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 우리는 자연적 본능과 사회적 지능(사회적 본능과 뒤섞인), 직관을 훑어보았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중생은 자연적 본능의 마음을 갖고 있지만, 인간은 사회적 지능과 직관의 능력을 구비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과 중생과의 차이는 전자가 열려 있는 자유의 존재방식을 구비하고 있고, 후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 회에 언급된 내용은 살려고 하는 욕망을 인간 만이 미결정적인 자유를 통하여 실현한다는 것이다. 용수(龍樹)보살의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언급된 지혜의 원천으로서의 미결정성이 곧 인간의 자유를 상징한 것이다. 인간이 자유롭다는 것은 지능과 직관의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들이 자유롭다는 것은 곧 맹목적으로 한 곳에 묶여 있지 않고, 대상과 영역이 무한대로 가변적이라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학습과 수행에 따라 그 능력이 가변적이다.
그러나 지능과 직관에 차이점이 있다. 지능은 분별력과 추리력으로 점진적 학습을 경험적으로 이루어가지만, 직관은 마음의 위상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단번에 사태의 본질을 바로 꿰뚫어 본다. 상대방의 화난 얼굴과 기쁜 얼굴은 보자마자, 어린 애기도 즉각 알아차린다. 이것이 직관적 통찰력이다. 이 점에서 직관적 통찰력은 자연적 본능과 아주 유사하다. 그래서 베르크손이 이 직관력을 ‘공평무사한 본능’이라 불렀다.
자연적 본능이 사회화하면 사회적 본능이 되어 자아중심적 이기심에 빠지는데, 직관력은 이해관계를 떠날수록 그 생명력은 강렬해진다. 마음이 소유적 욕망을 비울수록 직관력은 더욱 본질적으로 투철해진다는 것이다. 중국 송대의 유학자 정명도는 “공심(空心)과 공심(公心)과 공심(共心)은 서로 회통한다”고 말했다.
빈 마음은 곧 사리사욕이 없이 공공(公共)의 이익을 겨냥하는 마음이겠다. 말하자면 직관력은 사리사욕이 없는 정신적 직관력과 통찰력을 의미한다. 중생으로서의 인간은 살아남기 위하여 사회적 본능과 지능의 소유자로 무장되어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이 공평무사한 마음인 직관력을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불성이다. 이 불성의 직관력은 지능처럼 무소부지(無所不知)하여 앎의 극치에 이르지만, 직관력은 정신을 정신으로 바로 이해하는 마음의 내적 통찰력을 의미한다.
그에 비하여 지능은 대상적 인간의식의 태도로서 대상을 분석하고 캐내려는 외적 인간의식의 입장이다. 직관과 지능은 닫혀 있는 자연적 본능에 비하여 모두 열려있다. 그러나 직관은 지능에 대하여 오히려 본능의 인식에 훨씬 더 가깝다. 왜냐하면 본능은 비록 애초에 받은 자기의 명령에 갇혀 있으나, 추리와 분별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바로 상황의 본질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작의 부분에서 마음과 의식의 관계를 자세히 다루는 까닭은 불교와 승찬 대사의 『심신명』이 마음의 이치를 말해주는 가르침인데, 전통적으로 이 마음의 본질을 잘 알리지 않고 그냥 두루뭉수리하게 마음을 자꾸 사용하여 일반인들의 인식상 혼란이 야기되기 때문이다. 현대의 설법은 정확하고 명확하게 언명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앞으로 마음의 사용이 자주 일어나더라도 애매모호한 인식의 혼란은 예방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다시 밝힌다. 우주 삼라만상이 다 마음이다. 그러므로 『화엄경』에 나오는 일체유심(一切唯心)의 말을 인간의 마음만을 말하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착각하는 불교인이 의외로 많다.
그 마음은 우주심(宇宙心)이라고 봐야 한다. 이 우주심은 자연적 본능이다. 자연적 본능은 살려고 하는 욕망이다. 이 자연적 본능은 이미 결정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자연적 본능은 대단히 허약해서 그 정도의 힘으로 살아나갈 수 없다. 그래서 자연은 인간에게 다시 사회적 본능으로서의 지능과 정신적 직관력을 구비하게 하였다. 다 인간의 자유로운 존재방식처럼 열린 능력의 힘이다.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997호 [2009년 05월 03일 2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