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생활과 사회생활을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인간은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고, 또 사회생활을 외면하고서도 생존할 수 없다. 인간은 자연성과 사회성의 두 가지 상반된 행동지침을 선천적으로 안고 살아간다. 여기에 인간의 허약성과 위대성이 동시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허약성은 인간의 불완전한 자연성과 불완전한 사회성으로 말미암아 어느 한 곳에 축을 박고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없고, 늘 부동(浮動)하는 가변성을 말하며 위대성은 인간의 자유스러움을 말한다.
부동하는 가변성이 다른 한편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전대미문의 생애를 스스로 연출하게끔 한다. 동식물들에게는 거의 대동소이한 생활의 방식이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지상에 태어난 인간에게는 거의 같은 인생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와 인간의 허약성은 동시적으로 성립하는 이중성이다. 이 이중성이 인간으로 하여금 동물처럼 온전히 자연적 본능으로 살지 못하게 방해를 일으키고, 또 신처럼 온전히 정신적 지능으로 살지 못하게끔 지장을 주고 있다.
동물의 자연적 본능은 동물로 하여금 신기에 가까울 만큼 완벽하게 각각의 생존을 위한 노하우를 행사하도록 한다. 또 신적 지능은 미래와 과거의 모든 것을 투시할 만큼 투명하게 바라본다. 그런 점에서 동물과 신의 공통점은 그들이 본질적으로 거의 불변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가변적이다. 이것이 허약하고, 이것이 위대하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생존의 자연적 본능은 있으나, 그 본능이 동물들의 것에 비하여 너무나 미약해서 사회생활에서 후천적으로 제공해 주는 사회적 지능의 힘에 완전히 눌려 지능 속에 흡입되어 버렸다. 비록 동물들에게 군집생활에서처럼 군서성(群棲性)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군서성도 동물들의 자연적 본능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동물들의 살려고 하는 욕망은 생명의 일반적 표현일 뿐이다.
인간의 본능은 사회생활의 지능에 파묻혀 ‘내’가 살려고 하는 자아의식의 충동으로 각색된다. 자연생활은 자연적 본능인 ‘그것(Id/선가(禪家)에서 이것을 거(渠)라고 함)’이 삼라만상만큼 다양하게 분여되었지만, 사회생활에서 그 자연적 본능이 사회적 지능이 낳은 자아에 의하여 덥혀버렸다. 그래서 그 본능은 ‘그것’이 살려고 하는 욕망이 아니라, 오로지 ‘내’가 살려는 욕망으로 변색되어 버렸다. 이것을 우리는 사회적 본능이라 불러도 좋겠다. 내가 살기 위하여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으려는 충동이 일어난다.
내가 사는데 이로우면 좋고, 해로우면 나쁘다는 분별의식은 이 사회적 본능의 소산이다. 이 분별의식은 승찬 대사가 말한 순역(順逆)의식이다. 이 의식은 모두 사회적 본능의 소산이다. 사회적 본능에 눈 뜬 지능은 다 자타이원론적 간택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없다. 이 간택심은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부처의 길과 다른 중생의 길로 자꾸 달려간다. 인간이 가는 중생의 길은 일반 중생들에게 고정되어 있는 중생의 길보다 더 좋지 않다. 왜냐하면 일반 중생에게는 위대한 자유의 길이 없으나, 인간에게는 그 길이 있다. 그래서 인간이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리하려면 내가 잠시도 쉬지 않고 사용하는 사회적 본능인 사회적 지능을 놓아 버려야 한다.
사회적 본능을 놓으면, 인간은 순수 자연적 본능으로 되돌아가는가? 이 본능은 자연의 영리한 섭리를 제 각기 다르게 놀라울 정도로 황홀하게 표현하지만, 20세기 프랑스 생명철학자인 베르크손의 말처럼 “맹목적이고 닫혀 있는 본능”이다.
자연적 본능은 완벽하고 망설임 없이 정확하게 달려가지만, 그것은 스스로 하는 일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움직이고 각자에게 이미 선천적으로 입력된 정보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닫혀 있는 본능일 뿐이다. 부처가 되는 길은 이 자연적 본능만으로 성취되지 않는다. 그 길은 자연적 본능과 유사하지만, 그보다 더 높고 더 깊은 다른 능력이 나타나야 한다. 그것은 마음의 열린 본능으로서의 직관력이다.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994호 [2009년 04월 15일 0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