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착한 글들

“우리 인생은 소풍인데, 뭘그리 욕심내고 살아요” / 목순옥

slowdream 2009. 5. 29. 06:31
“우리 인생은 소풍인데, 뭘그리 욕심내고 살아요”
ㆍ‘인사동 지킴이’ 故 천상병 시인 아내 목순옥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유난히 축제와 소풍이 많은 달 5월이면 인생을 ‘아름다운 이 세상에 소풍온 것’이라고 노래한 ‘귀천’의 시인 천상병 시인(1930~93)이 생각난다. 그가 있어 더욱 풍요롭던 인사동 골목과 그의 시심과 아이 같은 천진함을 유지하게 한 부인 목순옥씨도 떠오른다. 올해 일흔세 살인 목순옥씨는 요즘도 버스, 지하철을 3번이나 갈아타면서 매일 오전 11시에 인사동에 나타난다. 그는 도시개발로 완전히 달라진 인사동에서 25년 동안 ‘귀천’이란 찻집을 운영하면서 ‘인사동 식구들’이란 모임의 회장을 맡아 천상병 시인의 시와 인사동의 따스함을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전직 대통령마저 삶의 신산함을 견디지 못해 세상을 뜬 요즘, 작은 찻집에 앉아 “우리 인생은 소풍이에요. 소풍 끝나면 다들 빈손으로 돌아갈 텐데 뭘 그리 욕심내고 살아요”라고 말하는 목순옥씨를 만나 시인의 아내로 산다는 것, 그리고 인사동 골목의 추억을 들었다.

인사동은 골목이 아니라 마음이다

-지난 5월14일은 결혼기념일이었고 또 지난 4월24일엔 서울 노원구 수락산 등산로 입구에 ‘천상병 공원’도 개장되어 요즘 천 시인이 더욱 생각날 것 같습니다.

“천상병 시인 생각이야 매일 하죠. ‘귀천’ 찻집에도 천 시인의 사진이며 시집이 있으니 어떻게 생각을 안 합니까. 그래도 이번에 공원이 개장돼 참 기뻐요. 1982년부터 90년까지 7년 정도 살았던 곳이고 열가구 남짓한 이웃들과 다들 친하게 지낸 곳이거든요. 이 공원엔 시인의 모습을 담은 청동 등신상도 있고 버튼을 누르면 음성으로 시를 감상할 수 있는 시비 등이 있어서 일반 사람들도 친근하게 시인과 시를 접할 수 있을 겁니다. 개장식날엔 안경, 찻잔, 집필원고 같은 유품 203점을 담은 타임캡슐을 묻었는데 시인 탄생 200주년이 되는 2130년에 공개될 예정입니다. 내년에는 의정부시에 천상병문학관이 문을 엽니다. 아파트촌 안에 복합문화센터로 만들어져 훨씬 더 친근하게 천상병 시인을 추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동안 개인 차원에서 기념사업을 운영했지만 제 나이도 있고 한계가 있어 선생의 15주기를 맞아 지난해 기념사업회를 법인화했습니다. 이젠 더욱 체계화된 기념사업들이 이뤄질 것 같아 마음이 놓입니다.”

-‘인사동 식구들’이란 모임의 회장이고 또 인사동 보존회의 이사로 인사동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셨는데요.

“인사동에서 찻집과 음식점을 운영하는 이들이 모여 ‘인사동 식구들’이란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또 10년 전부터 ‘문화지구 지킴이’로 활동하며 소년소녀가장 장학금 주기 운동도 하고, 지난해까지 종로경찰서 전·의경 어머니회 회장을 맡아 어머니들끼리 회비를 거둬 전·의경들 떡도 해먹이고 과일도 사다주는 일을 했습니다.”

-인사동과는 언제 인연을 맺었습니까.

“처녀 시절부터입니다. 제가 자수를 해서 수예품을 표구하기 위해 인사동을 자주 찾았고 청계천 부근에서 골동품점을 운영한 적도 있어 인사동과의 인연이 매우 깊습니다. 그러다 살림형편이 어려워져 생계 걱정을 할 때 남편의 친구인 강태열 시인이 300만원을 빌려줘서 ‘귀천’이란 찻집을 열었죠. 85년에 처음 문을 열었을 때만 해도 인사동엔 경인화랑에서 운영하는 찻집 외엔 전문찻집이 드물었습니다. 그 외엔 모두 근처의 화랑이나 고미술상에 차를 배달하는 ‘레지’ 언니가 있는 다방만 있었죠. 처음엔 보증금 200만원, 월세 20만원에 시작했는데 지금은 열배쯤 올랐어요. 메뉴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제가 직접 만든 모과차, 유자차, 생강차 등 차종류로 같습니다.”

-‘귀천’은 단순한 찻집이 아니라 인사동의 상징이 됐습니다.

“예전의 단골들은 이제 모두 70~80대 노인이 되셔서 자주 드나들지 못하십니다. 극작가 신봉승 선생이 그나마 자주 오시고 신경림 시인도 가끔 들르시고…. 천상병 시인이 생존했을 때 유난히 자주 찾았던 걸레스님 중광은 돌아가셨고 이외수 작가도 강원도로 거처를 옮겨 잘 못 보고…. 근처 화랑에서 전시회가 있으면 가끔 들르는 문인들도 있지만 이젠 손꼽을 정도군요. 젊은 시인들은 누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미혼 때 우리 찻집에서 데이트를 했다가 결혼한 부부들이 아이를 데리고 다시 찾아오기도 하고, 얼마 전에는 유치원생들도 견학을 왔답니다. 초등학생들도 견학오면 시를 읽어주고 시도 한 번 읽어보라고 하면 다들 좋아해요. 시란 그렇게 남녀노소 모두에게 아름다운 마음을 만들어주는 것 같아 흐뭇했습니다.”

-그래도 인사동이 너무 많이 변해 안타깝진 않습니까. ‘귀천’만 해도 개발로 문을 닫았다가 4년 전에 다시 열었는데요.

“2003년에 문화지구로 지정돼 길바닥부터 상가들까지 모든 것이 변했죠. 문예진흥법에 문화지구를 법제화해서 특정지역 내 문화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문화지구를 만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문화자원들이 사라져가는 것 같아요. 자료를 보니 98년엔 인사동 지역에 172개의 골동품점과 87개의 표구사, 108개의 화랑이 있었어요. 전통업소가 500여개나 밀집된 곳은 아마 세계적으로도 흔하지 않을 겁니다. 물론 문화지구 지정 후에 전통업소도 늘고 개발압력도 가라앉긴 했지만 내부적으로 보면 꼭 그렇지도 않아요. 기념품을 파는 공예품점만 늘어났지 골동품점, 표구사, 필방 등은 크게 줄어서 옛 모습을 찾기 어려워요. 인사동은 조선왕조부터 풍류를 즐기던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서화의 거리였다고 해요. 일제강점기에 다수의 골동품과 고서화가 나오면서 그런 작품들을 파는 거리로 바뀌었고 이 지역에 있는 음식점, 찻집도 모두 예술가들을 위한 곳이었는데 요즘은 그저 흔한 관광거리로 전락한 느낌입니다. 우리 찻집도 재개발돼 다른 곳으로 이사갔다가 2005년에 다시 문을 열었지요. 그래서 실내 장식도 달라졌고 입구도 달라져 낯설어 하는 분도 많습니다.”

-인사동은 누구나 와서 정겹게 인사를 나누는 곳이어서 ‘인사동’으로 불리기도 했고 천상병 시인을 직접 만난 이들의 추억이 가득한 곳입니다. 인사동 입구 크라운베이커리 앞에 앉아 있다 아는 분을 만나면 500원이나 2000원만 달라던 추억담을 지닌 분들, 찻집이 손님이 꽉 차도 ‘들어와, 자리 있어’라고 정겹게 맞이하는 천 시인의 모습을 기억하는 분이 많습니다.

“아이같이 아이스크림 사달라, 막걸리 사달라던 남편에게 ‘삥 뜯긴’ 경험이 있는 분들이 다들 웃으며, 행복하게 기억해줘 참 고맙습니다. 어떤 분이 천상병 시인은 귀천이란 찻집 주인의 남편이 아니라 귀천의 정물화라고 표현했죠. 인사동은 건물이나 상점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마음의 장소예요. 그곳에 사람들이 있고 그들과 나누는 정이 있고 웃음과 눈물이 인사동을 만들었죠. 그런데 너무 세련된 건물과 현대화된 상점들이 들어서서 인사동을 지켜온 저는 서운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합니다. 물론 개발도 중요하고 부동산주인들의 재산권도 인정해야겠지만….”

다시 태어나면 또 결혼해 더 잘해주고 싶다

-천상병 시인과는 어떻게 만나셨나요.

“친정오빠(목순복씨)와 서울 상대 동창이었어요. 머리가 좋고 시도 잘 써서 촉망받는 청년이었고 서울 상대만 졸업하면 당시 가장 인기 있던 한국은행에 입사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거부했죠. 시인은 배가 고파야 한다면서 홀연히 대학을 떠났답니다. 처음 만났을 당시 저는 고등학생이었어요. 경북 상주에서 여고를 다니다 서울에 오면 오빠를 따라서 그분을 만났어요. 그분은 제 앞에서도 콧구멍을 후비며 앉아 있다가 우스운 이야기가 나오면 다방이 떠나갈 듯이 웃곤 했어요. 너무 순수하고 맑아보여 문학소녀의 눈에는 참 멋져보였습니다. 가끔 술집에도 따라갔는데 천상병 시인은 제 자리에 술잔이라도 올려지면 당장 치웠버렸어요. ‘미스 목은 술 마시면 안 돼’라면서요. 그래도 그저 친구 동생처럼만 대하셨지 연인관계로 발전하진 못했죠. 그러다가 67년에 어이없이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었습니다. 대학동기에게 술값을 빌린 게 간첩으로 몰린 이유였어요. 중앙정보부에서 전기고문을 세 번 받은 뒤 풀려났다고 해요. 고문의 충격에다 잦은 폭음으로 건강이 엉망이 되어서 부산 형님 댁에 내려갔다 1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저를 찾아왔는데 얼굴이 까맣게 변했더라고요. 커피숍에서 문학 이야길 하다 내일 보자며 헤어졌는데 그날로 갑자기 주위에서 사라지신 겁니다.”

“인사동은 정과 웃음, 눈물이 섞이는 마음의 골목”

남편 천상병 시인을 이야기할 때면 그를 처음 만날 무렵의 여고생처럼 수줍게 웃는 목순옥씨. | 김세구기자

 

 

(당시 천상병 시인의 변호를 맡았던 한승헌 변호사가 쓴 회고글에도 그 사건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지 잘 묘사되어 있다. (중략) 그에 대한 죄명은 반공법 외에도 공갈죄가 얹혀 있었다. 참으로 이상했다. 그가 서울대 상대를 다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는데 그 상대 친구 중에 강빈구씨가 있었다. 공소장에 의하면 천 시인이 친구 강씨가 북의 간첩으로 암약 중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수사정보기관에 알리지 않았으므로 반공법상의 불고지죄를 범했다는 것. 또 천 시인은 65년 어느날 ‘중앙정보부에서 동독에 갔다가 온 사람을 대라고 해서 난처하다’는 말을 함으로써 강씨를 협박하고 ‘돈 2만원을 주면 무마해주겠다’고 해서 6500원을 받아냈으며 이후 67년 6월25일까지 같은 수법으로 공갈을 하여 1주일에 한두 번씩 술값으로 100원내지 500원씩, 2년 동안 모두 3만여원을 받아 갈취했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공갈도 있는가 싶었다. 절친한 친구를 간첩으로 신고하겠다고 협박해서 기껏 매회 100원 내지 500원씩 갈취했다니 이는 누구도 웃지 않을 수 없는 코미디였다.)

-그리고 언제 다시 천상병 시인을 만나게 됐나요.

“저와 헤어진 날 밤에 남편은 술에 취해 길에 쓰러져 누워 있다가 행려병자로 분류되어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실려갔습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저를 비롯한 친구들이 아무리 여기저기 수소문해도 찾을 수가 없어서 다들 울면서 유고 집 ‘새’를 발간했고 그 기사가 신문에도 실렸어요. 그 기사를 본 시립병원장인 김광해 선생님이 놀라서 친구들에게 천상병이 살아 있다고 전화를 해서 알려줬죠. 그날 이후 저는 매일 병문안을 갔어요. 고문 후유증에 술병으로 몸무게가 40㎏이었는데 제 간호 덕분인지 60㎏으로 불었습니다. 김 원장님이 ‘저 사람이 글을 쓰고 못 쓰고는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두 분이 결혼하면 어떨까요’라고 권유해서 결혼을 결심했죠. 그분이 마흔세 살, 제가 서른여섯 살이던 1972년 5월14일이었고, 주례는 김동리 선생님이 맡아주셨습니다.”

-가진 것은 병과 가난밖에 없는 남자, 그것도 철없는 아이 같은 남자와 왜 결혼할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냥 제가 돌봐드려야겠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다시 만났을 때 남편은 고문후유증으로 기저귀를 차고 있었는데 대소변을 못 가리는 것도 하나도 힘들지 않고 그의 시만큼 그의 성정도 정말 맑고 천진한 사람이어서 미워할 수가 없었어요. 부모님이나 오빠에게도 계집애란 말을 들어보지 못했는데 남편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수시로 ‘문디 가시나’(문둥이 계집애란 뜻의 경상도식 애칭)라고 불렀어요. 기분이 좋으면 ‘문디 문디, 예쁘다’라고 웃고요. 사람들에게 ‘난 내 마누라가 좋다’ ‘내 마누라가 예쁘다’라고 말할 땐 부끄럽긴 해도 기분이 좋았죠. 하루 끼니를 걱정할 만큼 살림도 어렵고 남편 건강이 나빠져 고생도 많았는데 그래도 남편과 함께한 세월은 소꿉장난 같은 날들로 기억됩니다. 너무 멋대로 행동하는 남편에게 화를 내면 ‘문디 가시나야, 사람은 웃어야 된다, 웃어야 복이 온다’라고 깔깔 웃어버려 따라서 웃을 수밖에 없었어요. 시인의 아내로서의 기쁨도 컸죠. 시를 쓴 원고지를 양복 주머니에 넣었다 읽어보라고 주고, 정말 아이 같은 사람이라서 집에 들어오면 다 써놓은 시를 베개 옆에 가지런히 놓고 잠든 척도 했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좋나?’라고 은근히 제 평을 기대했어요. 그분은 가만히 앉아 있다 제목을 정하면 한달음에 시를 썼어요. 단 한 번도 다시 고치는 걸 보지 못했어요. 정제된 단어가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거죠. 시를 툭 보이면서 ‘이것 봐라, 문디야’라고 자랑했답니다. 난 천상병 시인이 기인이 아니라 천재라고 생각해요.”

-다들 목순옥씨가 천상병 시인에게 인생의 반려자뿐 아니라 평생 간호사, 엄마의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아이 같은 천상병 시인을 세상과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도 했고요. 특히 간경화증으로 입원했을 때는 5년 동안이나 서울과 춘천을 오가며 생활했는데 어떻게 그 고단함을 견디셨습니까.

“93년 4월28일에 남편과 사별할 때까지 21년간 부부였지만 남편은 제겐 아기였고 천사였어요. 매일 아침 세수시키고 손발톱도 깎아주고 목욕도 시켜주면서도 고통스럽다기보다는 제게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제 모든 것을 다 바칠 대상이 있다는 게 행복했습니다. 88년부터는 만성간경화증으로 고생해서 친구가 의사로 재직하던 춘천의료원에 입원했었어요. 그래도 남편은 여전히 유쾌하고 명랑해서 복수(腹水)가 차서 배가 산처럼 불렀는데도, 죽음을 앞두고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병원에 도착하니까 친구인 정원석 선생님이 ‘야, 이 놈아. 배가 왜 이리 불렀냐’고 야단을 치는데도 대뜸 ‘내가 말이다. 임신을 했다, 임신을 했어’라고 유머로 받아칠 만큼 낙천적이었어요. 덕분에 울지 않고 웃었죠. 병원에서 아침을 먹이고 서울로 돌아와 카페 문을 열고 찻집 일을 마치면 다시 춘천으로 향했습니다. 춘천으로 가는 길이 참 예뻤는데 매일 오가는 차 안에서 기도했어요. ‘5년만 더 살게 해주세요. 딱 5년만요’라고요. 거짓말처럼 병을 털고 일어나더니 정확히 5년 뒤에 다시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습니다. 방금 헤어져서 카페 문을 열고 물을 끓이고 있는데. 병원에 실려갔다는 전화를 받았죠. 매일 춘천으로 갈 때, 5년이 아니라 10년을 살게 해달라고 빌 것을….”

-그렇게 남편을 사랑하는데도 천상병 시인은 생면부지의 예쁜 여자 손목을 잡고 ‘너는 지금부터 내 애인이다. 네 손 참 예쁘다’라고 속삭였다는데 질투심이 나진 않던가요.

“그런 천진함이 천상병 시인의 특징이죠. 그분은 뒤끝이 없어요. 마음에 앙금이 없고요. 다만 남들은 체면 때문에 못하는 것을 자기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것뿐이죠. 그냥 천진함 그 자체예요. 제 남편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천상병 시인을 존경하는 것은 친구들이 잘되면 정말 충심으로 기뻐해줬다는 겁니다. 누구에겐가 좋은 일이 있다고 알려주면 특유의 아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잘됐네’ ‘참 잘됐지’라고 자기일처럼 기뻐했는데 그런 마음은 아무나 갖는 게 아니거든요.”

-가난이 직업이라고 할 만큼 천상병 시인은 돈과는 인연이 없는 분이셨는데요.

“당신의 시에서도 ‘저승가는데도/여비가 든다면/나는 영영/가지도 못하나?’라고 노래했는데 노자걱정은 없었어요. 부의금이 800만원가량 들어왔는데 제겐 큰돈이라 친정어머니(조성대 할머니)께 맡겼어요. 어머니는 궁리 끝에 그 돈을 아궁이에 넣어 보관했는데 한 친지가 그걸 모르고 불을 지폈다가 타버렸죠. 타버린 돈을 갖고 한국은행에 가서 400만원 정도를 돌려받았습니다. 지인들이 타버린 400만원이 천 시인의 노잣돈이 된 거라고 위로해주셨어요.”

-유명한 시인의 아내로 산다는 게 때론 너무 구속이 되진 않습니까. 만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해도 천상병 시인과 결혼했을까요.

“전 다시 태어나도 천상병 시인과 결혼해서 그분이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잘해드리고 싶습니다. 서운한 것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더 잘해드릴 것을, 손잡고 여행이나 많이 할 것을… 하는 아쉬움만 큽니다. 그분은 절 진심으로 사랑하고 의지했어요. 한 번은 부산에 내려가서 편지를 보내왔어요. ‘미스 목, 부산 형님 댁에 왔는데 1주일쯤 뒤에 내려올 수 있냐’고요. 제가 답장을 보냈더니 ‘오아시스를 만난 듯 (제 편지가) 기뻤다’고 다시 답장을 보냈더군요. 건강할 때는 같이 김밥 싸서 경복궁 나들이도 하고 즐거웠던 추억이 아직도 새롭습니다. 그리고 재혼은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어요. 누군가 이혼이나 재혼을 하려는 사람에게도 말리는 편이죠. 남편이 죽고 1년 후쯤엔가, 대구에 사는 여자후배가 그동안 고생했다고 내려오라면서 어느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했어요. 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주세요’라고 했더니 절 알아본 택시 기사가 ‘귀천은 어떻게 하고 호텔에 가십니까’라고 하기에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후배는 단칸방이나 좁은 찻집에서 고생한 제가 안쓰러워 하루쯤 쾌적한 호텔방에서 휴식을 취하라는 배려였는데 그런 오해를 받을 수도 있구나 싶어 그 후론 항상 조심을 합니다. (찻집에 있는 사진과 책을 보여주며) 이렇게 천상병 시인이 항상 제 곁에 있는데 누굴 생각하겠어요.”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의 조사결과 동베를린 간첩사건이 당시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부풀려진 일이라고 밝혀지긴 했지만 제대로 된 명예회복은 안 이뤄진 것 같습니다. 가해자들이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만 해도 될 텐데요. 이젠 내년에 기념문학관도 생기니까 천상병 시인의 문학정신과 시들을 더 잘 알리는 일을 해야죠. 또 어머니가 100세이신데 좀더 건강하게 오래 사시길 바라고요. 단지 기인으로서가 아니라 위대한 시인으로 재조명받는 일을 마친 후에는 저도 홀가분하게 소풍을 마칠 수가 있겠지요.”

일흔세 살의 목순옥씨는 남편 천상병 시인을 이야기할 때 열일곱 살 소녀의 눈빛이 된다. 햇빛도 안 드는 좁은 찻집에서 매일 소풍온 듯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목순옥씨의 맑은 표정을 보고 ‘귀천’을 찾는 이들은 차를 마시는 게 아니라, 사랑은 받는 게 아니라 주는 것이란 아주 평범한 진리를 배우고 간다.

▲목순옥은 누구인가?
21년간 헌신적 남편간호 ‘순애보’…남편 못지않은 필력 수필집 펴내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목순옥씨는 여고생 때 운명적인 만남을 한다. 오빠의 친구이자 천재시인인 천상병과의 만남은 차분하고 자수를 즐기던 소녀의 인생을 바꾼다. 오빠처럼 천 시인을 따르던 목씨는 동백림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겪고 행려병자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그를 다시 만나 헌신적 간호를 한다. “천상병과 그의 시를 살리라”는 병원장의 권유로 마흔세 살 노총각과 서른여섯 노처녀는 결혼식을 올린다. 평생을 간호사로, 어머니로 지켜온 부인의 순애보는 지금까지 전설처럼 여겨진다. 21년 동안 한결같이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사랑을 쏟아온 목순옥씨 덕분에 천상병 시인은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윤동주 시인과 겨룰 만큼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시를 써 지금도 사랑받고 있다. 목씨도 남편과의 일상사를 담은 <날개 없는 새 짝이 되어>라는 수필집을 펴내 남편 못지않은 필력을 인정받았다. 25년째 인사동에서 전통찻집 ‘귀천’을 운영하며 인사동의 옛 정취를 지키는 데 애쓰는 목순옥씨는 천 시인과 관련된 각종 기념사업을 주관하느라 나이를 잊었다. 또 틈날 때마다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란 가제로 틈틈이 글을 쓰고 있다. 천 시인의 육신은 16년 전에 귀천했지만 아직도 그의 영혼과 열애 중인 목씨는 그 사랑으로 매일매일을 소풍나온 듯 평화롭게 보낸다.

 

 

출처 경향신문 <글 유인경·사진 김세구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