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노자, 붓다, 공자, 소크라테스 그리고 예수를 인류의 오대 성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들의 사상을 숙고하면 노자와 붓다, 그 밖에 다른 성자들의 사상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다른 성자들처럼 그들아 생각한 진리를 설파하려고 하지 않고, 이 세상의 근원적 사실을 기술한 것이라는 점이다.
즉 다른 성자들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 진리는 내가 교설하는 것이니, 다르게 생각하지 말라고 타이르는 것으로 집약된다. 그러나 노자와 붓다는 그들이 말한 진리를 생각하라고 설파하지 않고 세상의 불변적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사실을 알기 위하여 특별한 학문의 습득이나 신앙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지도 않았다. 단지 마음이 어떤 것에 의하여 집착당하지 않으면 된다고 역설했다.
노자가 가르치는 도도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도처럼 배워야 할 학문의 대상이 아니다. 배우려고 노력하는 마음은 마음을 추슬러서 도(道, 진리)와 비도(非道, 비진리)를 가리려는 선택에 가로 놓여 있는데, 노자는 그런 도는 인간이 자연적으로 알게 되는 우주의 사실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그 점에서 붓다의 가르침과 노자의 길이 너무 유사하다.
그러나 붓다와 노자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노자는 세상의 사실을 차갑게 말하는 언표의 수준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붓다는 세상의 불변적 사실을 냉정하게 말하는 수준을 넘어서, 어떻게 하면 중생들이 착각하여 아무도 바꿀 수 없는 사실을 모르고 헤매는 어리석음을 깨우치려고 자비심을 가졌었다는 것이다.
붓다의 교설은 세상의 사실을 가르쳐 주시는 법문이다. 그 법문은 어리석은 중생들의 짙은 무명 때문에 그것을 다각도로 제거하기 위하여 8만4000가지의 종류로 나타났다. 그래서 붓다는 지혜와 자비의 대명사로 다가온다.
노자와 붓다는 인류의 성자들 가운데 자신들의 주관적 요인이 가장 없는 그런 도를 설법했다. 그들은 주관적 요소가 가장 없는 사실을 설파했기에 다른 사상과 생각들을 견제하거나 추방하는 일이 없다. 아마도 오대 성자들 가운에 불교만큼 자기 확신과 신념에 가득찬 교주의 주관이 섞이지 않는 종교는 없겠다. 물론 저 성자들은 한 결 같이 내 생각만이 도요, 진리라고 노골적으로 언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노자를 제외한 다른 교주들은 아주 은근히 주관적 색채를 띠는 언설을 했기 때문에, 그의 문도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행태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이지 종교적 교설을 말하지 않았다고 하겠으나, 그의 이상주의는 그런 배타성과 순수성을 암묵적으로 회임하게 된다. 불교를 흔히 어떤 이들은 정신적인 이상주의인 것처럼 주장하지만, 불교는 그런 이상주의가 결코 아니다. 모든 이상주의는 고상해 보이지만, 안으로 순수주의를 회임하고 있고, 그 순수주의가 세상과 싸우는 투쟁의식을 조장한다.
노자를 제외한 삼대 성자 중에서 가장 주관적 교설이 강한 분이 예수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보다 더 뚜렷한 주관적 신념이 어디있을까?
붓다는 그래서 어떤 종류의 선택이나 분별심을 풍기는 그런 도를 배제했다. 우리가 우리 마음에서 주관적 간택심을 여읜다든가, 좋고 싫어하는 호오심(好惡心)을 두지 않으면, 바로 그 순간에 우주적 사실이 우리의 마음에 통연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붓다와 승찬 큰스님이 가르쳤다.
불교가 주관적 심리의 색깔을 온전히 지우는 가르침이라면, 불교는 객관적 진리를 설파하려고 애쓴 것인가? 불교적 사실은 주관적인 것도 아니고, 객관적인 것도 아니다. 객관적 사실은 과학에서 전매특허로 말하지만, 불교의 사실은 우주적 사실의 언설이다. 객관적 사실은 측량가능하고 인위적으로 실증적인 정신을 띠고 있으나, 불교가 설하는 사실은 그런 기술적 사실이 아니다.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988호 [2009년 03월 02일 1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