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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성역’ 깨는 전사에서 ‘소통의 전도사’로

slowdream 2009. 7. 10. 08:20

[한국, 소통합시다]

 

강준만 ‘성역’ 깨는 전사에서 ‘소통의 전도사’로

 

 

1990년대 초반 언론 인터뷰와 기고를 통해 공론장에 등장한 그는 에두르지 않는 직선의 문체를 선보이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언론과 대적하던 지식인이 드물던 시절 언론 개혁의 화두를 들고 나왔다. 신문의 독자란부터 사설까지 텍스트를 낱낱이 까발리는 특유의 ‘문헌 조사 방법론’을 선보인 것도 이때였다. 이미 조·중·동 등 보수언론을 ‘극우언론’으로 규정하고, ‘이념적 반동성’을 지적했다. 이 같은 강준만의 활동은 이후 안티조선의 주요 논거가 됨으로써 안티조선 운동을 촉발시킨 주인공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9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비평 대상은 점차 정치·경제·문화·사회 전반으로 확장된다. 허위의식으로 점철된 한국 지식 사회, 주류 사회의 ‘성역과 금기’를 깨트리는 게 당시 강준만의 사명이었다.

강준만 이름 석자를 널리 알린 것은 95년 출간한 <김대중 죽이기>였다. 정치인과 선거, 지역감정의 문제를 도발적으로 제기했다. ‘대중(大衆) 지식인’이 아니라 ‘대중(大中) 지식인’, ‘전라도 광신자’라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역주의 문제의 본질을 계속 헤집고 다녔다. 지역주의에 관한 문제 의식은 2002년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에서 심화돼 나타났다.

강준만은 2명의 대통령 당선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친 ‘지식인’이자 ‘정치 비평가’였지만 지식 사회를 떠나지 않았다. ‘강준만 교수’로서 비판·비평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강준만’을 규정하는 개념어가 된 ‘실명비판’을 통해 수많은 유명 인사들에게 칼과 창을 휘두르며 ‘90년대’를 관통했다. 지연과 학연 등 비이성적·비합리적 기제로 작동되는 지식 사회의 폐부를 찌르고, 난마 같은 기득권의 카르텔을 베어낼 듯한 기세였다. 전투적 게릴라 지식인, 지식 사회의 사무라이, 문화 반란의 기수란 호칭이 따라붙었다.

강준만의 주무기는 논리와 이성이었지만, ‘전사’답게 분노와 적개심도 공공연히 드러냈다. 피아 구분과 시비도 뚜렷했다. 97년 창간한 1인 저작물인 ‘인물과 사상’ 시리즈를 통해 ‘이성과 분노’에 기반한 강준만식 글쓰기는 정점에 이른다. 강준만은 98년 언론 인터뷰에서 “감정도 논리다. 내 글의 원동력은 분노다. 당신들이 논리 찾고 대안 찾으며 머뭇거리는 동안 언제 저 나쁜 자를 응징하겠느냐”고 말했다. 김대중(조선일보 주필)·조갑제 등 보수 인사뿐만 아니라 백낙청·손호철 등 진보적 지식인들에게도 칼날을 겨눴다. 독자들은 열광했고, ‘강준만 신드롬’이 일었다. 적들도 많아졌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육두문자까지 마다하지 않는 독설 때문에 ‘테러리스트’라는 말까지 나왔다. ‘오만과 독선’은 강준만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었다.

당시 강준만에게 ‘소통’의 여지는 없어보였다. 한 인터뷰에서는 “비판하는 인물들을 설득할 생각이 없다. 나는 그들을 폭격하겠다”고 했다. “논쟁보다 좋은 커뮤니케이션은 없다”는 그의 지론은 2000년대 들어서도 계속됐다.

시비와 호오가 분명했고, 양비론을 언제나 용납하지 않을 것 같던 강준만이 드디어 변했다. 2004년 초반 그는 ‘중간’과 ‘소통’에 관한 고민을 드러낸다. 전혀 그답지 않은 주제들이었다. 강준만은 김구 선생의 좌우 통합 노력을 예로 들며 “중간파를 다시 보려는 진지한 시도를 하지 않는 한 분열과 대립의 수렁에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분당 사태는 ‘중간과 소통’에 관한 문제 의식을 깊게 했다.

강준만은 한국일보 칼럼(2004년 3월15일자)에서 “저를 존경한다던 분들이 열린우리당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제게 돌을 던지고, 어떤 분들은 제가 대통령님에 대한 기대와 애정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로 호되게 비난한다. 대화 불능의 상태다. 도무지 저 같은 중간파가 설 땅이 없다”며 절필을 선언했다. 또 “나의 퇴출만이 해법”이라며 ‘인물과 사상’을 33호를 끝으로 폐간했다. 한국 사회의 이분법에 대한 절망의 표출이었다.

이후 ‘교양주의’ 저술을 병행하면서 ‘소통론’도 구체화해 나간다. ‘소통의 정치경제학’, ‘중간이 없는 이유’ 등의 ‘중간과 소통’에 관한 칼럼을 꾸준히 내놓았고, 2008년 9월에는 원용진(서강대), 조흡(동국대), 이창근(광운대) 등 언론학자와 함께 ‘소통포럼’을 만들며 소통의 전도사로 나섰다. 최근에는 소통에 관한 글을 모은 <대한민국 소통법>을 냈다. 강준만은 책 머리말에서 “소통을 역설하는 주장은 지지를 얻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기 주장을 더 앞세우는 모든 세력들로부터 비난받기 십상”이라며 “잘 알면서도 ‘커뮤니케이션 코리아’를 외치는 건 우리 인간이 (소통의) 희망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말했다.

항상 시대를 한발 앞서 갔던 그였다. 그가 최근 소통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ㆍ‘소통 대한민국’으로 가자 더딜망정 방향은 그렇게 잡자

10여년 전 지방언론을 주제로 한 어느 세미나에서 지방언론의 전망에 대해 비관적인 의견을 말했다가 청중의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무언가 도움이 될 말이 있겠다 싶어 만사 제쳐놓고 참석했는데, 그런 말을 하는 건 무책임하지 않은가”라는 게 비판의 요지였다. 맞다. 그래서 모든 세미나는 적어도 끝날 땐 반드시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청중의 노고에 보답하는 의미에서라도 말이다.

 

1990년대 거침없는 논리와 독설로 한국 주류·지식 사회의 ‘성역과 금기’에 도전하던 강준만교수는 2000년대 이후 소통의 전도사로 나서 ‘커뮤니케이션 코리아’를 역설하고 있다. |경향신문자료사진

 
 

‘소통’에 대해 말하려 하니 그때 생각이 난다. 소통의 전망에 대해 나는 비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잠자코 있지 왜 소통에 대해 글을 쓰는가. 왜 소통이 어려운지 그 이유는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게 나의 답이다.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소통을 죽이는 데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소통을 외치는 일이 무더기로 벌어지고 있는데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못 느끼는 둔감이 바로 소통의 적이라는 걸 널리 알리고 싶다는 뜻이다.

이명박 정권은 소통의 원흉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내 생각은 다르다. 아니 그 이전에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소통을 사랑했던 것인지 그걸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소통은 한국의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에서 한번도 대접받지 못한 개념이다. 선악(善惡)의 대결구도에서 또는 그렇게 믿는 상황에서 소통은 그 어느 쪽에도 미덕이 아니다. 인권과 정의의 편에 선 사람도 오직 강한 신념으로 무장해야지 소통을 시도한다는 건 ‘기회주의자’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우리는 그런 세월을 100년 넘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대중의 일상적 삶에서도 소통은 존중받지 못했다. 연고 중심의 ‘배짱’과 ‘이심전심(以心傳心)’이 소통을 대체했다. 물론 그게 나쁘기만 했던 건 아니다. 정(情)을 나누고 시간을 절약하는 효율성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건 우리의 ‘빨리빨리’가 저주이자 축복인 양면성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소통이 대단히 좋은 것처럼 말하지만, 그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빨리빨리’가 외쳐지는 사회에서 소통은 관료주의적 번문욕례(繁文縟禮)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일을 권력이 신속하고 일사불란하게 밀어붙일 때 뜨거운 박수를 보내지 소통의 과정을 건너 뛴다고 비판하진 않는다. 우리가 소통을 외칠 땐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일을 권력이 밀어붙일 때다. 즉, 우리 사회에서 소통은 이미 이념·정략에 오염된 개념이라는 뜻이다. 이명박 정권이 소통의 원흉이라는 판단을 내리기 위해선 그 이전의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정권 탄생에 표를 던지지 않은 유권자들과 소통을 했던가 하는 판단이 선행되어야 한다. 쉬운 일 같지만, 의외로 쉽지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옳다 그르다’의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가치를 강하게 내세우면서 소통의 대상과 의제를 차별하는 순간 소통은 무너진다. 정권별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소통은 우리 모두의 문제로 돌리는 게 옳다. 크게 보아 7가지 문제를 지적할 수 있겠다.

첫째, 승자독식주의다. 승자가 독식을 하는 체제 하에선 소통은 미덕이 아니다. 전혀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무조건 이기면 되는 것이지, 소통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선거란 헌법이 보장하고 국가가 공인해주는 승자 독식의 도박 축제다. 정치라는 도박산업이 관장하고 있는 인적·물적 자원의 양을 대폭 빼앗아 시민사회의 자율 영역으로 돌리지 않는 한 소통은 계속 쓰레기 취급을 받게 돼 있다.

둘째, 초강력 중앙집권주의다. 한국정치의 최대 특수성은 두말할 필요 없이 ‘서울 1극 구조’다. 이건 서양 정치이론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한국적 현상이다. 한국 정치에서 미디어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인들은 정당 등의 매개조직을 경유하지 않은 채 미디어를 통한 ‘직거래’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풀뿌리 소통’이 없는 가운데 미디어 장악을 놓고 이전투구를 벌이는 게 한국 정치의 주요 업무다.

 
 

셋째, 서열주의다. “나는 무엇이다”보다 “나는 어떠해야 한다”에 집착하는 한국인들은 말로 소통하는 게 아니라 서열과 등급과 계급으로 소통한다. 서열의 내면화로 인해 출세주의가 만연해 있고, 이는 공적 영역에 대한 불신을 가져와 소통을 이중으로 어렵게 만든다.

넷째, 지도자 추종주의다. 세가지 이유가 있다. (1) 고난과 시련의 역사로 인한 ‘영웅 대망론’이다. (2) 이념과 같은 추상보다는 사람에 더 잘 빠지는 체질과 더불어 한번 마음 주면 웬만해선 돌아서지 않는 의리·정 문화다. (3) 지도자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모든 걸 빨리 해결하고 싶어하는 ‘빨리빨리 문화’다. 대중의 소통권은 지도자들에게 헌납된 가운데 지도자의 ‘오빠부대’로만 기능하는 사회에서 소통이 가능할 리 없다. 지금 우리는 지도자 추종주의 자체를 문제삼을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지도자만을 바라보며 추종하거나 탓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다섯째, 극단주의다.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최대형의 의도와 최전선적 논리’에 집착하고 이에 따라 갈등세력 강경파들 간의 ‘적대적 공존’이 발생한다. 소통을 근거로 합리적·생산적 경쟁체제를 꿈꾸는 사람들은 많지만, 이들은 파편화돼 있어 조직화되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참여에 대한 반대급부로 줄 게 없기 때문이다. 공직을 줄 수도 없고, 다른 인정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도 없고, 통쾌하고 후련한 ‘카타르시스’도 주지 못한다. 특정 이념·노선·당파성을 내세워 지지자들의 피를 끓게 만드는 탁월한 논객들은 많지만, 소통을 외치는 논객이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여섯째, 이념의 사유화다. 자신이 내세우는 명분과 이념에 대해 조금만 신축성을 보이면 전체를 위해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반대편의 명분과 이념을 갖고 있는 사람과의 소통은 물론 타협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명분·이념에 자신의 사적 이익을 다 걸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적 이익은 넓은 개념이다. 자신이 주도해서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는 인정욕망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런 인정욕망은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승리를 갈구하는 마음으로 나타나는데, 실제로 이게 ‘소통 죽이기’의 주요 토대가 된다.

일곱째, 각개약진(各個躍進)이다. 각개약진이란 적진을 향해 병사 각 개인이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개별적으로 돌진하는 걸 뜻하는 군사용어다. 각개약진은 한국적 삶의 기본 패턴이다. 공적 영역과 공인에 대한 불신이 워낙 강해 사회적 문제조차 혼자 또는 가족 단위로 돌파하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는 뜻이다. 심심하면 벌어지는 집단적 열광의 비밀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집단적 열광은 각개약진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한 집단주의 축제다. 카타르시스가 목적일 뿐 소통이 설 땅은 없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은 구조적으로 소통을 기대하기 어려운 사회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사회가 소통이 어렵기 때문에 얻게 되는 ‘수익’이 있다는 것도 바로 보아야 한다. 한국인들은 합리적인 소통 가능성을 아예 포기했기 때문에 약육강식(弱肉强食)이라는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을 수용해 각개약진형 경쟁에 임하고 있다. 속된 말로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속설을 신봉하는 것이다. 대학입시 전쟁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기존 경쟁체제를 옹호하는 보수파들의 세계관이 바로 사회진화론인 셈이다. 물론 그걸 ‘수익’이라고 볼 수 있느냐 하는 반론은 가능할 것이나, “개인 실력으로 소통하라”는 인생관이 낳는 사회적 효과도 외면하지 않아야 이 문제에 대한 논쟁적 소통도 가능하다는 건 분명하다. 즉, 우리 사회가 약자들에게 가혹한 건 특정 권력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의 귀결이라는 걸 바로 보자는 뜻이다.

‘소통 대한민국’으로 가자. 더딜망정 방향은 그렇게 잡자.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방향조차 그쪽으로 틀지를 못했다.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생각은 잠시 접자. 서로 충돌하는 모든 집단들이 각자 다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선거 민주주의’를 하지 않겠다면 모를까, 그걸 하기로 한 이상, 또 그걸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이상, 이젠 달리 생각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미우나 고우나 더불어 같이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누가 옳건 그르건, 그 누구도 완승(完勝)은 가능하지 않으며, 누가 이기건 승자 독식주의는 나라를 망치는 짓이니, 소통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출처 경향신문 김종목기자 jo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