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물듦이 없는 법계이다. 생각할 수 없는 착함과 영원이다.
안락한 해탈의 몸으로서 이것이 위대한 석가모니의 법이다.
(此卽無漏界 不思義善常 安樂解脫身 大牟尼名法)
이것은 마지막 제30송이다. 이것은 유식수행의 5단계 가운데 구경위(究竟位)를 설명한 게송이다. 수습위 단계에서 주객의 인식에 의한 분별과 그 결과로 나타난 제8식의 습기까지 벗어나 중생에서 성인으로 전의를 이룬 다음에 나타난다.
위에서 무루(無漏)란 물듦이 없음을 말한다. 루(漏)란 집에 비가 샌다는 의미로서 감각기관을 통해서 외적인 자극이 오면 그것에 물들어 분별과 내적인 습기로 말미암아서 번뇌에 노출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무루란 구경위 단계의 마음으로 일체의 세간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물들지 않고, 깨끗하고 원만하고 밝음의 상태를 말한다. 논란이 많은 계(界, dhatu)의 의미는 『성유식론』에 따르면, 2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감춘다는 의미로 한량없는 공덕을 함용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연의 의미로서 세상의 온갖 사건을 발생시킨다는 의미이다.
비판불교에서는 이런 대승사상을 비불교적인 요소로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계(界)를 단일한 기체가 다수의 현상들을 발생시키는 발생론적으로 해석하여, 아트만(atman) 사상이라고 본다. 하지만 『성유식론』에서 보듯이 계란 인연(因緣)의 의미로서 온갖 공덕과 사건을 가져오는 원인과 조건으로서 이해된다. 이것을 그런 공덕과 사건을 발생시키는 기체(基體) 혹은 주체자로는 해석할 수가 없다.
비판 불교적 관점에 놓인 이들은 임제의 무위진인(無位眞人)도 아트만사상이라고 말한다. 어떤 차별과 사회적인 규약에서 벗어난 그 자체로 물들지 않는, 진인은 처음 마음(初心)으로 세상을 경험하는 여기 지금의 구체적인 인간을 말한다. 구체적이고 현장에서 살아있는 참된 인간은 철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결코 아니다.
이런 인간을 여기서는 그 가치를 착하고, 항상 되고, 안락하며, 해탈의 몸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무너지는 몸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경험을 하고, 몸으로서 사무치게 원인과 조건을 체득하게 된다. 여기서 몸(身)이란 개념이 아니라 체험이고, 이론이 아니라 명상수행을 의미한다. 몸에는 세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성신(自性身)으로, 삶의 전체작용으로서 사물과 사물을 서로 연결되어 존재하고 그 자체로 완결된 채로 온전하게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면의 큰 평화이고 우주의 전체성을 말한다. 근본적으로 장애 없는 진실이며 모든 것을 감사하고 사랑하며 자연과 하나임을 기억한다. 이것은 삶에 대한 충만과 행복감으로 표현되고 거울처럼 깨끗하고 스스로 빛나는 것이다.
둘째는 수용신(受用身)으로, 그 자체로 텅 비어 있어서 모든 존재를 그 자체로 그대로 수용하는 경험을 말한다. 또한 모든 형상은 그 자체로 존재하기보다는 서로 의존되어서 존재하는 관계로 수용하면서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다. 이것은 타자에 대한 존중과 인정에서 비롯된 나눔의 경험이다.
셋째는 변화신(變化身)이다. 스스로 관념적이고 결정된 개념에 갇혀있지 않기에 인연에 따라서 변화가 된다. 마치 물처럼 굽어진 계곡에서 굽어진 모습으로 나타나고, 넓은 들판에서 내달리기도 한다. 인연을 따라서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면서 한량없는 법을 설하여 안락과 기쁨을 함께 한다.
우리는 이런 신령한 몸을 본성, 불성, 자성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이름뿐이다. 일상의 생활 가운데서 온전하게 작용하면서 물들지 않고, 순간순간 지금여기에서 깨어나 함께 작용하는 것, 겨울엔 눈이 날리고 봄에는 꽃이 피는 것,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어나는 것, 이것을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990호 [2009년 03월 17일 1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