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최초의 설법(2)
네 가지 명제
‘사제설법’이란 네 가지 명제로 된 설법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제(諦, sacca)’란 일반적으로 진실 또는 진상을 뜻하는 말로 해석되고 있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엄숙한 단언’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오히려 후자의 뜻이 강하다 즉 부처님에 의해 엄숙하게 말해졌던 네가지 단언적(斷言的) 명제가 사제라고 불려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앞에서 예로 든 경전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비구들이여, 고성제(苦聖諦)란 이런 것이다. 태어난다는 것(生)은 고다. 늙어가는 것(老)은 고다. 병드는 것(病)은 고다. 죽는 것(死)은 고다. 한탄과 슬픔, 근심과 걱정도 고다. 싫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고다(怨憎會苦).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은 고다(愛別離苦).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고다(求不得苦). 인간의 존재를 구성하는 그 자체가 고다(五陰盛苦)..."
사제설법 가운데 제1명제는 ‘이것은 고다’라는 것이다. 즉 인생은 바로 괴로움(苦)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생에는 즐거운 일도 있고 기쁜 일도 있다. 부처님은 이런 즐거움이나 기쁨에 굳이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시 눈을 크게 뜨고 그 진상을 들여다본다면 즐거움이란 괴로움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기쁨도 조만간 슬픔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그 기쁨이란 참된 기쁨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이러한 유한성을 짊어지고 있는 한 인생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렇게 인생을 관찰하고 ‘인생은 고’라는 결론 앞에 마음이 항하여 염세의 포로가 되었던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이같은 인생고의 해결점을 찾으려 했다. 즉 인생고가 다가오는 원인을 찾아 그것을 제2의 명제로 설명하고 있다. 경전에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고가 생기는 성제(聖諦)는 이러하다. 미혹의 삶을 불러 일으키고 기쁨과 탐욕을 수반하고 이것 저것 얽혀드는 갈애가 그것이다. 욕(欲)의 갈애, 유(有)의 갈애, 무유(無有)의 갈애가 그것이다. "
이 제2의 명제는 ‘이것이 고가 생기(生起)하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인생이 그토록 괴로운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갈애, 다시 말해 끝없는 욕망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갈애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 문제가 좀 난해한 부분이다.
먼저 ‘미혹의 삶을 불러일으킨다’라고 말한 부분이다. 그것은 현대인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이를 굳이 설명한다면 갈애가 번뇌를 부추겨서 인간으로 하여금 윤회를 반복케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경전은 ‘기쁨과 탐욕을 수반하고 이것 저것 얽혀드는 갈애’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것은 정신적 환락과 육체적 욕망이 불길처럼 타올라 대상에 쇄도해 들어가는 상태를 말한다.
이어서 갈애는 ‘욕(欲)의 갈애’ ‘유(有)의 갈애’ ‘무유(無有)의 갈애’로 다시 분류된다. 여기서 욕의 갈애란 자기연장의 욕구로서 성욕을 말한다. 유의 갈애란 자기보존의 욕구로서 식욕과 같은 것을 말한다. 그리고 무유의 갈애한 자기우월의 욕구로서 명예욕과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러면 이 같은 인생고에 대한 대치(對治)방법은 어떤 것일까. 경전은 이렇게 말한다.
"비구들이여, 고가 멸진(滅盡)한 성제(聖諦)는 이렇다. 갈애를 남김없이 떨쳐 없애고 버리고 뿌리치고 해탈해서 집착 없음에 이르는 것이다. "
이 제3의 명제는 ‘이것이 고의 멸진이다’라는 것이다. 만약 인생고의 원인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갈애의 존재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그 고를 멸진하기 위한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즉 철저하게 그 갈애를 멸진케 할 때 고는 없어지게 된다. 이것은 참으로 명쾌한 재단이며 더 이상 아무런 설명도 주석도 필요 없다. 그러나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에 대한 대답이 제4의 명제로서 준비되어 있다. 경전에서는 ‘비구들이여,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의 성제는 이러하다. 즉 정견ㆍ정어ㆍ정업ㆍ정명ㆍ정정진ㆍ정념ㆍ정정이다’라고 말한다.
제4의 명제는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 여기서 길(道)이란 실천을 뜻하는 말이다. 제3의 명제에 의행 제시된 처방에 따라서 고의 멸진을 실현해야 할 실천항목이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그 실천항목애란 앞에서 말한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길이다. 이 사제의 체계란 결국 앞에서 말한 대로 중도(中道), 그리고 팔정도(八正道)를 받쳐주는 사상적 근거이다.
깨달은 콘다냐
부처님은 이와 같은 명제를 연이어 내놓고 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했다. 그러나 다섯 비구들이 결코 그것을 단숨에 이해하고 납득했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런 것들은 방대하고 치밀한 인생의 대계획이다. 또 다섯 비구들도 새로운 자유사상가들이었므로 부처님이 말하는 네 가지 명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견과 질문, 또는 토론을 반복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 뜻에서 최초의 설법이란 그 후의 부처님이 말씀한 수많은 설법과는 그 성격이 사뭇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초천법륜 때의 설법은 스승과 제자, 설법자와 청중이라는 관계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차라리 그것은 하나의 토론장이었다고 생각된다. 즉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새로운 진리를 가지고 와서 이들 5명의 비구들 앞에 내놓고 음미하고 테스트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이에 대한 한 경전*(남전 중부경전 26 聖求經. 한역 중아함경 204 羅摩經)은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기록을 전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리하여 내가 두 사람의 비구들에게 가르치고 잇을 때에는 3명의 비구들이 탁발을 해와 우리들 6명이 생활했다. 또 내가 세 사람의 비구들에게 가르치고 있을 때에는 2명 비구들이 탁발을 해와 우리들 6명이 생활했다.
이것은 최초의 설법이 결코 하루이틀에 끝난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질의응답은 며칠이고 계속되었다. 다섯 비구의 질의응답이 계속된 지 며칠 후, 그 중 한 사람인 콘다냐(憍 陳如)란 사람이 드디어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이해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였다. 앞서 말한 ‘여래소설(如來所說)'은 그것을 ’콘다냐에게는 맑고 깨끗한 법안(法眼)이 생겼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콘단냐에게도 기쁜 일이었음에 틀림없지만 그 이상으로 기쁜 사람은 부처님이었다. ’참으로 콘다냐는 깨달았다. 정말로 콘다냐는 깨달았다‘라고 부처님은 그 기쁨을 표현했다.
이 표현 속에는 지금까지 혼자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정각(正覺;깨달음)의 내용을 마침내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킬 수 있었다는 기쁨이 담겨져 있다. 경전에의하면 이로 인해 콘다냐는 이름 앞에 ’안냐타aññāta)‘라는 별명을 하나 붙이게 되었다. ’안냐콘다냐(阿若憍陳如)‘란 ’깨달은 콘다냐‘란 뜻인데 이는 그때 부처님이 소리쳐 했던 말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던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콘다냐에 이어 다른 네 명도 뒤를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여래소설경》은 이때의 감격을 ‘이때 대천세계(大千世界)는 아주 크게 흔들렸다. 또한 무한하고 광대한 광명이 이 세상에 나타났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율장《대품》(1.1)에서는 ‘그때 이 세상에는 6명의 성자(聖者)가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같은 기록은 그때 이 세상에 불교라는 종교가 처음으로 생겨났음을 전해주는 것이다. 여기서 ‘세계가 흔들렸다’는 옛 경전의 문학형식으로, 이는 세상에서 최상급의 큰일이 일어났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오늘날 우리가 이 초전법륜을 부처님의 생애 가운데 네 가지 사건 중 중요한 사건의 하나로 여기고 있는 생각의 연원도 여기에 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아함경전에 의행 알 수 있는 초전법륜, 즉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한 내용의 개략적인 상황이다
출처 홍사성의 불교사랑 http://cafe.daum.net/hongsa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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