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염화실의 향기

초기불교에 주목해야 할 이유

slowdream 2009. 5. 11. 03:37

초기불교에 주목해야 할 이유



이 세상에서 불교만큼 다양한 교리와 사상체계를 가진 종교도 없다. 화엄철학처럼 고도한 관념론을 전개하는 사상이 있는가 하면, 기독교적인 구원을 설명하는 정토교(淨土敎)도 있다. 현대심리학의 정교한 이론을 방불하는 유식학(唯識學), 정신적 안심입명을 추구하는 선(禪)과 같은 수행체계도 있다. 처음 대하는 사람은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크레타의 왕 미노스가 만든, 들어갈 수는 있으나 나올 수 없는 미궁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불교가 이렇게 다른 종교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교리체계를 가진 것은 철학과 사상의 넓이와 깊이를 더해 주는 요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도리어 이로 인해 불교의 정확한 이해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불교를 10년 이상 믿어온 신심 깊은 불자라 하더라도 그 교리의 이해 수준은 높은 편이 아니다. 심하게 말하면 불교를 믿는 것인지, 아니면 불교와 비슷한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다.


불교가 이처럼 알쏭달쏭해 보이는 것은 역사적으로 그럴만한 배경이 있다. 부처님은 45년 간 전도활동을 하면서 재래의 종교사상을 무조건 배척하지 않았다. 어떤 부분은 포용하고, 또 어떤 부분은 그 의미를 불교적으로 변화시키려고 했다. 인과응보설이나 이에 바탕한 윤회론, 인도재래의 우주관이나 세계관의 채용 등이 그것이다. 이런 관용적 태도는 뒷날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불교사상의 독창성을 제거하고 혼합주의를 배태시켰다. 특히 대승불교의 구제주의는 불교 자체의 엄청난 교리사상적 변화를 불러왔다. 원래 자력적이고 수행중심적이던 교리는 타력적이고 신앙중심적인 교리를 바뀌었다. 힌두교의 수많은 신들이 불교신앙 안에 포용되었으며 그 절정을 보여준 것이 밀교였다. 불보살의 자비를 내세우며 타력구제를 표방하는 정토교의 등장은 불교가 다른 종교사상과 어떤 교섭과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어떤 것이 불교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에 이르게 됐다.

중국불교는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는 교리해석의 틀을 생각해냈다. 이미 역사적인 변용을 거친 많은 불교문헌을 번역하면서 서로 상이한 교리사상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고민한 끝에 찾아낸 방법론이었다. 경전의 내용에 심천이 있고 때로는 상반되는 내용까지 나타나는 것은 부처님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방편설법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교상판석이란 바로 이런 생각을 전제로 교리사상의 심천을 구분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근대불교학은 중국적 교상판석이 불교사상을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탁월한 방법론으로는 인정하지만, 모든 것을 부처님의 친설(親說)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역사적 태도라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의 많은 교설은 후대로 오면서 첨삭가감된 것이며 일부는 심각하게 불교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음도 지적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서로 다른 견해를 말하는 것도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날 우리가 부처님이 말씀한 본래의 가르침을 찾아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참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고자 한다면 이 일은 아무리 어렵더라도 반드시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불교의 원점과 교리해석의 기준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이 가장 유효한 대안이 아닌가 생각한다. 즉 '부처님 그 분은 누구이며, 그분은 어떤 구체적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했으며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불교는 역사적 실존인물이며 종교적 성자인 고타마 싯달타의 깨달음과 그 가르침에 바탕한 종교다. 따라서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타마 싯달타의 깨달음과 그것에 근거한 가르침이다. 이 점을 소홀히 하면 아무리 그럴듯한 이름이나 사상체계도 불교라고 이름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언제 어디서 어떤 사람이 불교를 공부하든 그 원점은 당연히 부처님이 직접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그 불교여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태도는 지나치게 부처님 그분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오늘날 우리가 불교라고 부르는 제도종교를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역사적 굴절과 변화를 거친 불교가 아니라 역사적 부처님이 직접 말하고 행동하며 가르친 불교다. 이를 학자들을 '초기불교'라고 한다. 이 초기불교야말로 미궁에 들어갔던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를 구원해준 아리아네드 공주의 실타래와 같다. 이것이 아니면 온갖 이상한 주장과 학설로 머리가 복잡해진 사람들이 불교를 쉽게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어떤 주장이나 학설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佛敎)'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출처 홍사성의 불교사랑  http://cafe.daum.net/hongsas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