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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목소리로]고통에서 날개가 돋다

slowdream 2009. 1. 18. 21:29

[낮은 목소리로]고통에서 날개가 돋다

 

 

 고진하 숭실대 겸임교수·시인
  • 동장군의 기세가 매섭다. 오랜만에 찾아간 매지 호수도 꽁꽁 얼어붙었다. 밤새 불던 북풍이 다행히 잦아들어 볕은 따뜻하다. 나는 호젓한 마음으로 호수 둘레를 돌아보려고 천천히 걷는다.

    청둥오리들의 생존 위한 고통

 

 

한참을 걷다가 호수 둑에 잠시 앉아서 쉰다. 호수 가운데는 청둥오리 몇 마리가 둥둥 떠 있다. 호수 전체가 거의 얼어붙었는데, 오리들이 떠 있는 그 부분만 얼음이 없다. 어떻게 저 부분만 얼음이 잡히지 않았을까. 그 때 마침 내 또래쯤 돼 보이는 한 사내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혹시 이 부근에 사시나요?”

“나는 저기 호수 건너편에 보이는 매운탕 집에 삽니다. 그런데…”

내가 궁금해 하는 것을 이야기하자, 사내는 곧 신바람이 나서 입을 연다. 요즘처럼 추운 겨울이면 밤중에 호수 위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쿵쿵 들린다고 한다. 몇 해 전 달 밝은 밤, 쿵쿵거리는 이상한 소리를 듣고 집에서 나와 보니, 호수 위 하늘에서 검은 물체들이 연거푸 낙하하더란다. 그렇게 검은 물체가 쿵쿵거리며 낙하한 뒤엔 얼음 깨지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그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궁금증은 다음날 아침에 풀렸다. 하늘에서 떨어져 얼음을 깬 그 검은 물체는 다름 아닌, 청둥오리들이었다. 그러니까 청둥오리들은 얼음이 두껍게 얼어붙으면 먹이를 사냥할 수 없으므로 얼음이 얇게 잡혔을 때 제 온몸을 던져서 미리 얼음을 깨놓곤 했던 것이다. 사내는 호숫가에 살며 자기가 겪은 일을 자세히 얘기해준 뒤 이런 주석을 다는 걸 잊지 않는다.

“참, 짐승이나 사람이나 산다는 게 만만치 않답니다.”

사내가 내 곁을 떠난 뒤 물 위에 떠 있는 청둥오리들을 바라보니, 이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한가롭게만 여겨지던 풍경 속에 그런 생존의 고통이 있었다니! 분주할 때면 찾아와 한가롭게 둥둥 떠 있는 오리들의 모습을 보며 삶의 여백을 비춰주는 거울처럼 여기던 관념이 산산이 부서졌다.

어떤 생명체든 그 삶의 이면까지 들여다보면, 고통을 피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걸 새삼 확인한 셈이었다. 누구나 삶에 고통이 없기를 바라지만, 고통이 없는 삶은 어디에도 없다. 고통의 경중(輕重)이 있을 뿐이다.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고통의 경중이 달라질 뿐이다.

희망의 날개 단 희귀장애인

경제 한파까지 겹친 요즘, 주변에 힘들어하는 이들이 참 많다. 돌아보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어려운 시절도 겪었다. 나 자신도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런 고통스러운 시절을 겪었는데, 그런 고통의 기억이 오늘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현실적 고통도 가벼워질 수 있다. 우리가 고통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면 우리는 어떤 고통도 견딜 수 있다.

나는 지난해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열렸던 전시회를 잊지 못한다. 선천성대사효소결핍증(페닐케톤뇨증)이라는 희귀장애를 앓고 있는 25살 젊은 작가 임윤아의 그림전시회. 뇌세포가 손상되어 발달장애를 일으키는 질환으로 손을 움직여서 반복적인 작업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데도 그는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하루 15시간 이상을 화폭에 매달리며 예술혼을 불태운 결과 독창적인 미술세계를 세상에 선보였다. 그리고 장애를 앓고 있는 이들에게 멋진 희망을 선물할 수 있었다. 작가가 전시 팸플릿에 남긴 짧은 고백 속엔 고통 속에서 의미를 잃지 않는 아름다운 삶의 철학이 묻어 있었다.

“나의 몸이 유난히 떨리는 것은 장애가 아니라 날개가 돋기 때문입니다.”

어린 작가의 이런 고백을 읽는 순간 나는 뜨거운 전율에 사로잡혔다. 우리가 이런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다면 고통도 더 이상 고통이 아니겠구나! 자신의 고통을 깊이 응시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그 고통에서 날개가 돋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런 고백은 단지 아름다운 은유만이 아니다. 그것은 청둥오리처럼 온몸을 던져서 생존의 희망을 이어가는 몸짓이며, 자신의 고통스러운 운명과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존재의 용기를 보여준 진정한 삶의 예술인 것이다.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