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길 기독교의 길
모든 종교는 인간의 불안과 고통을 구제하려는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목적을 갖는다. 그러나 고통의 실체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고통에서 해방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각각 실천하는 방법이 다르다.
불교에서는 고통의 발생원인을 인간의 집착과 욕망에 있다고 본다. 고통을 반복시키는 윤회의 원인은 집착과 욕망이라고 말한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이 같은 사실을 바르게 인식하고 스스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 뿐이다. 물론 집착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기를 다스리는 수행을 통해 바른 지혜(般若)를 획득하라고 가르친다. 이 지혜의 획득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이 깨달음을 이루어 바른 생활을 해야 고통의 윤회를 반복하지 않는다. 이것이 해탈이고 열반이다.
경전에는 부처님의 이 같은 가르침에 의해 해탈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수없이 많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극적인 일화는 <현우경>에 나오는 과부의 이야기다.
사밧티성에 고타미라는 과부가 있었다. 그녀는 외아들을 애지중지 키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들이 죽고 말았다. 과부는 슬픔에 빠져 많은 현자들을 찾아다니며 죽은 아들을 살려낼 방법을 물어보았다. 그러나 누구도 죽은 아들을 살려낼 수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부처님을 찾아갔다. 부처님은 수척한 몰골로 찾아온 과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삼대동안 상여가 나가지 않은 집에서 겨자씨를 얻어 오라. 그러면 아이를 살려주리라.”
그녀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겨자씨를 구했다. 하지만 삼대동안 상여가 나가지 않은 집은 없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헤매는 동안 그녀는 누구나 태어나면 죽으며, 한번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시 부처님 앞으로 돌아올 때쯤에는 슬픔도 사라지고 차차 제정신을 찾았다. 그녀는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이에 비해 기독교의 방법은 불교와 매우 대조적이다. 집착과 욕망을 제거함으로써 고통의 굴레에서 해탈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 능력과 기적을 행사하는 신에게 기도하여 구원받는 방식이다. 우선 기독교는 고통의 근원을 원죄에서 찾는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무화과열매를 따먹으면서 인간의 고통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원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신에게 구원을 비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마태복음> 8장2절에서 9장34절까지에는 예수가 문둥병과 중풍을 치료하고, 벙어리는 입을 열고 소경을 눈뜨게 하는 기적을 행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가하면 15장38절에는 떡 다섯 개와 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배부르게 먹였다는 기록도 있다. 신의 권능을 믿고 회개했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신유(神癒)의 기적을 믿으며, 그 기적을 위해 기도에 매달린다. 기도가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고 믿는 것이다.
불교의 방법과 기독교의 방법은 이렇게 다르다. 어떻게 보면 불교는 합리적이고 냉정한 반면, 기독교는 비합리적이며 온정적이다. 여기서 어떤 방법이 더 훌륭하고 종교적인가를 따지는 것은 나중 문제다. 다만 한가지 분명히 할 것은 불교를 믿는다면 불교적 가르침에 충실해야 하고, 기독교를 믿는다면 기독교적인 방법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종교를 믿든 자기 종교의 가르침에 충실한 것이 성실한 태도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자들 가운데는 불교를 믿는다면서 기독교적인 기적과 구원을 바라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불자가 기독교적 가르침에 빠져 부처님의 가르침을 외면한다면 정법이 설자리가 없어진다. 정법이 쇠미해지면 어떤 외형적 팽창도 무의미하다. 진실로 걱정되는 대목은 바로 이점이다.
출처 홍사성의 불교사랑 http://cafe.daum.net/hongsa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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