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이 있을 때에 지혜를 얻는 바가 없다면,
이때야말로 참으로 유식에 머문 것이다.
왜냐면 주객의 2가지 인식을 떠난 까닭이다.
(若時於所緣 智都無所得 爾時住唯識 離二取相故)
이것은 제28송이다. 이것은 유식수행의 5단계 가운데 견도위(見道位)를 설명한 게송이다. 자량위(資量位) 단계가 복덕과 지혜로서 내적인 자질과 역량을 키우는 단계이고, 가행위(加行位) 단계는 인식의 주객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하여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는 참된 유식의 도리를 깨닫는 것이라면, 견도위 단계는 인식하는 주객의 집착을 떠나서 무소득의 경지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인식에는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의 대상으로서 현상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런 것들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여기에 머무는 단계가 견도위이다. 이것을 ‘분별이 없는 지혜(無分別智)’라고 한다. 분별이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일반적으로 인식은 3가지 요소가 요청된다. 하나는 인식하는 주체이고 둘째는 인식되는 대상, 셋째는 인식의 결과로서 지식이다. 하지만 무분별지는 이런 3요소가 모두 부정된다. 이것에 대해서 대체로 다음과 같은 3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유식학파의 견해로서 인식주관과 대상, 그 결과는 본래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관점이다. 이런 판단의 근거는 지금까지 설명해온 바의 인연설이다. 이들은 상호 의존된 관계로 그 자신의 고유한 실체를 결여하고 있다. 인식하는 자아는 인식되는 대상을 떠나서 별도로 존재하지 못하고 대상도 역시 그것을 인식하는 주관의 관점을 벗어나서는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계는 저기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자의 관점과 상호작용하여 그에 따라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에서 말하고 있듯이, 햇살은 입자이면서도 파동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난다. 세계의 대상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자의 의식에 현현되는 영상일 뿐이다.
둘째는 주로 선종의 입장이다. 인식의 대상과 주관을 부정하지 않고, 나아가서 인식의 결과도 역시 인정한다. 다만 대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알지만, 마음 자체는 그것에 물들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점은 <육조단경> 이후에 선종에서 한결같이 유지해온 관점이다. 보조지눌의 경우에도 이점을 중요한 깨달음의 징표로 삼았다. 인식은 존재하지만, 인식하는 자는 없다는 초기불교의 관점과도 상통한 입장이다. 존재자가 없기에 대상을 인식하더라도 그것에 물들지가 않는다. 그래서 볼 때는 단지 보기만 하고, 들을 때는 단지 듣기만 하라는 붓다의 교설은 바로 이런 분별이 없는 지혜를 말한다.
셋째는 명상치료의 입장이다. 예를 들면 우울증을 치료하는데 있어서 행동치료는 즐거운 활동을 중시하고, 조건화된 학습의 결과로서 나타난 행위를 새로운 활동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일상의 생활에 전념하게 한다. 반면에 인지치료에서는 우울증을 만들어내는 생각이나 신념을 찾아내어 그것을 교정함으로써 치료를 돕는다. ‘나는 가치가 없다’는 생각에 자꾸 집착하는 내담자가 있다면, 스스로 가치 있음을 발견하게 하고, 가치 없음의 사고에 대항하여 긍정적인 방식으로 사고방식을 바꾸게 함으로써 치료적인 효과를 본다.
반면에 명상치료에서는 우울한 감정을 통제하거나 조절하는 대신에 그것을 존재하는 그대로 수용하게 하고 무엇보다도 우울을 인식하고 느끼는 주체는 결코 우울하지 않음을 자각하게 한다. 우울은 나의 일부일 뿐이지, 나의 전체는 아님을 자각하게 함으로써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에서 벗어나게 돕는다.
결국 제28송은 일상에서 자주 발견되는 감정, 생각, 혹은 갈망 등이 분별 혹은 집착의 결과라는 것이고, 이들은 우리의 본질이 아닌 까닭에, 이것에 대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끝내는 얻는 바가 없음(無所得)의 행복감에 머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987호 [2009년 02월 23일 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