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로 듣는 오온(五蘊) 이야기
다시 듣는 오온이야기
오온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으면 언제나 그렇듯이 흥미가 있다. 책을 통해서 또는 법문을 통해서, 강연을 통해서 수 없이 들어 왔지만 그 때 마다 새롭다. 그런데 듣고 나면 금방 잊어 버리고 다시 들으면 생소한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아마도 가슴속 깊이 까지 이해가 덜 된 이유에서 일 것이다. 불교tv에 각묵스님의 초기불교의 교학에 대한 프로가 있다. 불자들이 알아야 할 기본적인 불교교리에 대하여 초기경전을 중심으로 하여 상세히 설명 하고 있다. 선문답식 강의가 아니라 매우 분석적으로 접근 하고 있다. 이렇게 해체 하여 분석 하는 것이 불교를 제대로 알기 위한 출발점이어서 일 것이다.
강의를 듣다 보면 빨리어 경전에 나오는 용어를 많이 사용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까지 들어온 강의나 법문에서는 좀처럼 빨리어 용어를 볼 수 없었다. 한문으로 번역된 경전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한문으로 번역된 경전을 다시 우리말로 옮기는 것은 '이중 번역'이다. 그 과정에서 뜻이 왜곡되고 심지어는 사람마다 다른 견해가 들어가 있을 수 있다. 한자가 뜻글자이고 하나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원전을 정확히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빨리어 원전을 우리말로 직접 번역한 자료와 빨리어 용어를 사용 하여 설명한다면 훨씬 더 이해가 빠르다. 특히 빨리어는 영어와 어근이 일치 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어느 면에 있어서 한문으로 된 2차번역된 경전보다 훨씬 더 알아 듣기 쉽다는 것이다.
넌더리를 칠 정도로 혐오를 느껴야
부처님의 말씀은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가 교학이다. 두번째는 수행에 관한 것이다. 교학은 보통 '온처계근제연'이라고 말한다. 즉 5온, 12처, 18계, 22근, 4성제, 12연기를 말한다. 그렇다면 수행에 관하여는 몇가지 종류가 있을까. 보통37가지가 있다고 해서 37조도품이라 한다. 37조도품은 무엇인가 짤막하게 말한다면, 4념처 4정근 4의족 5근 5력 7각지 8정도를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해체하여 보기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분해하여 분석한 것이 '온처계근제연'이다. 이렇게 해체 하여 보는 이유는 '무상 고 무아'를 보기 위해서이다. 무상 고 무아를 보아야 우리의 몸과 마음에 대하여 염오의 감정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이욕이 일어난다. 그래야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구체적인 방법이 수행이다. 37조도품 그 중에서도 8정도 수행을 통하여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학을 통하여 나라는 것에 대하여 넌더리를 칠 정도로 혐오를 느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을 구성 하는 있는 요소을 먼저 파악 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처님의 명령 사사나(sasana)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크게 물질과 정신으로 나누어져 있다. 물질을 색(色)이라고 하고 빨리어로 '루빠(rupa)'라 한다. 그리고 정신적인 요소를 '수상행식(受想行識)'이라고 한다. 이렇게 5가지의 무더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서 오온이다. 나란 존재를 이와 같이 5가지로 해체 하여 보면 5가지 무더기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 나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자동차를 모조리 분해해 놓았을 때 그 것을 자동차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런데 왜 부처님은 이와 같이 5가지로 해체 하여 놓았을까 바로 그것은 '아트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논리 전개를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나가 없음을 강조 하기 위하여 해체 하여 분석하고 또 분석 하였다. 이런 가르침을 일컬어 빨리어로 '사사나(sasana)'라 한다. 사사나는 우리말로 말하면 '명령'이라 한다. 초기경전의 가르침은 부처님의 명령인 것이다.
루빠나(rupana)
색을 물질이라 말하고 빨리어로 '루빠나(rupana)'라고 한다. 물질(루빠나)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근본물질'과 '파생된 물질'이다.
근본물질은 '지수화풍' 4대를 말한다. 그리고 파생물질은 '눈 귀 코 혀 몸'과 같은 감각기관을 말한다. 즉 근본물질을 통하여 딱딱함과 같은 견고성을 느끼면 '지대(地大)'이다. '수대(水大)'는 응집성과 습윤성이 있다. '화대(化大)'는 열성이 있어서 뜨거운 성질을 가지고 있다. '풍대(風大)'는 유동성이 있어서 가벼운 느낌이다. 또 근본물질인 눈을 통하여 형색을 보고, 귀로는 소리를 듣고, 코로는 냄새를 맡고, 혀로는 맛을 느끼고, 몸으로는 감촉을 느낀다.
웨다나(vedana)
나를 구성 하고 있는 정신적인 요소는 크게 수상행식 4가지이다. 먼저 수(受)에 관한 사항이다.
수를 빨리어로 '웨다나(vedana)'라 한다. 수를 한마디로 말하면 '느낌'이다. 영어로는 '필링(feeling)'이 될 것이다. 느낌은 '정서적 토대'이다. 음악 미술과 같은 예술행위가 이에 해당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느낌은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낙수(樂受)'와 '고수(苦受)'와 '불고불낙수'이다. 즉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이다. 느낌에 관한 유명한 비유을 든다면' 첫 번째 화살을 맞을 지언정 두번째 화살은 맞지 말라' 일 것이다. 첫번째 화살을 맞았을 때 육체적으로 고통 스러운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정신적인 영역으로 까지 가져 갈 필요는 없다. 단지 "괴로움이 왔구나" 하고 알아 차리면 된다. 이러한 느낌은 모두 조건 지워져 있다. 일어 났다 사라지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조건에 따라 그 과보가 전달 될 뿐이다. 따라서 느낌은 무상한 것이다.
산냐(sanna)
상을 빨리어로 '산냐(sanna)'라 한다. 수가 정서적토대를 말한다면, 상은 '인식의 토대'를 말한다. 즉 지적인 토대이다. '철학' '사상' '이념' 같은 것이 인식에 해당 된다. '생각' '고찰' '지혜' '무명' 역시 인식의 토대이다. 그런데 인식에는 '버려야 할 인식'과 '닦아야 할 인식'으로 나눌 수 있다. 버려야 할 인식은 무엇인가 그 첫번째가 '희론'하는 인식이다. 즉 머리를 굴려서 인식 하는 것이다. 두번째가 전도된 인식이다. '상락아정'과 같은 것이다. 이 것은 '무상 고 무아'에 위배 되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의 열반경에서 말하는 상락아정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다음으로는 닦아야할 인식은 부정관, 죽음관, 음식혐오, 기쁨이 없음, 무상, 고, 무아이다.
여기에서 버려야할 인식으로서 희론 하는 인식과 닦아야 인식으로서 '음식혐오'는 다음과 같은 숫타니파타의 게송에 잘 나타나 있다.
81. 그러나 스승은 바라드바쟈에게 이렇게 말했다:
시를 읊은 그 대가로 얻은 음식을 나는 먹지 않겠다.
오, 바라드바쟈여, 이것은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시를 읊은 그 대가로 얻은 음식을 거절하는 것은
모든 깨달은 이들의 생활태도다.
78. 몸을 삼가고, 말을 삼가고, 음식을 절제하는 것,
그리고 말없이 진실을 지켜가는 것,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소를 멍에에서 때어 놓는 일이다.
상카라(sankhra)
행을 빨리어로 '상카라(sankhra)'라 한다. 오온에서 행은 '심리현상들'을 말한다. 여기에는 앞서의 '수'와 '상'도 포함된다. 이런 심리현상들을 모두 합치면 52가지가 된다. 그러나 수와 상을 별도로 설명하면 50가지가 된다. 그렇다면 상에 해당하는 빨리어 상카라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를까. 상카라를 크게 3가지로 나눈다.
첫째가 오온의 행의로서의 심리현상들이다. 여기서 복수로 쓴 이유는 심리현상들이 50가지나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유위법으로서 행이다. 대표적으로 제행무상을 들 수 있다. 제행무상은 열반을 제외한 모든 유위법을 말한다. 그때의 행이 유위법으로서 행이다.
셋째로 의도적인 행위를 말한다. 12연기가 좋은 예이다. 12연기에서의 행은 의도적인 행위를 말하고 업이라고도 말한다. 따라서 업은 의도가 개입된 행위라 볼 수 있다.
윈냐나(vinnana)
마지막으로 식(識)이 있다. 식은 빨리어로 '윈냐나(vinnana)'라 한다. 그런데 식과 유사한 말이 심(心)과 의(意)가 있다. 빨리어로 심은 찌따(citta)이고, 의는 마노(mano)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불교의 마음 만능주의
한국불교는 마음 만능주의라 한다. 마치 마음이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처럼 말한다. 이 세상도 다 마음이 만들어 냈다는 일체유심조와 같은 사상이 대표적일 것이다. 이것을 보면 유일신교의 절대자가 이 세상을 창조 하였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의 마음의 속성은 '찰라생 찰라멸'이다. 그리고 주어진 조건에 따라 '상속' 할 뿐이다. 초기불교를 모른다는 것은 기초가 없는 것과 같다. 한국불교는 아비담마와 같은 논장이 없기 때문에 기초가 없는 불교와 같고 응용불교만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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