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염화실의 향기

기적과 영험은 어떻게 오는가 / 홍사성

slowdream 2009. 5. 13. 23:21

기적과 영험은 어떻게 오는가


우리나라 불자들의 가장 중요한 신행생활은 기도와 불공에 있다. 기도와 불공에 열심인 불자들이 내심으로 바라기는 그렇게 함으로써 삼재팔난이 물러가고 모든 소원이 성취되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불교의 신행의 요체는 기도와 불공에 있다고 믿으며 그것이 곧 소원성취의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불교의 대장경 어디를 살펴보아도 기도를 하면 부처님이 소원을 성취케 해준다는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불교의 경전은 그러한 종교행위를 '낡은 믿음'으로 간주한다. 예컨대 중아함 3권 17번째 경전인 <가미니경>은 '아무리 기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물 속에 있는 바위가 떠오르지 않는 것처럼 악업을 지은 사람을 위해 기도를 했다고 그가 천상에 태어날 수는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은 기도의 영험을 바라는 불자들로서는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처님은 초월적 능력을 행사하는 분이 아니며 따라서 그에게 기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신비한 이적과 같은 영험이 없다면 굳이 절에 보시를 해가며 불교를 믿는 것은 미신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스님들도 고민이 많다. 손쉬운 방법으로 포교를 하기 위해서, 또는 경제적인 이유에서 기도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싶지만 그 근거인 교리적 배경이 마땅하지 않은 것이다.

이 문제는 대승불교시대에 들어서면서 '불보살의 원력에 의지하라'는 이행도(易行道)의 제시로 겨우 돌파구가 마련됐다. 근기수승한 사람들이 자력에 의해 성불을 추구하는 방법이 난행도(難行道)라면, 근기저열의 중생은 불보살의 원력이라는 타력에 의해 수행을 하면 된다는 것이 이행도의 핵심이다.

이행도의 사상적 기초는 대승불교의 보살도에 있다. 대승불교의 이상이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에 있다고 할 때 여기에는 어떤 중생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서원이 전제된다. '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아프다'는 유마거사, '한 중생이라도 지옥고를 받는 자가 남아 있다면 결정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 '내이름을 열번만 부르면 어떤 중생도 극락에 왕생케 하겠다'는 아미타불, '병든 사람을 모두 구제하겠다'는 약사여래, '천개의 눈으로 중생의 고통을 살피고 천개의 손으로 그 고통을 어루만져 주겠다'는 관세음보살의 원력이 바로 그것이다. 중생의 소원성취에 대한 욕구는 이러한 보살의 서원과 결합되면서 기도를 불교의 종교의례로 용인하고 정당화해 나가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적지 않은 오류와 부작용이 수반됐다. 가족과 자식을 위한 대리기도의 성행과 어떤 문제도 기도만 하면 불보살의 가피로 사라진다는 식의 그릇된 기도만능주의의 발생이다. 이행도란 비유하면 게으른 학생이 쉽게 공부하는 방법의 제시에 불과한데, 학생들은 선생님에게 아예 공부까지 대신 해달라고 매달리는 식으로 변질된 것이다. 오늘의 기도행태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된 데는 불교적 기도의 원리나 방법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부족한 것에 가장 큰 원인이 있었다. 다시말해 불교의 기도목적과 방법을 외도의 그것과 동일시함으로써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불교식 기도이고 방법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기적이나 신통과 같은 신이한 힘은 바깥에 있는 초월적 절대자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다. 불교는 그런 외재적 절대자나 권능을 인정하지 않는다. 불교에서 기적과 신통은 수행의 공덕에 의해서다. 부처님이나 그 제자들이 성취한 삼명육통(三明六通)은 선정과 수행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어떤 초자연적 기적이 행사된다고 하더라도 그 주체는 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다만 그 방법으로써 '기도'가 인정될 뿐이다.

불교의 기도는 초자연적 절대와 인간을 매개하는 수단으로 파악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기독교와 같은 유일신교적 발상이다. 불교의 기도는 부처님의 거룩함에 대해 의식을 집중하여 관상(觀想)하고 참회와 정진으로 업장을 녹여가는 '수행'이어야 한다. '염불(念佛)'과 같은 수행이 바로 그것이다. 이때의 기도는 절대적 타자에 대한 귀의가 아니라 곧 구도다. 이러한 구도를 통해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이것이 기도의 성취다. 수행으로서의 기도와 그 공덕은 자신은 물론 주변까지 변화시킨다. 이것이야 말로 기적이요 영험이다. 그것은 알량하고 평범한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초과학적 과학이다. 이러한 예는 수많은 기적의 체험자들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요즘 우리 불교계가 추구하는 기도는 최소한의 교리적 검토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중생의 천박한 욕망에 영합하는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스님들은 본의아니게 기도나 불공과 같은 제사를 집행하는 사제(司祭)로 인식되고 있다. 심지어는 불교를 기독교와 같은 제사종교로 아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이렇게 가다가는 '불교라는 외피를 쓴 외도'들만 양산할지도 모른다. 경계하고 또 경계할 일이다.



 

 

출처 홍사성의 불교사랑  http://cafe.daum.net/hongsas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