마조의 홍주종에서는 ‘평상의 마음이 그대로 도이다(平常心是道)’라고 했고, 『신심명』에서는 ‘대상을 간택하지 말라. 그러면 도에 들기 쉽다’고 했다. 세계는 인연을 따라서 끊임없이 변화된다. 이 자체로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다. 세월이 흐르면 젊음은 무너지고 늙어간다. 이 자체로 부족함이 없는 원성실성이다. 이것은 언제 어디서나 널리 편재하고(遍), 한결같으며(常), 거짓됨이 없다(非虛).

 

원성실성과 의타기성은 같으면서도 다른 측면을 가진다. 현재에 물들지 않으면 원성실성과 의타기성은 같다. 이때는 깨끗한(淨分) 의타기성이다. 그러나 여기에 분별을 내면, 그 순간부터 고통스런 집착으로서 변계소집이 발생된다. 이런 경우는 의타기성은 원성실성과 다르다. 이것은 물든(染分) 의타기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깨닫게 되면 현실이 그대로 정토이지만, 갈망에 물들면 현실은 정토가 아니라 예토(穢土)가 된다.

 

의타기성이란 상호 의존되어 전개되는 현실인데, 이곳에서 우리는 자아와 세계라는 견해를 내고 여기에 집착을 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 착각과 같다. 마치 새끼줄을 잘못 알고 뱀으로 오인하는 것처럼 말이다. 예를 들면, 강박이 심한 어떤 내담자의 경우를 보자. 그는 부모를 비롯한 세상은 나를 비난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실수를 절대로 하면 안 되고,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무척 애를 쓴다. 이것은 세계, 세상에 대한 견해이다. 반면에 그 내면에는 왜소하고 불안한 자아개념이 가로놓여 있다. 그는 비난받을까 전전긍긍한다. 자신은 매우 나약하고 실수투성이고, 잘 하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긴장 상태는 오래가지 못하고 폭발하거나 자포자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쉴 날이 없다.

 

자아와 세계에 대한 잘못된 견해가 변계소집이다. 이것이 불안과 우울증을 만들어낸다. 자아와 세계를 변하지 않는 어떤 대상으로 파악하는 상태를 보통 얼음에 비유한다. 이런 경우는 딱딱하고 차가워서 대인관계에서 매우 불편함을 야기하고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피곤하게 한다. 이것이 변계소집이다. 봄이 와서 변계소집의 얼음이 풀리고 강물을 이루면 이것을 우리는 의타기성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자아와 세계라는 고정관념이 없다. 다만 끊임없이 흘러가는 도도한 인연의 흐름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의타기성의 무상성을 보지 못하면 결코 원성실성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점을 『성유식론』에서는 ‘의타기상에서 잘못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자아와 세계를 실재하는 대상으로 인식하는데, 이런 자아와 세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이것들이 본래의 존재하지 않음을 자각하는 것’을 이름하여 원성실성이라고 한다. 이런 까닭에 ‘의타기성, 변계소집성, 원성실성’은 바로 이 한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한 마음에 집착하면 변계소집이요, 집착에서 벗어나면 원성실성이다. 그래서 보조지눌 국사는 『수심결』에서 부처와 중생은 모두 한 마음에서 나왔다고 했다. 한 마음에 미혹되면 이것이 변계소집이고 중생이다. 이 한 마음을 깨달아서 온갖 공덕을 불러일으키면 이것이 부처이고 원성실성이다. 그러므로 이 한 마음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보고 깨닫는 일은 불교공부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가 된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982호 [2009년 01월 12일 1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