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한 도(道)는 우리가 간택심과 애증심을 버리면, 순간적으로 직관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 어린 아이도 그냥 그대로 알 수 있는 것이 도(道)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마음속에 티끌만큼이라도 취사(取捨)하는 간택심과 싫고 좋은 애증심을 일으킨다면, 그 순간에 그렇게 쉬운 불도가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승찬 대사가 말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
내 몸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누비고 있는 사실과 한 몸이 되고, 내 마음이 우주 삼라만상의 마음과 함께 느낀다면, 내 몸과 마음은 우주의 몸과 마음과 하나로 연계되어 있는 셈이다. 우리가 부처라고 부르는 분은 삼라만상의 사실적 우주실상을 온전히 증득하고, 무한한 우주의 삼라만상을 그 마음에서 하나로 느끼는 마음을 가졌다.
그러므로 불신(佛身)은 우주의 물질이고, 불심(佛心)은 우주의 마음이다. 우주의 물질을 이유 없이 천하다고 훼손하면, 그것은 부처의 몸을 모욕하는 것이고, 우주의 하찮은 미물이 괴로워하면, 그것은 부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다. 이것을 설명하기는 쉬워도, 그것을 실제로 증득하여 우주와 한 몸과 한 마음으로 부처처럼 같이 느끼기는 어렵다.
우주적인 심신(心身)과 하나로 느끼는 일을 어떻게 하면 체득할 수 있을까? 물론 그것은 이론적으로 나 자신을 없애버린 무아(無我)의 상태에서 가능하겠다. 아상(我相)이 남아 있는 한에서 우주적 심신을 간절하고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말처럼 자아를 무아의 상태로 변형시킨다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해 보인다. 자아를 없애기보다 오히려 자아를 우주아(宇宙我)로 대신 채워나가는 것이 보다 수월하리라.
나를 우주처럼 크게 확장하고 팽창시켜 나가는 것이 대승사상의 핵심이 아닐까? 이런 대승사상은 소유론적 사고방식을 지양하고 존재론적 사고방식을 생활화함으로써 일어나겠다. 불교 이외의 동서철학과 종교사상은 거의 대개 존재론이라는 개념을 썼지만, 기실 소유론적 형이상학의 굳은 테두리 안에 정착해 왔었다. 여기서 존재론적 사고방식 등과 같은 난해한 용어가 나오지만, 그 용어의 자연스런 이해는 서서히 점진적으로 풀릴 것이다.
과거의 동서철학과 종교사상이 거의 대개 소유론적 사고방식의 습관 속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을 최초로 알아차린 철학자가 독일의 하이데거고, 그것을 풍자하면서 부수려고 조금 먼저 노력한 이가 독일의 니이체다. 이들 철학자들의 생각을 뒤에 우리가 쉽게 조금씩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것이다. 한꺼번에 다 설명하기가 어려우므로 조금씩 들어가기로 하자.
모든 선택심과 애증심은 자아중심의 사고방식에서 온다. 자아중심으로 선택하고 애증심을 느낀다. 이런 심리가 곧 중생심이다. 중생이 자아중심으로 세상사를 평가하고 감정적으로 재단하면, 그는 부처의 우주심과 천양의 차이를 갖는다. 부처되는 길과 정반대의 길을 그는 가는 셈이다.
중생은 늘 좁은 자아의 시각으로 이기적으로 재고 따진다. 그러나 부처는 우주처럼 드넓은 무한의 차원에서 삼라만상이란 다양한 존재자들의 존재방식이 서로 장애를 받지 않고 원융하게 살도록 보살핀다. 애증심과 간택심은 다 이기심으로부터 일어난다. 이기심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의 이름처럼 수만 가지로 갈라진다. 흔히 우리는 어떤 나쁜 악행의 원천이 모두 자연적 본능심에서 생긴다고 믿고 있다. 본능대로 행동하기에 인간사회가 물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연의 본능심이 모든 악행의 근원이 아니라, 사회적 지능심이 모든 악행의 진원지이다. 우리는 보통 사람답지 않는 사람을 두고 금수보다 못한 놈이라고 지칭한다. 이런 소리는 유교적 도덕주의의 소산이다. 그 말은 틀렸다. 자연의 금수는 선악을 모르는, 즉 선악 이전의 존재방식으로 살고 있다. 자연적 금수의 본능에 모든 도덕적 악의 흉물을 뒤집어 씌워서는 안 된다.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출처 992호 [2009년 03월 31일 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