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착한 글들

경허선(鏡虛禪) 다시보기

slowdream 2009. 1. 20. 03:36

경허선(鏡虛禪) 다시보기
변희욱 서울대 철학과 강사
[36호] 2008년 10월 10일 (금) 변희욱 hwbyun63@yahoo.co.kr

1. 경허의 선을 어떻게 볼 것인가?

경허는 수선결사(修禪結社)를 펼쳤으면서도 어느 대목에서는 참선이 필요 없다고 했으며, 강원을 폐쇄하고 일념으로 선에 집중했으면서도 선 수행의 길잡이 책 󰡔�선문촬요(禪門撮要)󰡕�를 편찬했다. 또 청규(淸規)를 제정하고 지계(持戒)를 요구했으면서도 스스로 계율을 어기고 계율을 초월할 것을 주문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화두를 타파했다고 자부한 연후에, 보기에 따라서는 의심스러운 언행을 하기도 했고 철저히 자유롭게 노닐기도 했다. 과연 경허 선의 본질은 어떠할까?

대부분의 연구는 경허가 한국 불교계에 끼친 의미에 주목하여, 경허 선의 불교사적 의미를 발굴해 왔다. 이능화(李能和, 1869~1945)는 경허의 영향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이능화의 평가는 이후 비판의 근거로 제시되곤 한다. 반면 만해(萬海, 1879~1944), 권상로(權相老, 1879~1965), 고익진(高翊晋), 김지견(金知見)은 경허를 추숭조로 평가했다. “근대선의 중흥조”라는 찬사는 이런 평가의 일환이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경허 선을 학문의 영역으로 견인하는 데에는 무시하지 못할 성취가 있었고, 몇몇 소주제에는 전문적인 성과가 있었다. 이런 작업에는 경허의 선을 대중에게 소개함에 일조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음에도 무엇인가 해명하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함께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런 연구 경향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하여, 조사선에 입각하여 경허의 선을 음미해 볼 것이다. 나아가 경허의 선을 소재로 선과 관련된 여러 쟁점을 조망해 볼 것이다. 왜냐하면 경허는 임제정종(臨濟正宗)을 이었다고 자부했고 본래면목을 강조했으며, 󰡔�육조단경(六祖壇經)󰡕�과 󰡔�대혜어록(大慧語錄)󰡕�, 󰡔�선요(禪要)󰡕� 등의 조사어록을 자주 인용했기 때문이다.

2. 수행?

경허의 선을 통해서 생각해 보아야 첫째 문제는 ‘왜 수행해야 하나?’이다. 경허의 선에서 수행은 필수적일까?

경허는 33세 때 <깨달음의 노래(悟道歌)>를 불렀다. “나의 본래면목을 깨닫고 보니, 이름도 공하고 형상도 공하여 텅 비고 고요한 가운데 항상 빛나더라. 이로부터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달아 눈앞은 외로이 밝은 적광토요, 정수리 위는 금강의 세계며, 사대 오음은 청정한 법신이다. ……눈에 마주치는 것마다 본래 천진면목이니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이 대목의 주제는 ‘본래면목’과 ‘공’이다. 다름 아닌 ‘견성성불(見性成佛)’,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어서, 육조 혜능(638~713)의 테제와 같다.

경허는 51세 때부터 해인사에서 결사를 펼쳤고 선원을 개설하기 시작했다. 이후로 20여 년간 영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범어사, 화엄사, 송광사 등 전국의 주요 사찰에 선원을 창설하고 청규를 제정하면서 선풍을 진작시켰다. 경허가 간화선을 수행했으며 선수행 권면에 정성을 쏟았음에 틀림없고, 현재 남아 있는 선원 대부분은 그의 노력에 힘입었다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가 경허가 결사를 펼쳐 한국 선불교를 중흥시켰다는 점을 주목했다. 선원 개설과 결사 운용이 경허 선의 본질일까?

문제는 이제부터다. 경허가 선원을 개설하고 수선 결사를 운용한 것은 틀림없는데, 그가 부른 본래면목은 어찌 된 것인가? 경허가 말하듯이, 성격상 본래면목은 수행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고, 본디 그러하다. 본래면목을 이미 지녔다면 그것에 다가섬도 다가선다는 발상도 필요하지 않으며, 표현상 ‘참선’이니 ‘수행’이라 쓴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본래면목의 발현이고 스스로에 연유한 것일 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참선을 포함한 수행은 본래면목에 위배되며, 머리 위에 머리를 얹어 놓은 격이기 때문이다. 본래면목에 충실하다면 경허가 겪었던 일련의 노력 들, 예컨대 화두 참구와 보림행 그리고 그의 수선 결사는 하지 않아도 좋은 것(하지 않아야 할 것)이었다. 이런 해석이 타당하다면, 경허의 공부 과정이나 <오도가> 이후의 행적은 설명하기 곤란하다. 경허가 표방하는 본래면목의 실현과 간화, 보림, 결사를 위시한 그의 행적에는 논리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긴장이 있다.

이런 긴장에 접근하는 현실적인 길머리는 그의 상황판단이다. 경허가 보기에 어느 누구도 본래면목을 구현하지 못했으며, 본래면목을 구현하지 못했다는 인식마저 없었고, 부족한 존재로서의 자기 인식에 이어지는 현황 타파는 결여되었다. “이제 와서는 정법(正法) 보기를 흙덩어리와 같이 하며,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계승하기를 아이 장난과 같이 여기고, 심지어는 서로 반목하고 질투하기도 하며 나아가 아집과 권력을 위하여 못하는 짓이 없을 정도로 썩어 문드러졌다. 슬프도다. 뒷사람이 비록 정법안장(正法眼藏)의 설법을 듣고자 한들 누구에게 듣겠는가?”라는 경허의 말은 이런 의미이다. 그런데 경허의 판단은 특수한 경우에 국한된 것일까? 실상 조사들은 한결같이 본래면목을 말하면서도 대중들의 중생 모습에 안타까워했다.

이제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두 가지다. 첫째, 본래면목이라는 선언적 원리에 충실히 따른다. 둘째, 원리를 실현하기 위해, 일단 원리를 위배한다. 첫째 경우에 따른다면, 마조(馬祖, 709~788)와 같이 수행 불필요 노선에 서야 한다. 둘째 경우에 따른다면, 수행을 요구해야 하며 교육을 중시하는 입장을 취한다. 궁극적으로 말한다면 부처는 쓸데없이 꽃을 들었고 가섭은 웃지 않아도 좋았다.

조금 양보해서 교육과 수행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고 해도, 교육은 스스로 실마리를 찾도록 자극을 줌에 그쳐야 하며 수행은 자발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 선의 역사에는 어떤 경우 일정 정도의 인위와 강제가 따르기도 했다. 이런 태도의 결정체가 바로 결사이다. 이런 의미에서 결사의 정신은 자발성에서 우러나온 인위이며, 인위를 지속하기 위한 자발적인 강제이다. 극단적으로 보자면, 결사란 철저히 인위적인 과정이며 원리에 대한 집단적 위배일지도 모른다.

경허는 본래면목이라는 선언적 원리와 그가 본 현실 사이에 내재한 긴장을 어떻게 해소했을까? 그는 “무릇 참선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자기 안쪽을 돌이켜 비추고 그 주인공을 명백히 보아서 바깥의 잡다함에 끄달리지 않고 생사에 뒤바뀌지도 않아서, 뚜렷하고 명백하며 평온하여 얽매임도 해탈도 번뇌도 열반도 아닌 것이다. 하루 종일 옷을 입었어도 일찍이 한 올의 실도 걸친 적이 없고 하루 종일 밥을 먹어도 한 알의 곡식도 씹은 적이 없다.”라 했다. 이와 같은 선 수행의 성격 규정에 해결의 실마리가 있다.

그가 제안하는 원리와 현실과의 긴장 해소 방안은 좌선과 같은 형식과 의례로서의 선이 아닌 “본래의 참마음 지키기”이다.

수행에 대해서는 “하루 종일 밥을 먹어도 곡식 한 알도 씹은 적이 없음” 즉 수행했어도 수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성격을 부여했다. 왜냐하면 “벗어나야 할 생사도 없고 증득해야 할 열반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마음대로 움직여도 인연에 따라 걸림이 없이, 모든 것이 진실하고 분명한 본래면목이며”, 수행해서 억지로 분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있던 것이기 때문이다.”

혜능은 특별한 행위나 수행으로서의 선정을 요구하는 대신, 본성 통찰 즉 “본래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게 함[禪]”, “밖으로 모양을 떠나고 안으로 어지럽지 않게 함[禪定]”을 제안했다. 경허가 말하는 선은 혜능의 그것과 같다.

원론적으로 말한다면, 완전한 상태로 전이하려는 어떤 노력도 무의미하며, 노력하면 할수록 본디 완전한 상태임을 위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의 노력은 필요 없을까? 조사들은 이 문제에 대해 해결법을 알려 주지 않고, 대신 앞뒤가 꽉 막힌 질문을 던진다. 그것이 선문답이고 배촉관이며, 선문답과 배촉관의 정신이 응축된 것이 화두이다.

경허는 임제종의 조사와 같이 배촉관을 활용했고 외마디 소리로 제자의 각성을 요구했으며 간화를 권면했다. 그 자신 역시 영운지근(靈雲志勤, 771~853)의 ‘여사미거 마사도래(驪事未去 馬事到來)’ 화두에 전념했으며,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데가 없다.’라는 말을 듣고 바로 깨쳤다. 그는 의심, 믿음, 의지가 공부의 필수요소라 했으며 행주좌와 언제나 간단없음, 오롯이 깨어 있으면서 고요함(惺惺寂寂)을 요구했다. 이는 대혜(大慧, 1089~1279)와 고봉(高峰, 1324~1396)이 요구한 간화의 요소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경허의 선을 간화선이라 정리할 수 있다.

간화선의 종장들은 간화가 왜 필요한지를 절절하게 역설했고 간화와 본래면목의 관계를 분명하게 언급했다. 예를 들어 남북송(南北宋) 교체기의 대혜는 묵조선과 문자학습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간화를 누누이 강조하면서 간화야말로 본래면목을 확인하는 첩경이라 했다. 대혜가 제안한 간화는 선과 유학을 포함하여 일체의 정신과 관련한 수련(혹은 학문)을 바로잡기 위한 결정판이었다.

또 송원(宋元) 교체기의 고봉은 간화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면서도 간화마저 부차적인 것이라 했다. 고봉이 내세운 간화는 본래성불을 순간적으로 깨치지 못한 이들이 본래면목에 접근하기 위한 충격적인 방안이었다.

경허의 간화선에 주목하는 연구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가 간화선을 언급하는 대목에 그리 특색 있는 내용은 없으며, 그가 간화를 구체적으로 말하는 대목은 그리 자세하지 않다. 실제 경허가 학인들에게 전한 법문이나 거량에 격외지를 던진 기연이 있었다면, 그의 간화선을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문헌에 남아 기록에는 다른 조사어록에 비해 격외지의 기연이 많지 않다.

물론 경허의 선을 간화선이라고 성격 지울 수 있고, 많은 연구에서 밝혀냈듯이 경허가 조선 대에 명맥이 거의 끊어졌던 간화선의 전통을 부흥했다고 평가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위와 같은 사정에서 경허의 선에 내재한 간화선의 성격을 심도 있게 논의하기는 어려우며, 그의 간화선이 특징적이라거나 선대의 그것에 비해 문제의식이 투철하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3. 선교일치(禪敎一致)?

‘교학으로 선의 경지를 증득할 수 있을까?’ 질문을 완화시켜 ‘교학은 경지 체득에 도움이 될까?’라 물어볼 수도 있다. 범위를 축소하여 ‘경허의 수행론은 선교일치인가?’라 물어볼 수도 있다.

먼저 경허 자신의 이력을 보자. 그는 교학과 유학경전, 노장전적을 학습했다. 그 후 강원을 열고 강사로 이름을 떨쳤다. 어떤 계기로 그간 공부하고 강의했던 경전의 구절은 사구(死句)에 불과함을 알고서 강원을 폐쇄하고 화두(‘나귀의 일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말의 일이 이르렀다’)를 참구했다. 교학에서 선으로 전향한 것이다. 그의 이력은 '사교입선(捨敎入禪)'이란 용어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러다가 경허는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데가 없다.’라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대오했다고 하니, 이른바 “언하대오(言下大悟)”이다. 일단 대오의 임계점은 용맹정진이 아니라 한마디 말과의 만남이었다. 이는 혜능을 비롯한 조사들이 한마디 말 아래에 바로 깨쳤다는 경험과 같다.

만일 이렇게 해석한다면 이전의 교학학습이나 화두참구는 대오와 관련 없게 된다. 이렇게 생각할 경우, ‘순간 깨침’만을 선의 길로 채택하게 된다.

만일 이전의 용맹정진이 있었기에 한마디 말 끝에 알아차렸다고 판단한다면, 화두참구를 비롯한 수행은 필수적이거나 최소한 유용한 것이 된다. 이렇게 생각할 경우, 깨침 이전의 수행을 인정하게 된다. 현재 한국의 선방에서 진행되는 안거의 모습은 이런 노선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더욱이 교학학습이 있었기에 어떤 계기를 만나 대의를 붙잡을 수 있었다고 해석한다면, 교학은 대의 파악에 유용하거나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 어떤 경우에는 교학으로 불법의 대의를 체득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학계에서는 “선교일치”라 일컫는다. 조금 양보해서 교학이 대의 파악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역시 교학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선교일치라 할 수 있다. 적지 않은 수좌들이 간화를 하면서도 교학을 학습했거나 학습하고 있는 바탕에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런 생각이 일부 깔려 있다. (물론 어떤 수좌는 논자의 해석과 생각을 달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판단하면 이렇다는 의미이다.)

문제는 경허가 염화시중의 뜻을 알아내고 조사의 문을 돌파하기 위해 결사를 운용하면서도, 장경(藏經)을 간행했고 책을 엮었다는 점이다. 강원을 폐쇄하고 선 수행 결사를 운용했던 경허는 교학을 버렸을까? 그가 엮었다고 알려진 책이 󰡔�선문촬요󰡕�이다. 󰡔�선문촬요󰡕�는 선가의 핵심 문헌을 두 권의 책으로 모은 것으로, 상권에는 달마(460~532/534)의 《혈맥론(血脈論)》․《관심론(觀心論)》․《이입사행론(理入四行論)》을 비롯한 중국의 조사어록을 모았고, 하권에는 지눌(1158~1210)의 《수심결》․《진심직설》․《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등 한국의 선 어록을 수록했다. 경허는 선 수행의 지침서를 편찬한 셈이니, 교학을 버리고 선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문헌 학습의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크게 본다면 경허의 수행 노선에는 부처의 말과 뜻이 같지 않을 수 없다는 신념이 깔려 있는데, 이는 종밀(宗密, 780~841), 지눌과 다르지 않다. 바로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많은 연구가 경허의 선을 “선교일치” 혹은 “선교불이(禪敎不二)”로 정리했다.

경허는 󰡔�선문촬요󰡕� 서문에서 경전은 보통의 대중을 위한 것이고 게송은 수승한 근기를 위한 것이라고 하여, 근기설을 수용했다. 경허의 표현대로라면 󰡔�선문촬요󰡕�는 “상근기를 위해” “핵심을 찌른 어록과 염송 그리고 선지식들의 직절법문을 모은” 책이다. 경허가 선별한 글에는 논리적인 교학 문헌은 포함되지 않았고, 선 문헌- 조사어록의 법문과 게송만 발췌되어 있다.

종밀은 교학 경전과 선의 제 분파를 대응시키면서 교학 학습을 통해서도 불교의 이치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으며, 부처의 말 즉 경전과 부처의 뜻 즉 선이 다르지 않다는 전제하에, 교학학습 이후의 선 수행을 요구했다. 경전의 문구는 논리와 사변으로 그 뜻을 이해해야 하는 데 비해, 게송은 논리와 사변을 정지시켜 그 격식 밖의 취지(格外旨)를 파악해야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경허의 선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경허는 교학을 인정했다기보다는 선지식의 구체적인 체험과 그 기록에서 통찰할 것을 주문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경허가 문자(특히 조사어록) 학습을 용인(채택)했다고 해서, 경허의 선을 단순히 선교일치로 성격 지울 수는 없다.

교학학습이 선의 경지 체득에 필요하고 정당할까? 실참 선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까? 선사 고우(古愚)의 생각을 요약하면 이렇다. “뱀이 물을 먹으면 독이 되고, 소가 물을 먹으면 우유가 된다는 말이 있다. 공안집은 조사 스님의 법문인데, 우리는 법문을 거부하지 않는다.

조사어록이나 공안집은 법문이기 때문에 보아야 한다. 책을 잘 보면 공부에 도움이 되지만, 잘못 보고 잘못 이해하면 물이 뱀의 독처럼 되는 것이다. 문제는 책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마음이다. 또 화두가 잘되는 사람은 어록 갖다 놔도 읽을 생각 안 한다. 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공부가 잘 안 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경전이고 어록이다.”

고우의 이 말은 시사하는 점이 크다. 기본적으로 조사선 전통에서는 경전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경전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문제 삼는다. 일찍이 임제(?~866)가 천명했듯이, 조사의 말이든 문자 기록이든 외부에 의존하는 공부는 쓸모가 없다. 그러나 스스로의 공부에 전일하지 못하다면, 외부를 활용하는 공부는 방법상 허용된다. 즉 선 수행에 있어 문자 학습은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지만 배척의 대상도 아니라는 것이다. 또 사구가 될지, 활구가 될지의 관건은 문자에 있지 않고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다.

선교일치 여부를 따지기 이전에, 경허의 선과 교에 관한 궁극적인 생각은 어떠할까? “불조가 선과 교를 설한 것이 특별한 게 무엇이었던가. 분별만 냄이로다. 석인(石人)이 피리 불고, 목마(木馬)가 졸고 있음이여. 범부들이 자기 성품을 알지 못하고 말하기를 ‘성인(聖人)의 경계지 나의 분수가 아니다.’라 한다. 가련하구나.” 경허가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바는 이것이다.

4. 돈오점수(頓悟漸修)?

‘깨달음 이후에 남는 것이 있나?’ 이른바 돈오점수, 보림(保任)과 관련한 문제로, 성철(性徹, 1912~1993)이 제기한 문제도 크게 보아 이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경허는 대오 이후 경진년(32세)에 연암산 천장사(天藏寺)에서 보림했다. 왜 보림이 필요하며, 누구에게나 보림이 필요할까? 경허의 설명은 이렇다. “돈오함은 부처와 같으나, 오랫동안 쌓인 습기는 생생하다. 바람이 잠잠하나 파도는 아직 일렁이듯, 이치가 분명해도 생각은 일어난다.” 이런 설명은 종밀, 지눌의 설명과 같다. 그는 또 말한다. “그 근기가 뛰어난 자는 한 번에 곧바로 들어가서 요체를 파악하여 마음을 안정시킨다. 어찌 다른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근기가 낮은 자는 한꺼번에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옛사람은 말했다. ‘대나무 순이 결국 대나무가 되겠지만 당장 뗏목을 만들 수 있겠는가?’ 근기가 낮은 자는 오래 익혀야 결국 들어갈 수 있다.”

대나무 순도 대나무로 성장할 본성을 가졌으니 이미 대나무라고 생각한다면, 이후의 어떤 과정도 필요하지 않게 된다. 이 경우 경지에 이른 후에는 수행이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에 서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수행 불필요론으로 귀결된다. 반면 대나무 순은 대나무로 성장할 가능성을 지녔으나 아직은 온전한 대나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보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경우 수행이 요구되고, 나아가 경지에 이른 후에도 그 상태를 보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게 된다. 경허의 이런 말은 종밀과 지눌이 제시했던, ‘바람이 그쳐도 파도는 아직 그치지 않는다.’라는 예와 같은 의미이다. 현실적으로 근기의 차이를 인정하여 노력이 필요하다는 입장은 돈오점수의 노선에 서게 되며, 경허는 이런 길을 제시했다.

돈오 이후의 수행을 요구하는 돈오점수 노선은 돈오 이후에도 남는 것이 있음을 전제한다. 그 이유를 ‘습기(習氣)’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습기가 있다는 것 역시 불완전함을 반증한다. 본래성불의 견지에서 보자면 습기는 있지 않으므로 보림은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보아야 한다. ‘돈오점수를 실천하고 천명했던 경허는 틀렸을까?’ ‘왜 경허는 그리했을까?’ 본격적인 의문은 이제 시작이다.

5. 파계(破戒)? 본지풍광 자유자재(本地風光 自由自在)?

‘오후(悟後)에도 계율은 필요한가?’ 혹은 ‘오후의 상태를 상식의 잣대로 평가할 수 있나?’ 이 문제에 관해 평가가 극명하게 두 가지로 갈린다. 그 하나는 “막행막식 파계행(莫行莫食, 破戒行)”이라는 평가이고, 다른 하나는 “본지풍광 보살행(本地風光, 菩薩行)”이다.

먼저 “막행막식, 파계행”이라는 견해를 보자. 당시 불교계는 경허의 행위를 비판적으로 여겼다. 이능화는 근대 이후 선가에 경허의 행적과 유사한 일이 빈번하게 생겼던 까닭을 경허의 탓으로 돌렸다. 당시 그의 제자 만공(1871~1946)과 한암(1876~1951)은 경허의 행적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기록했다. 만공은 “올바름은 부처를 능가하고 악함은 호랑이를 넘어섰던 이/ 경허선사로다.”라 했으며, 한암은 “뒷날의 공부하는 이가 스님의 법화(法化)를 배우는 것은 옳으나 스님의 행리(行履)를 배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이런 관점은 ‘법화와 행리의 분리’로 요약할 수 있는데, 몇몇 연구가 이런 평가 기조에 따라 법화와 행리를 나누어 평가했다. 일견 수긍이 가기도 하지만, 이렇게 생각한다면 선의 원리와는 멀리 떨어지고 만다. 선사의 선과 생활, 법화와 행리가 분리될 수 있을까? 만일 분리되었다면 진정한 선이라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나누어 평가하는 것보다는, 파계했으므로 경허의 견처는 가짜임이 틀림없다고 밝히는 것이 선의 정신에 부합하며, 거침없는 표현이다.

그런 기조와는 다른 사례로 만해의 견해를 보자. “술집과 시정에서 큰 소리로 읊어도 세간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고, 비바람 눈보라 치는 텅 빈 산에서 붓을 잡아도 세간을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종횡으로 물을 뿌리고 그 물이 스며듦에, 낯선 것과 익숙한 것에 자유자재했다.” 이렇게 만해는 경허의 행적을 찬양했다. 따라서 만해에게는 경허의 선과 삶, 법화와 행리를 분리하여 평가할 필요가 없었다. 만해는 자신이 지향한 바와 같이, 경허가 세간과 출세간 그리고 낯선 것과 익숙한 것을 구분하지 않았으며, 언제 어디에서나 자유자재했다고 평가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경허의 행적은 경계를 허문 경지를 의미한다는 찬사가 이어진다. 김지견은 경허의 오후 행적을 “본지풍광”이란 말로 귀결했다. “본지풍광”이란 용어는 본래 완전성의 자연스러운 발로를 의미하므로 경허의 행적은 말 그대로 깨친 이후의 행적 즉 오후행이어서, 막행막식도 본래 청정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경허는 깨달음 이전의 수행자에게는 어떤 것을 요구했을까? 스스로 계율을 어겼거나 초월한 행적을 보인 경허는 절목을 세세히 세웠고 지계를 엄격히 요구했다. 1902년 범어사 결사에서, 경허는 청규를 제정하여 계율준수를 요구했는데, 음주와 음행을 특히 강조하여 경고했다. 청규는 일차적으로 “함께 정진하여 견성함”을 목적으로 하며, 청규의 세부항목은 모두 수행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위 글에 말하는 계율준수는 선 수행과정에 해당하는 조건이다. 경허는 본래성불을 구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과정으로서의 수행”을 요구했고, 또 수행을 위해 구체적인 절목을 제정하여 계율을 지킬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본래면목을 전제하는 조사선의 정신에서는 어떠할까? 경허는 󰡔�육조단경󰡕�을 인용하여 “마음 바탕이 텅 비어서 걸림 없음이 보시이고, 마음 바탕이 깨끗하여 더러움 없음이 지계이며, 마음 바탕이 고요하고 담박하여 시비 없음이 인욕이고, 신묘하고 고요한 이치를 간단없이 비춤이 정진이며, 툭 트여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없음이 선정이고, 밝게 꿰뚫어 슬기롭거나 어리석음도 없음이 지혜다.”라 했다.

󰡔�육조단경󰡕�에 근거하면, 신수(神秀, 606∼706)의 계에 관한 정의는 ‘악을 짓지 않음’인 데 반해, 혜능의 계에 관한 정의는 ‘마음 바탕에 의심과 잘못이 없음’이다. 나아가 혜능에 따르면, ‘자기 성품을 깨치면 계정혜도 세우지 않아야 한다.’ 혜능과 경허에 따르면, 지계는 설정된 계율에 대한 준수가 아니라 본디 청정한 성품 지키기이다. 따라서 혜능을 비롯한 조사선에 입각한다면, ‘계율을 세움’, ‘계율을 기준으로 판정함’은 부질없는 짓이다. 경허의 행적을 이능화나 일부 연구자와 같이 율장의 조항을 잣대로 한다면 경허의 행적은 파계행이겠지만, 경허 자신이 차용한 󰡔�육조단경󰡕�을 판단 준거로 삼는다면 파계행이라고 재단할 수 없다.
만일 다음의 논리가 있다고 하자.

A. 경허의 행적은 계율에 어긋났다.
B. 계율을 지키지 못한 것으로 보아 그의 행위는 완전하지 못하다.
C. 그의 행위는 완전하지 못하므로 그는 완전성을 실현하지 못했다.
D. 그는 완전성을 실현하지 못했으므로 그의 경지는 구경각이 아니다.
E. 구경각이 아니므로 그의 행적은 무애행이 아니라 파계이다.

일련의 주장은 A→ E→ A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순환 논법이며, 선행문제[A] 미결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그의 행적은 계율을 어긋났을까? 이 문제에 대답을 구하기보다는 “과연 그는 청정한 성품을 구현했을까?”라 질문하는 것이 󰡔�육조단경󰡕�이나 경허의 취지에 부합할 것이다. 결국 ‘그의 만년행이 파계행인가, 본지풍광 자유자재인가?’의 문제는 ‘그는 돈오했는가’의 문제로 치환된다.

6. 경허 선 다시 보기

경허의 행적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많지만, 이 주제에 관한 한 ‘분석자의 위상과 분석주제 문제’라는 난관이 있다. 홍곡(鴻鵠)이 아니고 경허의 견처를 체험하지 못한 상태이므로, “일 마친 이후”를 논구하기는 곤란하다. 그럼에도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여 분석할 수는 있다.

경허의 견처가 가짜라면 굳이 새롭게 논의할 가치가 없다. 경허의 선을 통해 생각해 볼 문제는 그가 선원을 개설하고 결사를 운용했다는 사실이나 한국 선을 중흥시켰다는 역사적 평가보다는, 그의 선의 성격이며 그것이 조사선에 부합하는지 여부이다. 《경허집(鏡虛集)》에 나타난 경허의 선을 일관되게 해석하자면 어찌해야 할까? 이 글은 이런 관점에서 진행되었으며, 경허의 선을 이해하는 하나의 해석을 시도해 본 것이다.

경허가 결사를 결행했고 결사문을 써서 수행을 권면했던 바는 사실이며, 언어를 통한 이치 체득을 강조했고, 이치 체득 후의 수행을 요구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경허의 진정한 뜻은 '함께 수행함'일까? 아마도 그가 수행을 요구했다면 방법상 그렇게 한 것뿐일 것이며, 우는 아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결사를 단행했고 수행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는 수행을 강조하기도 했지만 그가 궁극으로 말하려는 바는 교학학습도, 선 수행도 필요하지 않는 본래로의 회복이다. 경허의 선은 본질적으로 본래성불에 입각한다.

그러면서도 경허의 선은 수행론상으로 돈오점수라 정리할 수 있다. 돈오점수와 본래성불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이 문제는 본래성불이라는 원칙이 지니는 근본주의의 철저함과 그에 수반하는 현실적 설득력 부족, 그리고 수행이라는 과정론이 지니는 현실 적합성과 그 이면에 깔린 본질 훼손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 준다. 양측에는 주안점의 차이가 있다. 본래성불에 철저하다면 현실태는 본질태이고, 중생은 부처이다. 만일 현실과 본질 그리고 중생과 부처를 구분한다면, 그런 견해는 이분법에 빠진 사견이지 중도관이 아니다.

그렇다면 경허는 이분법에 빠진 것일까? 아직 중도를 체득하지 못하고 그런 말을 한 것일까?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보다는, 경허에게는 이분법 사유로의 전락이라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품어야 할 세계가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경허 자신이 경험한 중생의 현실에는 이념적 선언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고 보지 않았을까. 아마 현실의 중생 노릇이 애처로웠을 것이다. 시간의 격절을 넘어 고려대의 지눌이 돈오돈수를 염두에 두면서도 끝내 돈오점수를 버리지 않았던 까닭도 본래성불을 자각하지 못하는 인간, 그런 인간이 만연한 현실을 외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만년 행적이 오후 역행(悟後 逆行)이든 파계의 결과이든, 경허는 스스로를 낮추었다. 그는 일상사에 찌들고 내 것 만들기에 젖어 있는 뭇 보통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그들 속에 들어가 함께 했다. 그는 왜 낮추었을까? 본래 부처이지만, 현실은 부처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높이에 맞춘 것은 아닐까. 그 역시 진속불이를 외치면서도 산중 결사공동체에만 머물 수 있었지만, 진짜 진속불이를 몸소 감행한 것은 아닐까. 보통 사람이 사는 현실 세계에서 일상의 모습을 하면서 진리대로 살기를 택한 것이 아닐까.

현실과 '단절된' 도의 입장에서 보자면 산중에서 사방을 둘러보고 의발(衣鉢)을 전할 사람을 찾아야겠지만, 보통 사람이 부처라는 견지에서는 보통 사람이 사는 일상 현실에서 그런 사람을 찾아야 한다. 장삼이사가 도인이므로 그들이 도를 체득했다면 체득했으므로, 그렇지 못했다면 못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
많은 학자가 경허의 오후 행적의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본지풍광일까, 파계행일까? 관건은 계율 준수 여부가 아니라, 돈오 여부이다.

왜냐하면 이후의 행동이 본래면목의 작용이 아니라면 돈오와는 전혀 상관없기 때문이다. 청규와 계율이 의미 있는 단계는 과정에 있는 신분, 본래 청정성을 구현하지 못한 상태이며, 돈오의 경지 즉 “일 마친 이후”에는 계율이 무의미하다. 경허의 행적을 계율의 잣대로 측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계율은 돈오 이후의 기준이 아니라 돈오 이전의 기준이며, 오후행은 상식의 눈으로 따질 수 없다.

경허는 격식 밖의 뜻을 알아내고 격식을 초월한 삶을 살았을까, 아닐까? 이 문제는 결국 그가 격식 밖의 뜻을 알았는지 즉 돈오 여부와 관련되며, 돈오 여부는 학문의 영역이 아니므로 학문적으로 분석할 수 없다. 알음알이라는 비판을 무릅쓰고 경허가 던진 낙처(落處)를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여 따져 볼 수는 있다. 그의 견처가 진짜라면 그의 오후행에 어울리는 수식어는 '본지풍광 자유자재', '법신의 작용'이다.

마치 청정한 거울은 자기 색이 없기에 푸름도 검정도 가리지 않고 모두 다 비추는 이치와 같다. 그 본바탕은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을 때의 진짜 면목일 것이다. 반대로 그의 견처가 가짜라면 그의 오후행에 들어맞는 수식어는 '파계행'이다. 마치 소설의 주인공 지킬 박사와 하이드이며, 그 본질은 선도 행하고 악도 행하는 '부끄러운 자화상 이중인격'일 것이다.

우리네 존재의 참모습은 무엇일까? 조사선 확립 시기의 종장 혜능이 보여 준 것처럼 청정무구 본래면목, “중생 그대로 부처”일까. 자본주의 정착시기의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Rouis Stevenson, 1850~1894)이 묘사한 바처럼 “순수와 허위의 모자이크”일까?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오직 보는 자의 견처와 신념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 선택에 따라 경허와 그의 선을 해석할 것이다.

“티 없는 본질이 그대로 현실인가, 이지러진 현실이 그대로 본질인가?” 「오도가」를 부른 경허는 전자를 보았을 것이고, 삼수갑산으로 간 경허는 후자를 보았을 것이다. 「오도가」를 부른 경허와 삼수갑산으로 간 경허는 다를까, 하나일까? 조사선에 입각한다면 전자와 후자는 다르지 않다. 그대로 불이문일 것이다. (결사를 펼쳤던 경허는 이지러진 현실과 티 없는 본질을 함께 보았을 것이다.) 2008년 이 여름, 경허가 광화문 한복판을 보았다면, 「오도가」를 불렀을까, 삼수갑산으로 갔을까, 결사를 펼쳤을까? 咄. 

변희욱
1963년 서울 출생.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박사과정을 이수했다. <대혜간화선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취득. 현재 서울대 철학과 강사. <공안, 왜? 어떻게>외 다수의 논문을 썼다.

 

출처 불교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