얻는 바가 없고 사량할 수 없는 이것이 출세간의 지혜이다.
2가지의 거칠고 무거운 번뇌를 버림으로 인하여 문득 전의를 증득한다.
(無得不思議 是出世間智 捨二 重故 便證得轉衣)
이것은 제29송이다. 이것은 유식수행의 5단계 가운데 수습위(修習位)를 설명한 게송이다. 자량위(資量位) 단계가 복덕과 지혜로서 내적인 자질과 역량을 키우는 단계이고, 가행위(加行位) 단계는 인식의 주객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하여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는 참된 유식의 도리를 깨닫는 것이고, 견도위(見道位) 단계는 인식하는 주객의 집착을 떠나서 무소득의 경지에 머무는 것이라면, 수습위 단계는 주객의 인식에 의한 분별과 그 결과로 나타난 제8식의 습기까지 벗어나 전의를 이룬 상태를 말한다.
위에서 세간을 벗어난 출세간의 지혜란 인식의 주객과 그에 따른 번뇌를 말한다.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는 순간에 인식하는 주관이 생겨나는데 이것이 바로 자아라는 번뇌(煩惱)의 장애이다. 그럼으로써 외계의 대상을 집착하고 실재하는 것으로 잘못된 인식을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소지(所知)의 장애이다. 이런 2가지 장애가 온전하게 사라짐으로써 얻게 되는 지혜가 바로 출세간의 지혜이다.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번뇌장이라고 한다. 이것은 『금강경』에서 말한 아상, 인상, 수자상, 중생상이 바로 그것이다. 굳게 집착된 자아의 존재가 사실은 말만 있을 뿐이고 인연의 결과로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하는 것이 번뇌장을 끊는 것이 된다. 이때에 해탈을 얻는다고 말한다. 반면에 인식의 주객에 의해서 생겨난 대상, 사물에 대한 집착을 법집(法執)이라 한다. 법집은 외계의 사물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앎의 장애로서 소지장(所知障)이라고 한다. 이 2가지 장애는 생사윤회를 되풀이하는 근본적인 장애이다.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번뇌장은 정서적인 측면에 관여한다. 자아의 존재에 대한 집착에서 분노나 슬픔과 같은 감정적인 고통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소지장은 지적인 측면에 관련된다. 대상의 존재와 더불어서 세계에 대한 판단에 관여된다. ‘세상은 지옥과 같다’ 혹은 ‘그는 나를 무시하였다’ 등과 같이 외계 대상에 대한 인식을 법집이라고 한다.
이런 2가지 장애에 의해서 우리는 고통의 바다를 떠돌고 깨달음에로 나아가는데 장애를 받는다. 이것들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깨닫는 일이 명상수행의 길이다. 이때 정서적인 측면에 관여된 번뇌장을 정화하는 길이 사마타(止)의 선정(禪定) 수행으로서 ‘해탈’의 길이다. 반면에 앎의 장애를 소멸하는 길을 위빠사나(觀)에 의한 ‘깨달음(bodhi)’의 길이다. 처음 수행의 길에서는 ‘지관’이라고 했고 점차 깊어지면 ‘정혜’라 하고, 궁극에 이르러서는 ‘열반’과 ‘무상보리’라고 한다. 이렇게 산하대지가 본래의 풍광을 존재하는 그대로 드러남을 전의(轉衣)라고 한다.
전의란 『성유식론』에 의하면 ‘전(轉)’은 번뇌장과 소지장의 2가지 번뇌를 버리고, 대신에 마음의 평정과 지혜를 얻는 것을 말한다. ‘의(衣)’란 의타기(依他起)로서 번뇌에 물든, 집착적 변계소집에서 진실하고 깨끗한 원성실성에로 그 의지처가 전환됨을 의미한다. 그럼으로 전의는 명상수행에 의한 마음의 질적인 변혁을 말한다. 유식불교에서 명상 수행한다고 하는 것은 ‘영상관법’을 의미한다.
유가행파의 영상관법은 떠올린 영상을 대상으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닦는 것으로, 그 영상에 대한 사유가 원만하여 몸과 마음이 변화하게 되고, 이렇게 원만하게 됨으로써 번뇌가 소멸되고 전의를 이루어서 영상을 초월하고 무분별의 지혜가 생긴다. 여기서 영상이란 제8식에 보관된 종자로서 바로 번뇌장과 소지장을 촉발시키는 결정적인 방아쇠 역할을 한다. 이런 잠재된 번뇌와 소지의 종자, 습기가 영상관법에 의해서 청정해짐으로써 마음과 지혜가 청정하여지는데, 이것을 전의라 한다.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989호 [2009년 03월 10일 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