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편을 오남용하지 말라
보살이 닦아야 할 열 가지 바라밀 가운데 일곱 번째 덕목이 방편바라밀이다. 방편은 범어의 우파야(Upaya)를 번역한 말로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가는 길'을 의미한다. 이 말이 불교적으로 쓰일 때는 '교묘하게 이루어진 수단'이란 뜻이 된다. 그러니까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가지 교묘한 수단과 방법이 방편이란 얘기다. '법화경' 비유품에는 부처님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어떤 방편을 쓰고 있는지에 대한 다음과 같은 비유가 나온다.
어떤 집속에 아이들이 재미있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 집에 불이 났다. 아이들은 그것도 모르고 놀이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를 본 아이들의 아버지는 문득 한가지 꾀를 냈다.
"얘들아 그보다 더 재미있는 놀이가 있다. 밖으로 나오면 양과 사슴과 소가 끄는 수체를 태워 줄테니 빨리 나오너라."
아이들은 더 재미있는 놀이가 있다는 말을 믿고 밖으로 나왔다. 아버지는 작은 수레 대신 흰소가 끄는 수레를 태워 주었다.
이른바 '三車火宅'으로 불리는 이 비유는 불교적 방편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불난 집 속에 있으면서도 그 위험을 깨닫지 못하는 아이들과 같은 존재가 중생이다. 부처님은 이런 처지에 있는 중생을 교묘한 방편으로 구제하고자 한다. 여기서 교묘한 방편(善巧方便)이란 참된 가르침, 일시적인 계략이란 뜻이다. 하지만 그것은 중생을 속여서 어리석음에 빠뜨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깨달음으로 이끌고자 하는 수단이다. 따라서 방편은 그 참뜻이 왜곡되지 않는 한 불교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불가결한 수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본래는 이렇게 좋은 의미의 방편도 오용과 남용이 심하면 심각한 부작용이 초래된다. 그 안타가운 예를 오늘의 한국 불교에서 볼 수 있다. 조금 격렬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오늘의 불교는 신앙적인 측면에서 이미 불교라 할 수 없는 미신화 기복화 증세가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불자들은 정법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입춘부적이나 사고, 관상 사주나 보고, 궁합 택일을 위해 절에 오는 사람이 많다.
스님의 호칭도 점차 점술가와 비슷한 의미로 변질돼 가고 있다. 불교에서 하는 각종 불사(佛事)도 마찬가지다. 입시철이 되면 합격기도를 하지 않는 절이 없고, 윤년만 되면 생전예수재가 경쟁적으로 올려진다. 심지어 어떤 절에서는 부처님보다 산신이나 칠성, 용왕 섬기기가 우선되기까지 한다. 큰 절 작은 절 할 것 없이 한국 불교가 행하고 있는 모든 신앙내용은 이렇게 방편이라는 이름의 비불교적 요소로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같은 불교를 불교라 할 수 있겠는가. 이름은 불교이면서 내용은 바라문교나 기독교에 속하는 신앙은 이미 불교가 아니다. 부처님의 정법을 쫓아낸 척박한 땅에서는 절대로 건강한 보리수가 자랄 수 없다. 이쯤에서 한국불교는 온갖 비불교적인 작태를 '방편'이란 미명아래 합리화시켜왔던 지난날들을 뼈저리게 반성해야 한다. 더 이상 '기복이 없으면 종교가 안 된다'든가 '종교는 신비한 데가 있어야 한다'는 따위의 말도 안되는 말로 자기기만을 거듭해서는 안 된다.
모름지기 모든 방편은 항상 지혜와 자비를 수반한 것이어야 한다. 중생을 바른 길로 이끌 안목과 구제를 위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이런 안목과 목적도 업이 함부로 '방편'만을 쓰다보면 오히려 수렁에 빠지게 될 뿐이다.
방편은 결코 맹목적 미신행위를 정당화시키는 수단이 아니다. 분명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지혜로운 방법이어야 한다. 깨달음이란 목적을 상실한 채 어리석음으로만 몰아가는 방편은 불교를 망치고 중생을 영원히 중생이게 만들 뿐이다. 이 어찌 무서운 일이 아닌가. 방편의 오용과 남용을 조심할 일이다.
출처 홍사성의 불교사랑 http://cafe.daum.net/hongsa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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