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뱀발]
오온-무아(五蘊-無我)
5온(五蘊)의 온(蘊:skandha)은 ‘모임’[集合]이라는 뜻이다. 5온은 좁은 의미로는 인간존재를 가리킨다. 인간은 물질적인 요소인 색(色=육체)과 정신적인 요소인 수(受),상(想),행(行),식(識)등 5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5온이 넓은 의미로 쓰일 때는 일체존재를 가리킨다. 이 경우에는 색은 물질전체를, 그리고 수.상.행.식은 정신 일반을 말한다.
인간 존재만을 특별히 구별해서 말할 때는 5온이라는 말 대신에 5취온(五取蘊)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것은 5온으로 이루어져 있는 존재를 고정적인 자아[自我: atman]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집착[取: upadana]한다는 의미에서이다.
1.색온(色蘊: rupa)
색이란 육체를 가리킨다. 육체는 물질적인 4가지 기본 요소인 4대(四大: mahabhuta)와 이 4대에서 파생된 물질인 4대소조색(四大所造色)으로 이루어져 있다. 4대란 지,수,화,풍으로서, 지(地)는 뼈, 손톱, 머리카락등 육체의 딱딱한 부분이고, 수(水)는 침,혈액, 오줌등 액체부분이다. 화(火)는 체온이고 풍(風)은 몸속의 기체, 즉 위장 속의 가스 같은 것을 가리킨다.
4대소조색이란 4대로 이루어진 5종의 감각 기관[五根]인 눈(眼),귀(耳).코(鼻), 혀(舌), 몸(身)등이다.
2.수온(受蘊: vedana)
수란 감수(感受=감정)와 그 작용이다. 수(受)는 내적인 감각기관(.육근.안이비설신의)들과 그 것에 상응하는 외적인 대상(육경. 색성향미촉법)들과의 만남에서 생긴다. 즉 감각기관과 감각대상간의 접촉에 의해서 식이 생기고 이 들 세가지를 합쳐서 촉(觸)이라고 한다. 이 촉에 의해서 수(受. 느낌)이 생긴다. 수에는 성질 상 3종이 있다. 즉 고수(苦受)와 낙수(樂受), 그리고 불고불낙수(不苦不樂受)이다. 고수란 즐거운 감정이고, 낙수란 괴로운 감정이다. 그리고 불고불낙수란 사수(捨受)라고도 하는 것으로서,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감정을 가리킨다.
3.상온(想蘊 : samjna)
상은 개념(槪念) 또는 표상(表象)과 그 작용을 말한다. 상 역시 감각기관들과 그 것에 해당되는 대상들과의 만남에서 생긴다.
상은 대상들을 식별하고, 그 대상들에 이름을 부여한다. 붉은 꽃을 볼 경우 먼저 지각(知覺)에 의해 인식 작용이 생기게 되고,
그 다음 ‘붉은 꽃’이라는 개념을 만드는 작용이 일나게 된다. 이때 ‘붉은’, 또는 ‘꽃’이라는 개념 또는 그 작용이 상(想)이다.
4.행온(行蘊 :samskara)
행, 즉 samskara란 ‘형성하는 힘’[形成力]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지만, 여기서는 특히 의지작용(意志作用: cetana)을 가리킨다.
인간이 동물과 달리 윤리 생활을 할 수있고 업(業: karma)을 짓게 되는 것은 이 행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로서의 행은 수,상,식을 제외한 모든 정신작용과 그 현상이다. 예를 들면 기억,상상, 추리등이 여기에 속한다.
5.식온(識蘊: vijnana)
식은 일반적으로 분별(分別), 인식(認識) 및 그 작용을 말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식(識)의 영역은 대상을 인식하는데 까지 가지 않는다. 그 전 단계인 주의작용(注意作用)일 뿐이다. 예를 들면 붉은 꽃을 볼 때 안식(眼識)이 일어나게 되는데 안식은 눈앞에 ‘무엇이’ 나타난 것만을 알뿐이다. ‘붉다’ ‘꽃이다’라고 아는 것은 식이 아니고 상(想)의 작용이다. 식 역시 감각기관들과 그 것에 해당되는 대상들과의 만남에서 생긴다.
5온이론은, 인간 존재란 색, 수, 상, 행, 식등 5 가지 요소가 어떤 원인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잡아함경에서는 이것을 “마치 여러 가지 목재(材木)를 한데 모아 세상에서 수레라 일컫는 것처럼 모든 온(蘊=要素)이 모인 것을 거짓으로 존재[衆生]라 부른다.”라고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다. 수레는 바퀴, 차체(車體), 축(軸)등 여러 요소가 모였을 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일 뿐, 이 요소들과 관계없이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인간 존재도 마찬가지다. 색,수,상,행,식등 5 요소가 모일 때 비로소 인간이라는 존재도 성립할 수 있게 된다.
5온이론에 의하면 다른 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영혼같은 것을 인정할 수 없다. 수,상,행,식과 같은 정신현상은 영혼과 같은 존재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기관과 그 기관에 관계되는 대상과의 만남에서 생긴 된다.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마음[意:생각을 맡은 기관]등과 여기에 상응하는 물질[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촉할 수 있는 것[觸], 생각[法]이 서로 만날 때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등의
여러 가지 정신현상이 발생한다.
즉 6 가지 감각기관[六根]과 그것에 관계하는 6가지 대상[六境]이 합칠 때 6가지 식[六識]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비유하면 두 손이 서로 마주쳐서 소리를 내는 것처럼, 눈[眼]과 물질[色: 對象]을 인연하여 안식이 생긴다.”(다른 5식도 동일하다)라고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감각기관과 그 대상이 만나서 식이 발생하면, 식 이외의 다른 정신 현상들, 즉 수, 상 ,행등도 함께 일어나게 된다. 그것을 아함경의 여러 곳에서는 “눈과 물질을 인연하여 안식이 생긴다. 이 3가지[眼.色.識]가 합친 것이 촉(觸=여기서는 접촉)이다. 촉과 함께 수,상,행[思]이 생긴다. (이,비,설,신,의도 동일하다.)”라고 말하고 있다.(잡아함 273; 305)
5온이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존재란 5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고, 이 각 요소들은 모두 비실체(非實體)적인 것이므로,
이와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 진 인간 존재 역시 비실체적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고정불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을 여러 경전에서는 비유를 들어 색(色)은 거품덩어리 같고, 수(受)는 거품 방울 같고, 상(想)은 신기루 같고, 행(行)은 바바나줄기 같고, 식(識)은 허깨비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거품덩어리, 거품방울, 신기루, 바바나 줄기, 허깨비들은 어느것 하나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이들 실체적이 아닌 요소들로 이루어 진 존재가 실체적인 것일 수 없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무아(無我:anatman)라고 표현한다. 이 ‘무아(無我)’라는 말에서 ‘아(我)’란 ‘고정불변하는 실체적(實體的)인 아’(我;atman)를 의미한다. 인간 존재에는 그와 같은 ‘아(我)’는 없다는 것이고, 역시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非我]. 결국 인간은 “무아적 존재”인 것이다.
이 5온이론, 즉 무아이론는 초기불교에서 후기불교까지 전 불교사상사를 통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역시 불교를 다른 종교 및 사상과 구별짓게 하는 가장 독특한 교리이기도 하다. 경전에서 붓다는 이 무아이론을 수없이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두 말할 것도 없이 고(苦)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였다.
붓다에 의하면 고는 욕망 때문에 생기고 욕망은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때문에 발생한다. 따라서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고의 근본 원인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제거되지 않는 한 고는 계속해서 발생하게 된다. “마치 뿌리가 다치지 않으면 나무는 윗 부분이 잘리더라도 원기 왕성하게 다시 싹이 돋아 나오는 것처럼” 고(苦)도 계속 발생하게 된다고 법구경(法句經)에서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우리 존재 속에 소위 말하는 영혼과 같은 고정불변하고 실체적인 ‘내’(atman)가 있다고 믿는데서 생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존재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할 때 그 믿음은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이 5온-무아(五蘊-無我) 교리는 인간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우리 존재가 ‘무아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我]도 없고 나의 것[我所]도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할 때 우리들은 무엇에 집착할 것이며, 누구에게 분노를 품을 것이며, 무엇에 두려움을 느끼겠는가.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깨트려지면 우리는 우리 존재가 변해도, 외부세계가 변해도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숲속의 나무들을 베어서 가져가도 우리들이 근심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나무들은 ‘아(我)도 아니고 아소(我所:나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함경에서는 무아이론을 불에 비유하고 있다. 불이 모든 초목을 태워서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무아 이론은 욕망과 고(苦)를 사라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무아이론을 실천하라고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다. 경전에서는 때로 그것을 과격한 표현을 사용해서 나타내기도 한다. 붓다의 가장 큰 제자였던 사리풋트라(사리불.Sariputra)는 야마카(Yamaka)비구에게 오온[인간존재]에 대해서 “그것은 병(病)과 같고 종기(腫氣)와 같으며 가시와 같고 죽음과 같으며 무상하고 괴로우며 공(空)이요 내[我]가 아니며 내것[我所]이 아니라고 관찰한다. 그래서 거기에 집착하지도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라고 가르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보다 효과적으로 사라지게 할 수 있고 그 결과 욕망을 없엘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고(苦)를 제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아이론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아(我)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해서 상식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나’ 또는 ‘자기’와 같은 존재까지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한 생을 살다가 죽는 ‘나’는 인정한다. 단지 이와 같은 존재를 영원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일상적으로 말하는 ‘나’란 비실체적인 몇 가지 요소들이 모여서 일시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임시적인 존재’일 뿐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가짜 나’(假我)라고 부른다. 이 ‘가짜 나’의 존재는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두번째 뱀발]
오온이란 무엇인가?
1. 첫번째는 물질(色.색)의 집합체이다. 물질은 전통적으로 견고성, 유동성, 열성, 운동성으로 알려져 있는 사대(四大)로 구성되어 있다(증지부 48). 보통 이것들은 땅(地), 물(水), 불(火), 풍(風)이라고 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단순한 땅, 불, 물, 바람이 아니다. 불교 사상에서는, 그중에서도 특히 진리에 대한 미묘한 문제들을 다룬 아비담마(Abhidhamma, 論)에서는 그 이상을 의미한다.
견고성은 확장의 요소이다. 사물이 공간을 점유하는 것은 이 확장의 요소에 기인한다. 사물을 볼 때 우리는 공간 속에 뻗어 있는 어떤 것을 보고 거기에 명칭을 부여한다. 확장의 요소는 고체뿐만 아니라 액체 속에도 존재한다.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바다를 볼 때조차 우리는 견고성을 보기 때문이다. 바위의 딱딱한 성질, 풀의 부드러운 성질, 즉 사물 속에 내재한 무거운 성질과 가벼운 성질 또한 견고성에 속한다. 이것은 견고성의 고유한 특성이다.
유동성은 응집성의 요소이다. 이 요소 때문에 물질의 미립자들이 흩어지지 않고 쌓일 수 있다. 액체는 응집력이 대단히 강하다. 고체와 달리 액체는 분리된 뒤에도 달라붙는 성질이 있다. 고체는 일단 부서지거나 분리되고 나면 미립자들이 다시 달라붙지 않는다. 고체를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금속을 용접할 때처럼 온도를 높여 고체를 액체로 바꾸는 작업이 필요하다. 사물을 볼 때 우리는 단지 경계가 있는 확장된 형태만을 본다. 이 확장된 형태 즉 사물의 '형상'은 응집력 때문에 가능하다.
열성은 열(氣.기)의 요소이다. 이 요소는 성숙 시키고 강해지도록 하는 성질이 있고 다른 삼대(三大.땅.물.풍)에 열을 나누어 주기도 한다. 모든 중생들과 식물의 생명력은 이 요소에 의해 보존된다. 모든 사물의 형체에서 우리는 열기를 느낀다. 이것은 상대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대상이 차다고 말할 때 이것은 이 특별한 대상의 열기가 우리 몸의 열기보다 낮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차가움'이라는 것도 또한 낮은 상태에 있는 열의 요소라는 것이 확실하다.
운동성은 운동의 요소이다. 이것은 위치의 이동이다. 이것 또한 상대적이다. 한 물체가 움직이느냐 아니냐를 알기 위해서는 고정된 한 점이 필요하다. 이 점에 의해서 운동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우주 속에서 움직임이 전혀 없는 대상은 없다. 그래서 '안정성'이라는 것도 운동의 요소가 된다. 운동은 열에 의존한다. 열이 전혀 없는 원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열이 전혀 없다는 것은 이론으로나 가능하다.
모든 물질적 대상은 사대 가운데 어느 하나가 우세해 보일지라도 모두 사대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견고성의 요소가 우세하면 이 물질적 대상은 고체로 불린다.
항상 공존하는 이 사대(四大)로부터 24가지의 다른 물질적 현상과 성질들이 파생된다. 이 파생물들에는 다섯 가지 감각 기능인 눈(眼.안), 귀(耳.이), 코(鼻.비), 혀(舌.설), 몸(身.신)과 이들에 대응하는 감각 대상, 즉 볼 수 있는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이 포함된다. 물질의 집합체는 인간의 몸에 속하건 외부 세계에 속하건 모든 물질의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
2. 두 번째는 감각(受.수)의 집합체이다. 우리의 모든 감각은 이 집합체에 속한다. 감각에는 유쾌한 것, 불쾌한 것,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것 세 가지가 있다. 감각은 접촉에 의해서 일어난다. 형체를 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물체를 만지고, 의식의 대상을 인식했을 때 인간은 감각을 느낀다(이 여섯 종류의 감각들은 각기 눈,귀,코,혀,몸, 마음을 통해서 일어난다. 불교 사상에서는 마음을 여섯 번째 기능으로 간주한다).
예를 들면 눈(감각기관), 형체(감각대상), 안식(眼識)이 함께 만나는 것, 이것이 바로 접촉(觸.촉. phassa)이라고 불리는 세 가지의 화합(三事.삼사) 이다. 촉이란 감각 기관(안이비설신의), 감각 대상(색성향미촉법), 감각에 대한 의식이 결합하는 것을 말한다.
이 촉에 의하여 수(受.느낌.vedanaa)가 생기니 그 종류는 좋고, 나쁘고(괴로움) 그리고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세가지이다. 이 세 가지가 모두 함께 존재할 때 감각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감각과 접촉의 고유한 성질이다. 그러나 모든 중생들이 동일한 대상으로부터 똑같은 감각을 느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어떤 특별한 대상에서 유쾌한 느낌을 가지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불쾌한 느낌을 가질지도 모른다. 또 다른 사람은 동일한 대상에서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중성적인 느낌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식과 의식의 작용들이 가지는 기능에 달려 있다.
게다가 어떤 사람에게 유쾌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던 감각 대상이 다른 환경에 처했을 때는 그에게 불쾌하거나 중성적인 느낌을 일으킬 수 도 있다. 그리고 한 감각 기능에는 유쾌한 것이 다른 감각 기능에는 불쾌할 수 도 있다. 예를 들면 과일이 볼품이 없어 보여도 맛있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우리는 감각이 어떻게 다양한 방식의 접촉에 의해 조건지어지는가를 알게 된다.
3. 세 번째는 지각(想.상)의 집합체이다. 지각 기능은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대상 등 둘 다를 인식하는 것이다. 감각과 마찬가지로 지각에도 형상에 대한 지각, 소리, 냄새, 맛, 접촉, 의식의 대상에 대한 지각 등 여섯 가지가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각은 단순한 감각 지각을 말한다.
자각(의식의 기능)과 인식(지각의 기능)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이 있다. 의식이 대상을 자각하게 되면 동시에 지각의 정신적인 요소가 대상의 두드러진 특성을 파악해서 이 대상과 다른 대상을 구별하게 된다. 이 두르러진 특징 때문에 두 번 세 번 거듭해서 같은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 사실 매번 우리는 같은 대상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기억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지각이다.
지각이 종종 우리를 속인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을 지각의 환상 또는 지각의 왜곡이라고 한다. 다음과 같은 예가 그 점을 잘 나타내 준다. 들판에 씨를 뿌린 농부는 그 씨앗을 보호하기 위하여 허수아비를 세운다. 그러면 당분간 새들이 허수아비를 사람으로 알고 덤벼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지각의 왜곡이다. 마찬가지로 감각과 의식의 대상들도 잘못된 인상을 만들어
냄으로써 우리들의 마음을 속인다. 그래서 붓다는 지각을 아지랭이에 비유한다.
왜곡된 지각이건 아니건 어떤 특별한 지각이 자주 일어나게 되면, 그 지각은 점점 강해져서 우리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그래서 그 지각을 제거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렇게 되었을 때의 결과에 대해서는 [숫다니파타(Suttanipata)]의 다음 게송에 잘 설명되어 있다.
지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그에게는 더 이상 속박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통찰력을 얻은 사람은
모든 미혹을 멈춘다
그러나 지각에 매댤려 있고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에 얽매여 있는 사람은
이 세상과 다투면서 살아간다 (847)
4. 네 번째는 의지적인 형성력(行.행)의 집합체이다(의지적인 형성력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오온 중에서 행(行.Samkhara)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집합체에는 위에서 언급한 감각과 지각을 제외한 모든 정신적인 요소들이 포함된다. 아비달마에서 52가지의 정신적인 요소를 말하고 있다. 감각과 지각도 이 52가지 정신적인 요소에 속하지만 이것들은 의지적인 활동이 아니다. 나머지 50가지는 모두 의식적, 의지적 형성력에 속한다. 의지는 의식의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역활을 한다.
불교에서는 어떤 행위에 의지가 들어가 있지 않으면 그 행위를 업(業)으로 여기지 않는다. 감각이나 지각과 마찬가지로 이 의지적인 형성력의 집합체에도 형상을 향한 의지, 소리, 냄새, 맛, 육체적 접촉, 의식을 대상을 향한 의지 등 6가지가 있다.
5. 다섯 번째는 의식(識)의 집합체 이다(일반적으로 심(心.citta), 의(意.mano), 식(識.vinnana)는 동일한 말이다. 그러나 기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르게 작용한다). 이것은 오온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다. 의식 없이는 의식의 부산물, 즉 의식의 작용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52가지의 모든 의식 작용의 저장소가 된다. 의식과 의식의 작용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상호 의존적이며 공존한다.
그러면 의식은 기능은 무엇인가? 감각, 지각, 의지적인 형성력과 마찬가지로 의식에도 여섯 종류가 있고 그 기능도 다양하다. 의식은 의식의 토대와 대상을 가지고 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우리의 모든 감각들은 감각 기능(기관.안의비설신의)들과 외부 세계(감각 대상.색성향미촉법)가 접촉함으로써 경험 된다.
정신적인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의 기능은 다른 다섯 가지 기능들처럼 만지거나 지각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눈은 색깔의 세계를, 즉 볼 수 있는 대상을 인식하고, 귀는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마음(의식)은 개념과 사고의 세계를 인식한다. 기능(indriya)은 문자 그대로 말하면 '장(長)', '주인'을 의미한다. 형상은 눈의 기능에 의해서만 볼 수 있지 귀로 볼수는 없다. 소리도 귀의 기능에 의해서만 들을 수 있다. 사고와 개념의 세계로 넘어오면 의식의 기능이 모두 의식계의 주인이 된다. 눈은 사고할 수도 없고 개념을 형성할 수도 없다. 그러나 눈은 볼 수 있는 형상, 즉 색깔의 세계를 보는 도구이다.
여기서 의식의 기능을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예를 들면 눈과 형체, 귀와 소리 등 감각 기능과 감각 대상들 사이에 기능적인 관계성이 있기는 하지만 자각은 의식을 통해서 온다. 바꾸어 말하면 적절한 의식이 없다면 감각 대상은 특별한 자극을 느낄 수 없다. 눈과 형상이 동시에 존재할 때 이 둘에 의지해서 안식(眼識)이 일어난다. 마찬가지로 귀와 소리가 동시에 존재할 때 이식(耳識)이 있고, 나아가 의식의 기능과 의식의 대상이 동시에 존재할 때 의식(意識)이 있게 된다(중부 148). 그리고 눈과 형상과 안식이 함께 있을 때, 이 동시 발생을 접촉이라 한다. 이 접촉으로 부터 감각등이 있게 된다.
의식은 다섯 가지 감각의 문과 의식의 문, 이 여섯 가지 문(六根.육근. 감각기관.안이비설신의)에서 일어나는 자극을 통해 발생한다. 감각 기능과 감각 대상의 상호작용을 통해 의식이 일어나면 의식도 독립되지 못하고 조건지어지게 된다. 의식은 물질의 반대 개념인 정신이나 영혼이 아니다. 마음이라고 불리는 여섯 가지 기능의 영양분이 되는 사고와 생각 또한 의존적이고 조건 지어져 있다. 사고와 생각은 다섯 가지 다른 감각 기능들(五根.오근. 안이비설신)이 경험하는 외부 세계에 의존한다.
이 다섯 가지 기능들은 단지 현재에서만, 그것도 감각 대상들이 특별한 기능과 직접 접촉했을 때만 작용한다. 그러나 의식 기능은 이미 감각 기관에 의해 인식된 형상, 소리, 냄새, 맛, 또는 접촉이 있건 없건 간에 감각 대상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면 과거에 눈이 접촉했던 볼 수 있는 대상은 비록 대상이 눈 앞에 없다 하더라도 바로 이 순간 마음의 기능에 의해서 마음에 떠 올릴 수 있다. 다른 감각 대상들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주관적이다. 그래서 이 감각들 중에 어떤 것은 경험하기 어렵다. 의식의 이러한 활동은 미묘해서 때때로 일반적인 이해의 범위를 벗어나 있다.
그래서 온 우주는 단순한 감각 덩어리가 된다. 색깔 있는 천과 뭔가 견고한 것, 즉 펼쳐져 있는 어떤 것을 보면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하나의 실체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실체가 아니다. 의식이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현상들을 단지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해석이 감각 통로를 통해 나타난 것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의식은 물질 세계의 영역 밖에 있기 때문에 화학적인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크기, 형태뿐만 아니라 부피도 없다.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으며, 다섯 가지 감각 기관에 의해 인식(분별)되는 것도 아니다. 의식은 다른 요소들(오근)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요소들의 주인이다. 그리고 의식은 '자아', '영혼'의 형태로 영원히 지속되는 정신이 아님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의식은 물질에 반대되는 정신도 아니고 물질에서 파생되는 것도 아니다.
영원히 지속되는 자아 또는 영혼의 형태로 된 의식이 인간 내부에 존재해서 일생을 통해 지속되며
죽음에 이르러서는 한 생명체에서 다른 생명체로 윤회하여 현생과 다음생을 연결시켜 준다고 생각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붓다 당시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우리는 맛지마 니카야(Majjhima-nikaya)의 38번째 경에서 아주 좋은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사티(Sati) 라고 하는, 붓다의 한 제자가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세존께서 가려쳐 주신 법은 저의 의식이 재생하면서 윤회하고 떠돌아 다닌다고 이해 했습니다."
사티가 붓다에게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자 붓다는 그에게 물었다.
"사티야, 그 의식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여기저기서 행한 선하고 악한 행위의 결과를 느끼고 경험하는 것을 의식이라고 합니다."
"이 어리석은 사티야, 내가 그런 식으로 법을 가르친다고 누구한테 들었느냐? 의식은 조건이 있어야
일어나고 조건이 없으면 의식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내가 여러 번 말하지 않았더냐?"
[세번째 뱀발]
오온(오온)
(1) 존재론적 입장
우리가 있다'는 인식하는 모든것은 ;십팔계'를 인연으로 해서 '촉(觸.phassa)'에서 발생한 의식이다. 즉 여섯가지의 감각기관과 여섯가지의 감각대상이 만나면 여섯가지의 식이 생긴다(통칭하여 18계라고 함). 이들 세가지를 합쳐서 촉이라고 이 촉에 의하여 느낌(受.수. vedanaa)이 생긴다. 느낌에는 좋거나 나쁘거나 또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세가지가 있다.
우리에게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물질과 정신(明色.명색. 몸과 마음. 色受想行識)으로 나눌 수 있다.
1. 물질이란 책상, 나무, 돌, 우리몸 이런걸말할수 있다. 이것을 색(色)이라 한다.
다음에 정신부분에 대하여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2. 느끼는 정신, 즉 괴로움, 즐거움,아름다움,추함을 느낀다. 이렇게 느끼는 존재를 감정이라하고 오온의 수(受)라 한다.
3. 생각하는 정신이다. 이것저것비교하고 논리적사유, 추리 이렇게 생각하는 존재를 이성이라 하며 오온의 상(想)에 해당한다.
4. 행위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정신이 있다. 산에 가고 싶다. 부자가 되고싶다. 이것을 의지, 오온의 행(行)이라 한다.
5. 사물을 분별하여 인식하는 정신이다. 이것은 꽃이다. 이것은 책상이다. 이것을 의식이라하고 오온의 식(識)에 해당한다.
우리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물질, 감정, 이성, 의지, 의식 다섯가지 이다.따라서 이 세상에는 물질적존재와 정신적존재가 있다고 할수 있다.이 다섯까지 존재에 대하여 우리는 물질은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요소로 생각하고 감성,이성,의지,의식은
우리의 정신이 가지고 있는 정신작용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물질적 존재와 정신적존재가 있다고 할수 있다. 불교에서는 이 다섯가지를 오온(五蘊)이라 부른다.
불교는 오온이 우리 외부에 실재하고 있는 5가지 요소가 아니라 좀 어렵게 불교용어로 말하자면 18계에서 연기한 촉(觸)을 통해 존재로 느껴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오온의 이해가 무척 어렵게 느껴진다. 그러나 더 어려운것은 우리 마음에서 연기 한것이라고 말하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오온이 연기한하는데 바탕이 되는 것이 '십이처(十二處. 안이비설신의/색성향미촉법)'와 '촉입처(觸入處)'이다.
(2) 오온의 근원
십이입처(또는 십이처)란 안,이,비,설,신,의 라는 육내입처 (六內入處.육근)와 색,성,향,미,촉,법 이라는 육외입처 (六外入處.육근)말한다. 그러나 내입처와 외입처는 감각과, 감각의 대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십이입처는 욕탐이라는 번뇌에 묶여 있는 우리의 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이입처가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십이입처는 분명히 우리의 마음을 의미한다.
예를들어 우리는 눈으로 색을 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는 것은 얼굴에 달린 눈이 아닙니다. 눈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봅니다. 이렇게 보는 마음이 내입처의 眼 이다. 우리는 밖에 있는 색을 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색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빛의 파장에 의해 우리의 시신경이 자극을 받으면 색깔을 느낀다. 이와 같이 우리가 보는 색은 우리의 마음에 생긴 감각이다. 소리도 냄새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보는 마음에 의해 보여지는 마음이 외입처이다. 따라서 내입처와 외입처는 모두 우리의 마음일 뿐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보는 것은 안에 있는 나라고 생각하고, 보이는 것은 밖에 있는 나와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안에 있는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마음이라는 의미에서 내입처라고 부르고, 밖에 있는 세계’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마음이라는 의미에서 외입처라고 부른다. 결국 십이입처는 ‘나[我]와 남[世界]을 분별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고, 이 마음에서 중생의 세계인 삼계(三界)가 벌어진다고 하는 것이 불교의 주장이다. 우리가 ‘나’라고 하는 것을 살펴보면, 나는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는 존재이다. 우리가 ‘세계’라고 하는 것을 보면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인식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일체는 십이입처라고 하는 것이다.
붓다가 지혜의 눈을 얻고 세상을 바라봤을 때 붓다가 알아 챈 세계는 우리의 밖에 우리와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연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응부 니카야] 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세간에 세계가 존재한다는 생각과 신념을 있게하는 것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수단이 되는 것,
우리가 세계를 확신할 때 수단이 되는 것),
그것을 성법률 (聖法律) 에서는 세계(세간)라고 부른다.
무엇이 세계가 존재한다는 생각과 신념을 있게하는가 ?
비구들이여, 안(眼)에 의해서, 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에 의해서
세간에 세계가 존재한다는 생각과 신념이 있다.
이것을 성법률 세계에서는 세계라고 부른다. "
이렇듯 붓다는 세계의 근본을 어떤 존재라고 보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세간을 인식하는 그것, 그것을 세계의 근본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인식론에 촛점을 두고 있지 세간의 일을 과학적으로 분석을 한 것도 아니고 형이상학을 배제하고 실천론만을 말한 것도 아니다. 또한 붓다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세계의 시간적 시원과 공간적 근원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인식되고
있는 현실세계의 인식론적 근원을 문제삼고 있으며 이것을 십이연기로 보여주고 있다. 즉,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가 그것이다.
좀더 설명을 부언해 보자.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육식이 발생하면 우리의 마음은 십팔계의 상태가 된다.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한다는 것은 십이입처의 의식상태에서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연이란 행위, 즉 업을 의미한다. 우리가 인연을 짓는다는 것은 업을 짓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보는 것도 업이고, 듣는 것도 업이고, 생각하는 것도 업이다.그러므로 ‘안과 색을 인연으로 안식이 생긴다’는 것을 볼 때 사물을 분별하는 의식이 생긴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육식이 생긴다는 것은 인지활동을 통해 사물을 분별하는 의식이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렇게 사물을 분별하는 의식이 생기면 이 분별심에 의해 주관계, 대상계, 의식계가 분별되며, 이렇게 분별되어 있는 의식상태가 십팔계이다. 십이입처에서 육식이 발생하여 십팔계가 성립하는 것은 욕탐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처음으로 무지개를 보았다고 하자. 그 사람은 무지개를 분별하여 인식하는 위식이 자신의 십팔계 안에
없기 때문에 무지개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만약 무지개가 구름처럼 별 색깔이 없어서 관심이 가지 않는 것이라면 보지 못하고 지나치거나, 보았다고 하더라도 좀 이상하게 생긴 구름이 있다고 느끼고 말 것이다. 그러나 관심이 있으면 보는 자기 자신(주관)과 보이는 무지개(대상)가 의식 속에 뚜렷이 나타난다. 이와 같이 주관, 대상, 의식이 함께 나타날 때 우리는 사물을 인식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인식은 관심이나 욕구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은 먹을 것을 보고, 옷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옷을 보듯이 우리의 인식의 바탕에는 욕탐이 있다. 십이입처와 십팔계 등은 관심, 즉 욕탐이 있어야 나타난다. 십이입처와 십이입처에서 연기한 식, 촉, 수를 모두 욕법(慾法)이라고 하는 것은 이들이 욕탐이 있을 때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주관(자아)과 대상(세계)이 개별적으로 실재한다는 어리석은 무명에서 사물을 보고 욕탐을 추구하는 삶을 살 때 십이입처가 연기한다. 욕탐을 가지고 사물을 봄으로써 십이입처가 나타나고,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보이는 것은 분별하는 의식이 나타난다.
만약 이 분별하는 의식이 이미 십팔계 안에 있다면 그 식이 나타나서 ‘무지개가 있다’고 느낄 것이다. 즉 촉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지개를 분별하는 식이 없을 때에는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의식이 새롭게 형성된다. 무지개를 분별하는 의식이 없으면 우리는 무지개를 보면서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실은 모르는 것은 무지개가 이니라 무지개의 이름이다. 여러 가지 색이 층을 이루고서 커다란 반원으로 하늘 높이 걸려 있는 무지개의 모습은 눈을 통해 알고 있다. 단지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는지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 사람은 무지개의 여러 가지 색은 알아 볼 것이다. 무지개의 여러 가지 색은 알아 보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은 그 사람의 안식계 속에는 여러 가지 색을 분별할 수 있는 안식은 있지만, 의식계 속에 무지개라는 이름의 사물을 분별 할 수 있는 의식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지개를 분별하지 못하다가 누군가가 그 이름을 알려주거나 스스로 이름을 붙이면, 이때 비로소
무지개를 분별하여 알아 볼 수 있는 의식이 생겨서 의식계 속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십팔계는 보고, 듣고, 생각하는 우리의 삶, 즉 업에 의해 형성되어 같은 종류끼리 계역을 형성하고 있는 의식의 집단이다. 이 십팔계는 구체적인 인연이 주어지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씩은 나타나지 않고 반드시 셋이 모여서 나타난다. 보이는 것이 없으면 보는 놈이 나타나지 않고, 보는 놈이 없으면 보이는 것이 나타나지 않으며, 보는 놈과 보이는 것이 없으면 보이는 것을 분별하는 의식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들이 나타나는 계기는 행위, 즉 업이다.
어떤 욕탐을 가지고 보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보는 나(주관), 보이는 사물(대상), 이것을 분별하는 의식이 나타나 함께 화합한다. 이것이 촉(촉)이다. 우리가 ‘있다, 즉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촉을 인연으로 해서, 즉 업에 의해 형성된 ‘십팔계’가 화합하여 나타난 것이다.
예를 들면 책을 놓고 보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상을 보면 상은 책을 놓고 보기에 좋은 것으로 보이고, 이때 책상을 분별하는
의식이 나타나서 ‘여기에 책상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욕구가 다르면 다른 인식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음식을 놓고 먹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보면 동일한 상이 밥상으로 인식되고, 불을 피우려는 의도로 보면 그 상은 땔감이 되는 것이다. 촉은 이렇게 모든 존재가 성립하는 근거가 되는 의식상태이다.
십팔계라는 의식세계 속에 있는 의식내용을 ‘존재’, 즉 ‘있는 것’으로 드러내는 것이 촉(觸)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촉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를 오온으로 분류하므로 촉은 오온의 근원이 된다.
(3) 오온의 발생과 성립
촉은 ‘무엇인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촉을 통해서 있다고 느끼는 것은 십팔계에 있는 것들이다. 십팔계에는 십이입처와 육식이 있다. 십팔계라는 계의 속에 나누어져 있는 이들은 우리의 인식행위를 통해화합하게 된다. 이것을 촉이라고 한다. 촉을 통해 비로소 우리의 마음 속에 같은 종류끼리모여 있는 십이입처와 육식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책상이 있다고 느끼는 것은, 책을 놓고 보기에 적합한 모양의 사물을 보면 십이입처의 내입처와 외입처가 육식의 책상을 분별하는 의식과 화합함으로써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먼저 눈으로 색깔과 모양을 보면 책상의 모습이 있다고 느껴진다. 손으로 만져보면 책상의 강도와 매끄러운 종도가 있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이러한 책상의 모습과 감촉 등을 종합하여 마음으로 판단해 보면 책상이 있다고 느껴진다. 이렇게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져보아서 우리에게 있다고 느껴지는 것을 우리는 물질이라고 한다.
물질은 이렇게 우리에게 보이고, 들리고, 냄새나고, 맛이 나고, 만져지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은 촉을 통해서 있다고 느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물질이 인식되면 물질을 인식하는 것도 있다고 느낀다. 책상만 있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책상을 보고 만지는 의식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보는 의식은 눈을 통해 보고, 듣는 의식은 귀를 통해 듣는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인식하는 주체로 생각되고 있는 것이 식이다. 그리고 눈, 귀, 코 등은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눈, 코, 귀, 혀, 몸을 우리의 육체라 생각하고 있고, 우리의 육체는 물질로 되어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은 십이입처 가운데 의와 법을 제외한 안, 이, 비, 설, 신과 색, 성, 향, 미, 촉, 열 가지가 촉을 통해서 ‘존재’로 느껴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촉을 통해서 존재로 느껴지고 있는 것이 물질과 의식이다.
그러나 우리가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십팔계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물질과 의식 이외에도 감정, 이성, 의지가 있다. 우리가 십팔계에 없는 감정, 이성, 의지 같은 것을 존재한다고 느끼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촉을 통해서 새로운 의식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물질과 의식은 촉을 통해서 십팔계라고 하는 의식 내부에 있는 것들이 밖에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 것들인데, 이렇게 물질과 의식이 존재하는 것으로 느껴지면 이 느낌을 통해서, 즉 촉을 인연으로 해서 새로운 의식들이 나타난다. 우리가 감정, 이성, 의지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수(受), 상(想), 사(思)라고 부른다. 이 경에서는 ‘촉에서 수상사가 생긴다’고 하고 있다.
수상사란 오온의 수, 상, 행에 해당한다. 촉을 통해서 십팔계 속에 있던 십이입처와 육식은 오온의 색과 식이되고, 촉을 통해서 새롭게 생긴 수, 상, 사는 오온의 수, 상, 행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촉을 통해서 오온이 발생한다. 그러나 촉을 통해서 발생한 ‘있다는 느낌들’이 곧 오온은 아니다.
다음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촉을 통해서 발생한 것은 오온의 질료가 되는 것들이다. 오온은 이들 의식이 발생하여 활동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오온의 성립과정은 뒤에 살펴보기로 하고 촉에서 수 상 사가 생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자.
예를 들어 아름답게 피어 있는 장미를 본다고 하자. 아름다운 장미를 보면 즐거움을 느낀다. 이렇게 ‘무엇이 아름답다’ 또는 ‘무엇이 보기 싫다’고 느끼는 것을 수(受)라고 한다. 이러한 수는 촉에서 생긴 것이다. 만약 장미가 있다는 느낌이 없으면 그 장미가 아름답다는 느낌이 생길 수 없기 때문이다. 장미를 보고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만은 아니다. 이 장미는 보통 장미보다 ‘더 붉고, 더 크다’라고도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다른 것과 비교하고 사유하는 것을 상(想)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상도 장미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따라서 상도 촉에서 생긴 것이다.
한편 장미를 보고 이것을 꺾어 꽃병에 꽃아놓고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 것이다. 이렇게 어떤 것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사라고 한다. 따라서 사도 촉에서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어떤 것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사라고 한다. 따라서 사도 촉에서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수, 상, 사, 즉 우리의 감정, 이성, 의지는 촉에서 생긴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느낌과 생각과 의지를 일으키는 정신적 실체가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미추와 고락을 느끼는 감정이 본래부터 있다가 즐거운 것을 보면 즐겁게 느끼고 괴로운 것을 보면 괴롭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배가 부를 때 먹으면 괴롭다. 만약 고락을 느끼는 감정이 존재하고 있다면 맛있는 것은 언제 먹어도 즐거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배고플 때는 맛없는 것을 먹어도 즐겁고, 배부를 때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괴롭다는 것은 감정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그렇다고 감정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감정은 촉에서 생기는 것이지 본래부터 우리의 마음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성도 마찬가지다. 10평의 작은 집에서 살 때는 20평의 집만 보아도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30평의 집에 살다가 20평의 집을 보게 되면 작다고 생각한다. 의지도 마찬가지다. 어제는 하고 싶던 일이 오늘은 하기가 싫고, 어제는 하기 싫은 일이 오늘은 하고 싶기도 하다. 따라서 이성이나 의지가 우리의 마음에 존재하고 싶기도 하다. 따라서 이성이나 의지가 우리의 마음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착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촉에서 생긴 것을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인간은 육체와 감정과, 이성과 의지와 의식을 본래부터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이런 것을 가지고 인간이라고 부르고, 그 사람은 몸이 어떻고, 감정이 어떻고, 이성이나, 의지나 의식이 어떻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는 이러이러한 몸과 감정과 이성과 의지와 의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 내가 나의 눈으로 보니 어떤 것이 있다. 내가 나의 감정으로 느껴보니 그것을 즐겁다. 내가 나의 이성으로 생각해 보니 그것을 옳다는 등의 주장을 하기도 한다. 우리가 자아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촉에서 생긴 오온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오온은 촉에서 생겨 무상하게 생멸하는 허망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온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 오온을 ‘나’라고 하면서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죽는다는 허망한 생각에 빠져 있다. ‘나는 지금까지 몇 년을 살았다.’라고 주장하지만 오온 가운데 그 동안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연 따라서 촉에서 생꼇다가 간 곳이 없이 사라지는 무상한 것이 오온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무상한 것을 ‘나’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내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어간다는 생각 속에서 온갖 괴로움을 느낀다.
그래서 세존은 “잡아함 9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색은 무상하다.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움을 주는 것이다.
이렇게 괴로움을 주는 것은 ‘나’가 아니다.
‘나’가 아닌 것은 ‘나의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을 진실된 바른 관찰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수, 상, 행, 식도 무상하다.
또 “잡아함 1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마땅히 색을 무상하다고 관찰해야 한다.
이와 같이 관찰하는 사람이 바르게 관찰한 것이다.
바르게 관찰한 사람은 색을 싫어하게 되고, 싫어하는
사람은 그것을 즐기려는 욕탐이 없어진다.
그것을 즐기려는 욕탐이 없어진 사람을 마음이
해탈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수, 상, 행, 식도 무상하다.
우리가 ‘나와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오온은 이렇게 촉에서 생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다. 따라서 촉을 없애고 오온을 없애야 해탈이 있고, 열반의 성취가 있다. 그리고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촉이 어떻게 생기고, 촉에서 어떤 것이
생기는지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 세존이 촉을 멸하고 오온을 멸하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잡아함 41경”에서는 오온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어떤 것이 色(색)을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존재하는 모든 색은 일체와 사대와 사대를 취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을 색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색을 여실하게 안다.
어떤 것이 색의 집을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색에 대하여 희탐과 갈애가 있으면 이것을 색의 集(집)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색의 집을 여실하게 안다.
----중략----
어떤 것이 수를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육수신을 말한다.
안촉에서 생긴 수, 이비설신의촉에서 생긴 수,
이것을 수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수를 여실하게 안다.
어떤 것이 수의 집을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촉의 집이 수의 집이다.
이와 같이 수의 집을 여실하게 안다.
----중략----
어떤 것이 상을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육상신을 말한다.
안촉에서 생긴 상, 이비설신의촉에서 생긴 상,
이것을 상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상을 여실하게 안다.
어떤 것이 상의 집을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촉의 집이 상의 집이다. 이와 같이 상의 집을 여실하게 안다.
----중략----
어떤 것이 행을 여실 하게 아는 것인가? 육사신을 말한다.
안촉에서 생긴 사, 이비설신의촉에서 생긴 사,
이것을 행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행을 여실하게 안다.
어떤 것이 행의 집을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촉의 집이 행의 집이다. 이와 같이 행의 집을 여실하게 안다.
----중략----
어떤 것이 식을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육식신을 말한다.
안식신, 이비설신의식신, 이것을 식신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식신을 여실하게 안다. 어떤 것이 식의 집을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명색의 집을 말한다.
이것을 식집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식의 집을 여실하게 안다.
이 경에서 오온의 색은 사대와 사대를 취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오온의 색이 지수화풍 사대라는 요소와 그 요소가 모여서 이루어진 물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중아함 상적유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불교에서 보는 사대는 물질을 이루는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지각을 통해 단단하다고 느껴지고, 촉촉하다고 느껴지고, 따뜻하다고 느껴지고, 움직인다고 느껴진 것, 즉 四界(사계)이다.
따라서 오온의 색이 사대와 사대를 취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은, 우리가 물질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지각을 통해 느껴진 느낌과
그런 느낌들을 취한 것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중생들은 이런 의미에서 색, 즉 물질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물질적 실체들의 집합체로 알고 있는 색은 우리의 지각을 취하여 존재로 생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색을 사실 그대로(여실하게) 아는 것이 된다는 것이 이 경의 의미이다. 색이 사대라는 실체의 집합이 아니라 지각을 통해 느껴진 느낌을 취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은 색의 집이 색에 대한 희탐과 갈애라는 설명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집(集)은 ‘samudaya'의 한역이다.
’samudaya'는 ‘함께’를 의미하는 ‘sam'과 ’증가, 생기, 수집‘을 의미하는 ’udaya'의 합성어로서 ‘함께 모여 나타남’의 의미이다. 이것은 ‘집기’로 한역되기도 하며, 사성제의 집성제는 ‘samudaya'를 의미한다. 우리가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은 모두가 무명에서 연기한 망념이 집기한 것이다. 우리가 물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즉 생도 지각된 내용이 함께 모여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지각된 내용은 왜 함께 모여, 즉 집기하여 색이 되는가?
세존은 지각된 것에 대하여 그것을 갈망하고 기쁨을 느끼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한다. 우리가 지각하는 내용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지각하는 자신도 변화하고 지각되는 내용도 변화한다. 어제 본 장미와 오늘 보는 장미는 같은 장미가 아니고, 어제 장미를 본 눈과 오늘 장미를 보는 눈도 같은 눈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제 본 장미를 오늘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장미는 피어나면서부터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고, 장미를 보는 나의 눈도 변화하고 있지만, 어제 장미를 볼 때 생긴 지각 내용과 오늘 생긴 지각 내용이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에 동일한 장미라고 생각하며, 동시에 그 장미를 보는 눈도 동일한 눈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장미가 시들어서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면 우리는 장미가 사라졌다고 말하고, 눈이 장미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되면 눈이 나빠졌다고 말한다.
이렇게 시간적인 동일성을 가지고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장미와 눈이라는 물질은 욕구나 갈애를 통해 어제의 지각과 오늘의 지각이 함께 모여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수, 즉 우리가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마음은 촉에서 발생하는 느낌이다.
그런데 촉, 즉 사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이 반복되어 함께 모여 나타나면, 그 느낌도 함께 모여 마치 감정이라는 존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이성이나 의지도 마찬가지다. 식은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발생하고 있는 분별하는 마음이다. 사물의 인식은 이름과 형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의 의식 속에 책상이라는 이름과 책상의 형태가 있을 때 그 형태와 같은 것을 보면 우리는 그것을 책상이라고 인식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식은 명색이 함께 모여 나타난 현상이다. 집(集)은 이렇게 중생들이 존재로 생각하는 오온의 원인이다. 사성제에서 오취온이 괴로움이고, 오취온의 원인이 집이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으며, 집은 욕탐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괴로움을 멸하기 위해서 욕탐을 멸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4) 오온의 성립
우리가 중생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단식, 촉식, 의사식, 식식이라는 네 가지 자양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 자양분을 탐내어 좋아하면 식이 사라지지 않고 머물면서 커가고, 이렇게 식이 커갈 때 명색이 나타나며, 명색이 나타날 때, 행이 자라나고, 행이 자라날 때 미래의 자아가 자라나서 미래의 자아가 다시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망상이 계속된다는 것이 위에서 살펴본 “잡아함374경”의 내용이다.
네 가지 자양분을 탐내어 좋아하면 식이 사라지지 않고 머물면서 커간다고 하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식은 사물을 분별하여 인식하는 의식인데 이것은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생긴 것이다. 즉 십이입처에서 연기한 허망한 의식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식이 우리의 몸 속에 변함 없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렇게 우리의 믿음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머물고 있는 것은 세존은 식이 머물고 있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이 식은 머물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생기는 식은 삶을 통해 성장한다. 어릴 때는 좁은 세계를 인식하지만 어른이 되면 폭넓은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은 식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우리의 삶을 통해 의식세계가 성장하는 것을 세존이 식이 커간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식세계는 왜 성장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삶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인식을 함으로써 삶을 통해 형성된 의식이 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각활동을 하면서, 지각되는 것을 밖에 존재하는 대상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그 대상에 대하여 의도를 가지고, 인식하면서 살아간다. 이러한 삶은 일회적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된다. 날마다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인식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몸과 감정과 이성과 의지와 의식으로 이루어진 나라고 하는 존재가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을 지각하고, 외부에 존재하는 즐겁거나 괴로운 대상을 감정으로 느끼고, 길거나 짧은 대상을 이성으로 판단하고, 좋거나 나쁜 일을 의지로 선택하면서, 외부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아나 외부의 존재는 촉을 통해 느끼고 있는 허망한 느낌이다. 이렇게 허망한 것을 참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중생들의 식이다. 따라서 중생들의 식은 지각활동을 하면서, 촉을 통해 외부에 사물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 존재에 대하여 고락을 느끼고, 생각하고, 의도하고, 인식함으로써 성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의 지각활동이나 느끼고, 생각하고, 의도하고, 인식하는 일은 우리에게 그것에 대한 욕구가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욕구가 다르면 지각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의도하고 인식하는 것도 달라진다. 그래서 세존은 네 가지 자양분에 대하여 좋아하고 탐내면 식이 사라지지 않고 머물면서 커간다고 이야기 한 것이다. 식이 자라날 때 명색이 나타난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명색은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이름과 형태이다. 따라서 식이 자랄 때 명색이 나타난다는 것은 새로운 식이 형성될 때 새로운 이름과 형태의 사물이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식을 자라나게 하는 네 가지 자양분이 식의 성장과 함께
이름과 형태를 지닌 존재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름과 형태를 지닌 존재로 인식하는 모든 사물은 이렇게 식의 성장을 통해 존재로 인식된 것이다.
예를 들어 무지개를 처음 보았을 때는 무지개를 처음 보았을 때는 무지개를 분별하는 식이 없지만 누군가가 그것의 이름이 무지개라는 것을 알려주면 무지개를 분별하여 인식하는 의식이 새롭게 생긴다. 즉 식이 자라난다. 이렇게 식이 자라나면 여러 가지 색이
층을 이루어 반원의 형태로 하늘에 걸려 있는 것을 무지개라고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존재는 명색이다. 명색이 우리가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오온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중생들이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오온이기 때문이다. 식이 자라남으로써 명색이 나타난다는 것을 명색은 식을 인연으로 한다고 어느 경에서는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오온의 수, 상, 행, 식이 명이고, 육계의 지수화풍 사대와 사대로 만들어진 것이 색이라는 것이다.
식의 성장을 통해 네 가지 자양분이 오온이라는 존재로 인식되며, 이것이 명색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식이 머물면서 자라날 때 명색이 나타난다는 말은 식이 머물면서 자라나기 때문에 중생들이 이름과 형태로 된 허망한 존재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자아나 세계의 존재와 같은 존재의 세계를 허구적으로 만드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식이라는 사실이다. 즉 오온은 식에 의해 성립된다는 것이다. 촉을 통해 ‘있다’고 느껴질 뿐 아직 구체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지 않은 육계와 수, 상, 사는 식을 통해 이름과 형태를 지닌 구체적인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다. 즉 식이 네 가지 자양분에 의해 성장하면서 이들을 질료로 이름과 형태를 지닌 인식의 대상으로 만들어 인식하는 것이다. 오온은 이렇게 식에 의해 실재하는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자아’와 ‘세계의 존재’이다.
식은 촉을 통해 형성된 의식을 존재는 대상으로 인식하면서 인식하는 자신까지 대상화한다.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식이 대상을 인식하고 나서 대상을 인식하는 식 자신을 대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의식을 다른 무엇보다 더 확실한 존재로 생각한다. 만약 ‘인식하는 존재인 의식이 없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인식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나서 의심하고 있는 정신은 사유하는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데카르트가 그 예이다.
식이 자신을 인식의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대상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식의 대상이 없다면 그것을 인식하는 의식은 생길 수가 없다. 식이 존재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식이 인식하는 대상이 먼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식이 다른 것을 인식함으로써 그 대상을 인식하는 자신을 대상으로 인식한 것이 오온의 식온이다. 따라서 오온이 성립한 순서로 본다면 식은 맨 마지막이 된다. 오온의 순서는 이렇게 오온이 성립하는 순서로 되어 있다
(5) 오온의 순서
오온의 순서는 오온이 성립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왜 오온의 순서에 색이 맨 앞에 위치하고, 다음으로 수, 상, 행이 위치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삶을 관찰해 보면 우리는 복,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면서 색깔과 모습, 소리, 향기, 맛, 촉감을 지각한다. 이러한 지각이 생기면 우리는 보는 것은 나의 눈이고, 보이는 것은 외부의 색이며, 듣는 것은 나의 귀이고, 들리는 것은 외부의 소리이며, 만지는 것은 나의 몸이고, 만져지는 것은 외부의 사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눈, 귀, 코 , 혀, 몸으로 외부의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나의 마음이고, 이 마음으로 인식되는 것은 외부의 사물, 즉 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마음은 눈, 귀, 코, 혀 몸은 물질로 된 나이고, 색깔, 소리, 냄새, 맛, 촉감은 물질로 된 외부의 사물이라고 생각한다. 십이입처 가운데 안, 이, 비, 설, 신은 나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로 인식되고, 색 성 향 미 촉은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을
이루고 있는 물질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렇게 나의 몸을 이루는 물질과 외부의 사물을 이루고 있는 물질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오온의 색이다. 이와 같이 식에 의해 맨 처음 존재로 인식된 것은 색이므로 색이 오온의 순서에서 맨 앞에 자리하게 된다.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나의 몸이 공간 속에서 외부의 물질을 지각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면, 이 물질에 대하여 자신의 몸에 이로운 것은 즐겁고 아름답게 느끼고, 해로운 것은 괴롭고 보기 싫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다른 것과 비교하여 사유하고, 이것에 대하여 의도를 갖게 된다. 이것을 촉에서 수, 상, 사가 생긴다고 말한다. 느낌과 사유와 의도는 이렇게 외부에 사물이 존재한다는 느낌, 즉 촉에서 함께 생기는 것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사유와 의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사유는 단순히 외부의 존재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촉에서 생긴 느낌을 포함한 사유이다. 그리고 의도도 사유한 태용을 토대로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과가 있다고 하자. 사과가 있다는 느낌은 촉이다. 사과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이 사과는 빛도 좋고, 크기도 좋다고 느낀다면 이것은 촉에서 수가 생긴 것이다. 이렇게 사과가 좋다고 느끼면 이 사과의 값이 다른 사과의 값t에 비해 값이 싼것인지 비싼 것이지 생각하게 된다. 즉 값과 품질을 다른 사과와 비교에 보는 것이다. 그래서 값은 다른 다른사과보다 비싸지만 품질이 좋으므로 결코 비싼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다면 이것을 좋다는 느낌을 인연으로 해서 생긴 상이라고 할수 있다. 따라서 이때 상은 수를 인연으로 생기다고 할 수 있다.우리는 이러한 판단을 토대로 이 사과를 살것인가 말것인가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사과에 대한 의도는 사유를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의도 사는상을 인연으로 생긴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인식되면 그 존재에 대하여 느낌이 생기고 그 느낌을 바타으로 사유하게 되고 사유를 바탕으로 의도를 갖게된다. 따라서 촉에서 수가 생기면 수를 인연으로 상이 생기고 상이 생기면 상을 인연으로 사가 생긴다고 할 수 있다.
장암경에 세존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안과 색을 인연으로 안식이 생긴다. 안은 무상하고 유위이며 마음을 인연으로 생긴 것이다.
색과 안식도 무상하고 유위이며 마음을 인연으로 생긴 것이다.
이 세가지 화합이 촉이다. 촉이 생기면 느끼고 느끼면
사유하고 사유하면 의도한다...
이경은 촉에서 수상사가 발생하지만 오온은 서로 무관하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먼저 느낌이 생기고 그 느낌이 생기면 사유가 생기고 사유가 생기면 의도가 생긴다고 이야기 한 것이다. 오온의 수 상 행은 이렇게 차례대로 발생한 수, 상, 사가 존재로 인식 된 것이다. 따라서수,상,행 으로 되어있는 오온의 순서는 촉에서 이들이 발생한 순서에 따른 것이라 할수 있다.
출처 홍사성의 불교사랑 http://cafe.daum.net/hongsa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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