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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 세 알과 도시락을 작은 배낭에 담아 지고 가벼운 마음으로 산행을 나섰다.
멀리서 바라보던 치악산을 산 초입에 당도하여 쳐다보니 산불이라도 난 듯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을음 없는 불길이 내 심장으로 옮겨온 듯 막무가내로 가슴이 뛰었다. 젊은 시절 연인을 만나러 약속의 숲으로 갈 때도 이렇게 가슴이 뛰었던가.
땀방울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힐 즈음, 우뚝 하늘로 솟구친 선돌(立石) 하나가 앞을 가로막았다. 산 정상이 멀지 않은 듯싶지만, 힘에 겨운 다리와 엉덩이가 먼저 몸을 주저앉혔다. 몸의 신호를 따르라는 듯 가까운 사찰에서 스님의 독경소리가 낭랑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우리는 선돌 옆 낙엽이 깔린 오솔길에 몸을 주저앉히고 눈앞에 펼쳐진 오색단풍의 바다를 보며 한동안 넋을 잃었다. 묵묵히 눈으로만 산빛과 교감을 나누던 우리는 몸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곁에서 밥을 먹던 아내가 문득 입을 떼었다.
“늙는 것과 여무는 것은 다르겠죠? 저 아름다운 단풍들처럼 잘 여물어야 할 텐데!”
늦가을 곱게 물들어가는 낙엽
아내가 건네준 말이 새삼스러워 나는 곱게 물들어가는 늦가을 산에서 오래도록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흔히 사람들은 우수수 흩날리는 낙엽을, 삶의 종말을 뜻하는 상징으로 치부하고 만다. 그걸 거울삼아 자신의 늙음만을 반추하지 그 빛깔에서 존재의 성숙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나이테를 헤아리며 그냥 늙어만 가는 인생들. 그러나 겉사람은 늙어가도 번뜩이는 지혜와 삶의 통찰력을 갖춘 잘 여물어 가는 인생도 있다. 내면의 뜰을 알뜰살뜰히 가꾼 이들이다. 풋풋하던 잎사귀가 진액을 잃어 떨어진 뒤 고목(枯木)처럼 알몸이 드러나지만 아무도 그 당당한 알몸을 깔볼 수 없다. 깔보기는커녕 부끄러움에 절로 머리가 숙여질 뿐이다.
아마도 늦가을의 나무들처럼 알몸의 귀향이 가까워진 붓다에게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던진 붓다의 제자 아난다가 그랬을 것이다. 어느 날, 붓다가 아난다와 함께 숲을 지나가고 있었다. 마침 길 위에는 낙엽이 쌓여 바람이 불 때마다 소리를 내며 뒹굴었다. 그 때 곁에 있던 아난다가 스승에게 물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스승께서는 자신이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드러내셨습니까? 아니면 무언가 우리에게 숨기고 계신 것이 있습니까?”
붓다가 대답했다.
“아난다야, 네가 보다시피 나의 손은 이렇게 펼쳐져 있다. 깨달은 자는 주먹을 쥐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이 숲을 보아라. 숨기는 것이 없다. 나는 이 숲처럼 열려 있다. 깨달은 자는 주먹이 없는 법이다.”
그러고 나서 붓다는 낙엽 몇 잎을 집어 손안에 넣고 주먹을 쥔 다음 말했다.
“지금 나의 주먹은 닫혀 있다. 너는 그 낙엽을 볼 수 없다.”
다시 붓다는 주먹 쥔 손을 활짝 폈다. 낙엽들이 그의 손에서 떨어져 흩날렸다. 붓다가 말했다.
“깨달은 자의 손은 주먹과 같지 않다. 그는 열려 있다. 나는 모든 것을 드러내었다. 만일 무언가 감추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너 자신 때문이지 나 때문이 아니다.”
이처럼 깨달은 자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통나무처럼 소박 단순하기 때문이다. 알몸의 귀향을 항상 의식하고 살기 때문에 그 알몸에 거짓의 옷을 두르지 않는다.
삶의 종말이 아닌 성숙을 본다
보화가 안에 그득하여 광채를 뿜는데 무엇 때문에 겉을 꾸미겠는가. 곱게 물든 아름다운 낙엽의 빛깔이 나무 내부의 작용에서 비롯된 것이듯, 아름답게 여문 인생은 그 내면을 잘 가꾸었기 때문에 따로 장식이 필요치 않다.
우리는 도시락을 까먹고 산을 내려오며 훌훌 옷을 벗어 알몸의 귀향을 준비하는 가을 산을 보면서 후련한 기분에 ‘야호!’ 소리도 몇 번 외쳤다. 건너갔다 건너오는 짧은 메아리 속에서 환청처럼 이런 청량한 음성도 들렸다. 늙지만 말고 잘 여물어 가게나!
<고진하 | 숭실대 겸임교수·문예창작학과·시인>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