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증득하고자 하는 불성은 결국 열린 본능인 셈이다. 자연 자체가 곧 본능이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자연은 본능의 힘으로 살아가고 자신의 존재를 지탱해 나간다. 오직 인간만이 열린 본능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인간 존재방식에서 하나의 역설이 성립한다. 본능은 곧 자연인데, 열렸다는 것은 자유롭다는 것을 말한다.
본능은 자연의 필연적 법이다. 열린 본능은 인간이 자연의 필연적 법이고, 동시에 자유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불성은 그 무엇도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필연적 법이고, 또한 자유의 지혜로운 사용임을 뜻한다. 불성이 깨달은 자연의 필연적 법칙은 연기법이고, 마음의 무한 자유는 공(空)의 반야다.
후에 우리가 이 자연의 필연법과 공의 반야를 음미하겠지만, 하여튼 자연의 연기법은 자연 존재방식의 이중적 생멸법을 뜻한다. 생·멸, 선·악 등은 자연의 이중적인 필연의 존재방식이다. 따라서 멸이 없는 생만의 세계, 악이 없는 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기독교의 주장은 자연의 필연법에 어긋난다.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단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은행은 지금 공인된 사회적 선의 한 기구다. 그 은행의 출발을 생각해 보자. 서양의 기독교 문명은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장사를 금지했다. 그래서 오직 기독교 문명에서 벗어난 유대인들이 이 이자놀이를 해 왔다. 유대인들은 매부리코에 고리채를 하는 인물로 서양 사회에 악마의 사촌 정도로 비춰졌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 상인』의 샤이로크를 상상해 보라.
서양인들의 반유대정서는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보다 훨씬 더 이전부터 있어 왔다. 히틀러에 의해 우연히 탄생된 것이 아니다. 유대인의 금융업은 유대인을 부자로 만들었고, 이것이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의 강력한 고리채 금권주의를 탄생시켰다. 저주받은 이자놀이의 악이 동시에 선의 행위로 전용되는 일을 낳았다. 메디치 가문의 덕을 입지 않는 르네상스의 문화는 상상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은행업이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은행업이 오늘의 미국 자본주의의 성업을 낳은 선의 저수지가 되었다. 도대체 역사에서 무엇이 선이고, 또 무엇이 악인가?
한국은 주자학적 도덕주의가 명분상으로 세상을 지배하기에 모든 것을 선악과 흑백으로 양분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세상의 실상은 선악이 함께 공존하고 뒤섞여 있어서 도덕적 판단으로 이원론적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선은 악의 뒷마당에 서 있고, 악도 선이 가는 길에 동행하고 있어서, 선은 절대로 악을 완전히 청소하지 못한다. 악이 없다면, 선도 발생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항마촉지(降魔觸地)의 수인(手印)은 매우 상징적이다. 그것은 항마수인이지 멸마(滅魔)수인의 아니다. 그렇다고 선악이 같다는 것은 아니다. 선과 악은 다르다. 다르지만, 볏짚처럼 서로 의지해 있다. 이것이 연기법이다. 그동안 인류사는 선이 악을 박살내려고 싸워왔다. 이것을 역사는 선의 투쟁이나 정의를 위한 투쟁이라고 성스럽게 불러 왔다. 이러한 투쟁의 허망함을 최초로 가르쳐 준 사상이 불교다. 선이 악을 박살내기 위해 칼을 드는 순간에 그 선은 이미 악의 자양분을 빨아들인다. 철학적으로 선악의 동봉법(同封法)이다. 기독교와 주자학은 인식상의 큰 착각을 범했다.
이 세상의 모든 색(色)의 존재방식은 이처럼 이중성의 동봉법으로 짜여있다. 우리가 소승적 도덕주의를 넘어서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원효 대사의 이른바 파계는 소승적 도덕주의를 넘어서려는 결단이겠다. 뒤에 이것을 말하겠다.
선악이 혼효되어 있으면, 어떻게 선악을 인식하나? 선악은 대상으로서 분리되어 있는 차원이 아니라, 마음의 지혜가 낳는 묘용(妙用)이 선악을 본다. 원효 대사가 그토록 심지묘용(心之妙用)을 강조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돈이 약이 되기도 하고, 또 독이 되기도 한데, 그 기준은 마음의 공한 반야지혜의 통찰력이다. 승찬 대사는 이 점을 여러 차례 지적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므로 다음 호에서 더 음미하련다.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999호 [2009년 05월 26일 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