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적 교판을 넘어서자
한국불교의 과제나 문제점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제도나 형식의 측면에서 문제점을 지적하곤 한다. 종단운영이나 교육제도 포교시스템 등에 문제가 있어서 서구종교의 도전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외형적인 것에만 분석의 렌즈를 갖다댄 결과다. 관점을 조금만 내용적이고 본질적인 것으로 옮겨서 살펴보면 더 심각하고 복잡한 문제가 있다. 교리사상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 또는 해석상의 불명료성에 따른 신행상의 혼란이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어 대승경전은 다불다보살(多佛多菩薩)을 내세우며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실재하는 존재로 믿고 이를 전제로 신행할 것을 강조한다. 근래에 붐을 이루는 지장신앙이나 약사신앙도 이 범주에 속한다. 그렇지만 현대의 불교학은 관세음보살이 힌두교의 시바신이 불교적으로 전화한 것이며, 타방불은 인도종교의 범신론과 유관하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또한 대승불교 이후 생성된 타력적 신행체계는 방편적 가설이라는 해석이 상식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정보가 공개된 상황에서 관세음보살이나 서방정토의 실재를 믿으라고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지금까지 대승경전을 중심으로 공부해온 한국의 불교도들은 이 질문 앞에 머리가 복잡하다못해 터질 지경이다. 이는 과거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문제들이다.
한국불교가 이렇게 사상적으로 혼란에 봉착하고 있는 것은 이미 폐기처분된 이론인 중국적 교상판석(敎相判釋)에 의지하고 있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교상판석이란 중국의 종파불교가 입교개종의 근거로 모든 경전에 우열심천의 가치를 부여한 교학적 작업의 성과다. 여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중국불교는 전역(傳譯)시대를 거치면서 대소승 경전이 동시에 번역되었다. 그 중에는 불교의 원초적 목소리를 담은 경전이 있는가 하면, 초기불교를 소승이라고 비난하면서 발달된 교리와 새로운 사상을 주창하는 대승경전이 포함돼 있었다. 모든 경전을 부처님의 친설이라고 믿었던 당시로서는 어째서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그러자 중국불교는 종파적 입장에 따라 경전의 우열심천을 분류하는 교판을 세우기 시작했다. 징관의 화엄교판과 지의의 천태교판이 그것이다. 이중 후세까지 절대적 영향을 미친 것은 지의의 오시교판이다.
오시교판은 모든 경전을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그것을 시간적으로 재배치한 것을 말한다. 즉 부처님이 정각을 성취한 뒤 삼매에 들어 <화엄경>을 설했는데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단계를 낮추어 <아함경>을 설한 뒤 차례로 <방등경>과 <반야경> 그리고 최후에는 <법화경>과 <열반경>을 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교판은 수많은 경전을 독자적 사상체계로 분류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업이지만 사실에 기초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허구다. 대승경전이 대승적 자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찬술(撰述)'된 것임에도 이에 근거한 타력적 신행체계를 내세우는 것 역시 부처님의 생각과는 일정한 간극이 있다.
현재 한국불교에서 혼란이 생기고 있는 것은 이점을 외면한 채 과거의 교리해석 방법을 그대로 고수하기 때문이다. 일반사찰은 말할 것도 없고 불교를 학문적으로 연찬하는 교육기관이나 학자들조차 아직까지 중국적 교판에 의한 교리해석과 이를 근거한 신행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유하면 지동설이 사실로 밝혀졌는데도 계속 천동설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
아무리 강변해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한국불교는 이 사실을 빨리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선량한 불자들만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게될 뿐이다. 가설이 아닌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올바른 교판을 확립하는 일은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과제다. 현재와 같은 사상적 신행적 혼란을 그대로 방치하면 배를 산으로 끌고 가는 사태가 생길지 모른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출처 홍사성의 불교사랑 http://cafe.daum.net/hongsa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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