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목소리로]기쁨의 종류
인생이 존재론적으로 슬픈 것이라 하더라도, 인간은 매 순간 기쁨을 추구하고 지향한다. 몸과 마음이 늙어가면서 기쁨에 대한 동경마저 사그라지면 노욕만이 남아 추한 노인으로 전락한다. 영혼은 나이가 없고, 매일 기쁨으로 잠을 깬다. 기쁨은 무엇보다도 누군가와의 상대적인 차별화 내지 차등화에서 내가 낫다는 우월감을 바탕으로 발생한다. 그럴 때, 기쁨은 인간의 마음에 즐거움을 상으로 준다.
우월감·동질감 때 느끼는 기쁨
내가 좀 더 멋있고, 좀 더 부자이고, 좀 더 재주가 있고, 좀 더 똑똑하고, 좀 더 승진을 빨리 하고, 좀 더 좋은 것을 가졌고 등등. 이런 일상사의 기쁨은 경쟁, 우수, 빠름이라는 본성을 담는다. 그러나 흥분과 충족감, 성취감을 주는 이러한 기쁨은 상대적이라는 속성 때문에 수많은 부러움과 시기, 질투를 동반할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이 그 즐거움을 점차 허무함으로 이끌어간다는 데서 본질적으로 소멸성을 지닌다. 그래서 이런 기쁨은 기쁨의 순간에 이미 그 기쁨과 공존을 시작하는 슬픔의 이면을 담는다. 그런 의미로 기쁨과 슬픔은 같은 순간에 태어난다.
누군가와 내가 동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가면서 생겨나는 기쁨도 있다. 나의 행실이나 모습과 붕어빵처럼 닮아있는 녀석이나 가족, 후배를 만날 때, 손에 손을 잡고 한 덩어리가 되어서 노래를 부를 때, 내가 좋아하는 색과 멋, 맛, 심지어는 고통과 슬픔까지도 같이 느껴주고 좋아해주는 사람을 만날 때, 누군가와 같은 종류의 피와 땀을 흘리면서 뭔가를 이룩해냈을 때 우리는 동질감과 연대감을 느끼고 기쁨에 벅차 마음이 뿌듯해진다. 이런 기쁨은 함께 흘리는 눈물과 슬픔 속에서도 피어날 수 있다.
이런 기쁨은 공감, 다양성, 나눔을 바탕으로 한다. 이런 기쁨은 친구와 동료, 그리고 소속감을 만들어내고 차별화에서 오는 기쁨보다는 조금 더 긴 시간 동안 이른바 ‘보람’으로 남는다.
차별화와 동질감을 뛰어넘는 기쁨도 있다. 조용한 관조의 기쁨이다. 이는 기나긴 인류의 역사 안에서 인간이 살아왔던 의미들을 단순하게 꿰뚫어보는 통찰의 기쁨이고, 두려움 섞인 은밀한 기쁨도, 그렇다고 희망 섞인 은밀한 슬픔도 없이 내 인생 안에 새겨진 삶의 의미들을 바라보는 기쁨이며 직관의 기쁨이다. 이런 기쁨은 깊은 눈에서 비롯되고 일희일비하지 않는 노숙함과 영원성이라는 꿈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런 기쁨은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고, 두려움 없이 그분을 차지하고 맞으려는 순간에 완성된다. 인생이 누군가로부터 주어진 것이었으며 우리가 해야 할 바는 오직 그 주어짐 안에서 성실한 선택이었을 뿐이라는 깨달음에서 온다. 그래서 이런 기쁨은 우리 인생이 우리 마음의 선택이라 가르치고 일상 안에서의 발견이라고 깨우친다.
그것을 뛰어넘는 ‘관조의 기쁨’
비가 몇 번 오고 가더니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하다. 밤 사이에 몇 번이고 깨어야만 했던 날들이 그러지 않고도 지낼 수 있는 날들로 어느새 바뀌었다. 내 세상인 양 버티고 앉아 가기 싫어하던 여름도 어디선가 조금씩 밀어대고 야금야금 먹어 들어오는 찬바람의 힘과 계절이라는 섭리의 도도함은 견딜 수 없나보다. 더위가 한 풀 꺾였다. 여름 입장에서는 패한 것이고 기가 꺾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막 새로 온 이 계절도 조만간 다음 계절에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생명의 짙푸름도 갈색의 무게와 중후함에 밀려날 것이고 그 갈색마저도 회색빛과 싸늘함의 바람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나도 가고 너도 갈 것이며 우리 모두 밀려오는 다음 세대에 몰려 어느 한 쪽으로 밀려나게 마련이다. 세월이 가면서 이렇게 꺾이고 약해져 가는 것과 잃어가는 것만을 생각하면 서글퍼진다.
떠나가고 잃어가는 세월 속에서 내가 얻어야 하는 것은 무엇이고, 또 실제로 얻는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릴 수 있어야만 우리는 공허해지지 않는다. 내 인생 안에 도대체 무엇이 예정되어 있고, 그 인생이 어떻게 마감될지는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 인생 안에 조물주가 어떤 의미를 새기려 했는지는 조금이라도 깨우칠 수 있는 기쁨을 얻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김건중|살레시오수도회 신부>
출처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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